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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세계의 성모 성지: 크로아티아 마리아 비스트리차(성모상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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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6-06-01 ㅣ No.2545

[세계의 성모 성지] 크로아티아 마리아 비스트리차(성모상 성지)


마리아 비스트리차의 검은 성모

 

 

 

- 십자가의 길 언덕에서 바라본 성지 전경

 

 

1) 성모상의 역사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북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비스트리차’라는 이름을 지닌 작은 마을이 있었다. 15세기 말, 이 마을에 살던 뛰어난 목조 장인은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받던 가톨릭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모상을 조각하여 봉헌하였다. 이 성모상은 1499년부터 비스트리차에서 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포도주의 언덕’이라 불리던 빈스키 브르흐(Vinski Vrh)에 세워진 오래된 경당에 모셔졌다. 오랜 세월 동안 촛불의 그을음이 쌓이고 자연스럽게 변색되면서, 성모상은 점차 검게 변하였고 이후 ‘검은 성모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 마리아 비스트리차의 성모

 

 

한편 1526년,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세는 약 10만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1529년 9월 27일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까지 포위하였다. 오스만제국은 2주 동안 공성전을 이어갔으나 결국 빈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왕국에 속한 크로아티아왕국의 형태로 존재하였으며, 자그레브를 포함한 북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는 이미 오스만제국의 점령 아래 놓여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1545년 5월 4일 비스트리차 인근 코니슈치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자그레브와 비스트리차 역시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에 빈스키 브르흐 경당의 주임 신부는 성모상의 안전을 위하여 성모상을 비스트리차의 성당으로 옮긴 후, 합창석 바닥 아래에 아무도 모르게 묻었다. 성모상이 갑자기 사라지자 신자들은 그 행방을 주임 신부에게 물었으나, 신부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고 답함으로써 비밀을 지켰다. 

 

세월이 흘러 신부는 선종하였지만 신자들은 성모상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찾아다녔다. 그러던 1588년 어느 날 저녁 미사 후, 비스트리차 성당의 합창석 바닥에서 신비로운 빛이 비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다음날 주임 신부와 신자들이 그 빛이 나왔던 바닥을 파자, 오래전에 사라졌던 성모상이 나왔다. 성모상은 곧바로 중앙제단에 모셔졌고, 이 소식을 들은 신자들이 성당으로 몰려와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였다.

 

1650년, 오스만제국의 공격이 다시 심해지자 비스트리차 성당의 주임 신부는 성모상의 안전을 위해 성모상을 제단 뒤편 벽 속에 숨기고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의 끊임없는 침략이 이어지는 가운데, 성모상까지 자취를 감추자 비스트리차로 향하던 순례의 발걸음도 점차 줄어들었다. 1683년, 오스만제국은 다시 한번 오스트리아의 빈을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하면서 발칸반도에서의 지배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 광장에서 바라본 성지의 입구(좌) 중앙제단, 성모상 좌우에 있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성상(우)

 

 

이러한 정세 변화 속에서, 젊은 시절 비스트리차를 맨발로 순례할 만큼 성모 신심이 깊었던 자그레브의 주교 마르틴 보르코비치는 1684년 사라진 성모상을 찾도록 비스트리차에 요청하였다. 성당을 샅샅이 조사한 끝에, 7월 15일 성모상이 발견되었고 성모상은 즉시 제단에 다시 모셔졌다. 이튿날 주일미사 중에는 다리가 마비되어 있었던 소녀 카타리나가 다시 걷게 되는 첫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성모상의 재발견과 기적의 소식이 전해지자, 자그레브는 물론 헝가리에서도 순례자들이 비스트리차를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 오스만제국 감옥에 갇혀있던 군인이 성모님의 전구로 풀려났다는 기적을 묘사한 성화(1689년)(위) 회랑 벽에 가득 찬 봉헌판(아래)

 

 

2) 마리아 비스트리차 성모 성지

 

1708년부터 흑사병이 유행하자 1710년 10월 크로아티아 의회는 오스만제국과의 전쟁과 흑사병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켜 달라고 바스트리차 성모님께 국가를 봉헌하고, 비스트리차를 공식 성지로 승격시켰다. 또한 비스트리차 성당에 서원 제단을 세우기로 결의하였으며, 1715년에 성모님과 그 좌우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성상을 배치한 중앙제단을 완성하였다. 

 

1717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베오그라드 전투에서 오스만제국에 대승을 거두었고, 이듬해인 1718년 7월에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오스만제국은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광범위한 지역을 포기하게 되었다. 크로아티아 역시 전 영토를 회복하고 오스만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이 모든 일이 비스트리차 성모님의 특별한 보호와 전구로 이루어진 것이라 믿었다. 이에 1731년 기존 성당을 바로크 양식으로 대규모 확장하고, 성당의 이름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당’에서 ‘성모 성당’으로 변경하고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또한 성지와 마을의 이름도 ‘마리아 비스트리차’로 개칭하였다. 이후 마리아 비스트리차는 크로아티아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의 신자들까지 찾아오는 대표적인 성모 순례 성지가 되었다. 

 

1748년에는 순례자들을 위해 성당 주변을 둘러싸는 회랑이 세워졌다. 회랑 내부 벽의 상단에는 비스트리차 성모님과 관련된 22개의 기적 이야기가 성화로 그려져 있다. 이 기적 성화들은 기적이 보고되고 교회로부터 인정받을 때마다 순차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연대순으로는 배열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기적 성화 아래에는 성모님의 도움에 대한 감사를 기록한 3,000개 이상의 봉헌판이 빼곡히 걸려 있다. 이는 비스트리차 성지가 수 세기 동안 수많은 기도와 응답이 이루어진 장소였으며, 가톨릭 신앙의 중심지로 자리해 왔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되고 있다.

 

 

3) 교황의 축복과 봉헌

 

1935년 7월 7일, 성모상의 두 번째 발견 250주년을 기념하여 자그레브 대주교는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약 3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비스트리차 성모상에 대한 대관식을 거행하고, 성모님을 ‘크로아티아의 여왕’으로 선포하였다. 1971년 8월 15일 제13회 국제 마리아 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되면서 최초로 국제적 규모의 행사를 치르는 성지가 되었다. 

 

 

- 마리아 비스트리차 성모상과 성지(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성상(우)

 

 

또한 1998년 10월 3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방문하여 크로아티아 국민들을 위로하고, 크로아티아를 성모님께 공식적으로 봉헌하며 대규모 야외 시복식 미사를 집전하였다. 교황의 방문은 ‘마리아 비스트리차’ 성지가 세계적인 가톨릭 순례 성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성모님의 군단, 2026년 5월호, 최하경 대건안드레아(서울대교구 도곡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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