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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순교 역사 지킨 평신도들2: 현양하다 - 김진용 마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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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성월 특집 - 순교 역사 지킨 평신도들] (2) 현양하다 : 김진용 마티아 “순교자 현양에 미친 삶”… 잊혀 가는 순교 역사 발굴에 일생 바쳐
100여 년간 지속된 박해를 견디며 목숨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순교 신심을 기리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순교자들의 행적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순교사 연구와 순교자 현양에 일생을 바친 김진용(마티아, 1927~2012) 전 인천교구 부평2동본당 총회장의 삶을 소개한다.
신앙의 섭리에 이끌린 길
한국교회 순교자 현양 사업에 몸담은 성직자나 신자들은 김진용 회장을 “본업을 제쳐 두고 순교성지 발굴과 개발에 평생 헌신한 인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더 직설적으로 “순교자 현양에 미친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김 회장은 인천교구 소속이었지만 순교자 현양 사업을 위해서는 교구를 초월해 활동했다. 인천교구는 물론 서울, 수원, 의정부, 제주교구 심지어 중국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숱한 직책을 맡아 ‘김 회장님’으로 불리곤 했다.
그러나 그가 순교자 현양에 빠져든 내력을 알게 되면 신앙의 섭리를 느끼게 된다. 1927년 경기도 용인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20대 시절이던 6·25 한국전쟁 기간 영국군 파병부대에서 근무했다. 1953년 12월 전역한 뒤, 당시까지 남한에 계속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부대 한국인 책임자로 취업해 성실히 근무했다. 전쟁 직후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한국인에게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그러던 중 부대 상급자로부터 신앙인으로서의 양심에 어긋나는 요구를 받은 그는 갈등을 겪다 ‘작은 이익을 탐하여 하느님의 뜻을 저버릴 수 없다’고 결심하고 사표를 냈다. 1954년 3월경이었다. 김 회장의 미완성 자서전 「은총의 세월 김진용 마티아 유고집」에 기록된 이 사연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 회장이 만일 세상과 타협하고 안락한 직장 생활을 누렸다면 지금의 ‘김진용 회장’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직장을 나와 인천 부평2동에서 ‘성심한약방’을 운영하는 한약사가 됐고, 한국교회사 연구의 태두인 고(故) 최석우(안드레아, 1922~2009) 몬시뇰을 만나게 되면서 순교사 연구에 빠져들었다. 한약방 서재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교회사 서적들을 시간 나는 대로 탐독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김 회장은 전문 연구가 못지않은 학문적 깊이를 지니고 ‘김대건 신부 가족 피난지에 관한 연구-용인 한덕동을 중심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 천주교 신자 순교성지 위치 소고’ 등 다수의 논문을 교회사 관련 학술지에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김 회장이 순교사 발굴과 현양에 남다른 열정을 불태웠던 배경에는 깊은 신앙과 더불어 교회사에 대한 전문가적 이해가 자리하고 있었다.
잊혀 가는 순교사 찾기에 열정 불태워
김 회장은 순교자들의 발자취가 시간이 흘러가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문헌 연구가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아 순교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한약방을 운영해 모은 막대한 재산 대부분을 순교사 발굴과 현양에 아낌없이 쏟아부은 이유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아버지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 김제준(이냐시오)의 묘를 찾기 위해 관련 문헌과 고지도 등을 샅샅이 확인해 가며 1996년 11월부터 2009년 3월까지 총 25차례에 걸쳐 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탐색했던 활동은 비록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김 회장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1901년부터 1976년까지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에 있던 성 이윤일(요한)의 묘소가 수원교구 미리내를 거쳐 대구대교구로 이전된 후 본래 묘소 자리가 방치되자 성역화에 나섰다. 순교자의 묘소를 무관심하게 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는 묘소 주변 부지 3000평을 대구대교구 명의로 매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본래 묘소 자리를 성역화하는 사업도 주도했다.
성 김대건 신부 유적지인 은이공소와 미리내 사이 ‘신·망·애 삼덕 고개’에 1998년 사업비를 부담하며 비석과 기념물을 세운 것도 신자들이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뿐 아니라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베드로)의 인천 장수동 묘역이 폐허처럼 변해 있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겨 1990년대 후반 새롭게 단장하는 사업에 앞장섰고, 그 결과 이승훈 묘는 2011년 12월 28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될 수 있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에 있는 성 남종삼(요한)의 묘를 찾아가는 신자들을 위해 안내 비석이나 간판 등이 전혀 설치돼 있지 않은 사실을 알고 비용을 부담해 묘 주변에 안내 시설을 마련한 것도 김 회장이었다.
또 성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17일 사제품을 받은 역사적 장소인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이 중국 당국의 도시개발에 의해 2001년 3월 30일 철거되자 수원교구 은이성지에 원형대로 복원되도록 건의하고 재정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김 회장과 수십 년 동안 순교자 현양 활동을 같이 했던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 이래은(데레사) 부회장은 “회장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품이어서 그분이 하신 엄청난 일 중 일부만이 알려져 있다”며 “늘 시선을 미래에 두고 후세에 순교 역사를 전하려 노력하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실제로 그의 미완성 자서전에 기록된 활동 중 교계 언론 등에 소개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는 김 회장의 이러한 공로에 감사를 표하며 2002년 가톨릭대상(문화 부문)을 수여했다.
■ 김진용 회장과 수원교구 한덕골 사적지
수원교구 용인 한덕골 사적지는 순교사를 발굴하고 후세에 전하려는 김 회장의 신앙과 집념이 가장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한덕골 사적지가 성 김대건 신부 가족 피난지로서 명확히 한국교회에 인식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의지가 낳은 결과였다.
김 회장은 교회사 문헌들을 연구하던 중 김대건 신부 가족이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이주한 장소가 ‘골배마실(寒德洞, 한덕동)’로 서로 다른 지명이 함께 표기된 것에 의문을 품었다. 골배마실과 한덕동은 완전히 별개 마을임에도 두 지명이 병기된 것은 오기이거나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김대건 신부 가문 족보를 면밀히 분석해 조부인 김택현(金澤鉉, 1766~1830)의 묘와 숙부인 김제철(金濟哲, 1803~1835)의 묘가 용인 한덕동에 있다는 사실을 찾아냄으로써, 김대건 신부 가족 피난 장소는 한덕골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다.
연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용인 지역 지명을 보다 명확히 확인하기 위해 1990년대 초 용인군청과 이동면사무소의 협조를 얻어 마을 위치와 명칭을 검증했다. 이와 같은 치밀한 연구 결과는 1993년 7월 ‘김대건 신부 가족 피난지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발표됐고, 「한국가톨릭대사전」 1995년 판에 논문 내용이 반영되는 결실을 얻었다.
김 회장은 한덕골 사적지 부지를 1999년 3월 사비로 매입해 수원교구에 기증했고, 제대와 대형 십자가, 성 김대건 신부상 등도 봉헌했다.
[가톨릭신문, 2026년 9월 13일, 박지순 기자] 0 4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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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용(마티아) 회장은 평생을 순교사 발굴과 개발에 헌신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2008년 11월 5일 성 이윤일 묘소에서 봉헌된 성역화 은인들을 위한 감사미사 후 김진용 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날 김 회장은 묘소 성역화에 헌신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