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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 수원교구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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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구원받기를 원하면, 메시아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46-56).”
1)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 자신의 개인적인 찬양이
아니라, 공적인 찬양입니다.
즉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마리아가 ‘주님의 구원 사업을 찬양한 찬미가’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기쁨은 곧 모든 신앙인의 기쁨이고,
마리아의 행복은 곧 모든 신앙인의 행복입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이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고백한 말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3.5-6).”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시작됩니다.
‘메시아 강생’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을 구원하려고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신 일입니다.
2) ‘마리아의 노래’의 내용은 뒤의 6장에 있는
‘참 행복과 불행 선언’ 말씀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루카 6,20ㄴ-21ㄴ).”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루카 6,24-25ㄴ).”
‘참 행복 선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고, ‘불행 선언’은 심판받을 것이라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그 약속과 경고가 ‘이미’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감사드리면서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3)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드리고
찬양했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감사드리고 찬양한 것은 아닙니다.
메시아의 구원 사업은 ‘편 가르기’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아무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도 회개하고,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게 자신을
낮추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재물을 하느님처럼 떠받들면서,
절대로 그것을 버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면,
모든 것을 잃고 허무하게 멸망할 것입니다.>
4) 그리고 우리는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난하다는 것 자체가 구원받을 자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가난 때문에 더 재물을 원하고, 더 탐욕에 빠지고,
부유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자기도 부유하게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자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권력과 재물 편에 서지 않고,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더라도 가난에 굴하지 않고 하느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하느님 나라만을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들 쪽으로 가시는 분이니,
우리도 그쪽으로 가야 합니다.
5)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지만, 그 구원은
‘진심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만 받게 됩니다(50절).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권력이나 재물 같은 것에는
관심 갖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에만
집중하는 이들입니다(마태 7,21).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자들,
즉 구원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들이 구원을 안 받으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김건태 신부님_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오늘의 복음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정확하게 말해서 감사 송가 또는 감사 시편으로 손꼽히는 마리아의 노래를 담고 있으며,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마리아가 하느님을 향하여 올리는, 개인적인 감사의 마음이 표현됩니다(46-50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사실 마리아는, 하느님이 당신에게 위대한 사명을 부여하신 만큼, 당신을 사랑하셨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믿을 수 없는 충동에 싸여, 하느님이 당신을 채워주셨으며, 그분은 당신에게 매우 좋으신 분임을 깨닫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큰 책임을 부여하거나 놀라운 선물을 건네줄 때,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대접을 받기에 부족한 몸입니다.” 하는 겸손의 말씀을 자발적으로 올리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개별적으로 사랑해 주시며 신뢰하고 계심을 깨닫기 위해서,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주신 놀라운 일들을 마음을 다하여 진솔하게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노래는 그 찬송의 영역을 더 넓혀 갑니다(51-55절). 이 노래에서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드러내 보이신 구원의 몸짓들을 연이어 찬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선성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곧 아브라함부터 그의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당신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을 향하여 세세대대로 펼쳐집니다: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 곧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당신의 자비로 거두어 주십니다.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인 마리아를 통하여, 전능하신 분께서 이제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을 철저하게 낮춘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질 큰일, 구세주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데서 출발해야 함을 새깁니다.
오늘 하루, 자신이 비천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자랑하는 하루, 비천한 존재를 통해서 하느님은 큰일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외치는 하루, 그럼으로써 곧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할 수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46-56: 마리아의 노래-하느님 찬미가
1.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는 노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뛰니”(47절).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크기를 자신의 전 존재, 곧 영혼과 마음으로 찬양한다. 이 찬미는 단순한 입술의 노래가 아니라, 존재 전체의 응답이라는 점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설명한다. “마리아의 영혼은 주님을 위대하게 하고, 마리아의 정신은 하느님 안에서 기뻐한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은 그분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자신 안에서 그분을 드러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II,26) 즉, 마리아의 노래는 단지 자신의 은총 체험을 넘어, 그리스도를 품은 모든 이들의 찬미의 모범이다.
2. 겸손과 은총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48절). 마리아는 자신을 “비천한 여종”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대목을 해석하며 이렇게 강조한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대하게 한 것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고 고백한다. 그분은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겸손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다.”(Sermo 10 de Sanctis, 3) 이 고백은 마리아가 단순히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넘어, 은총의 전형으로 세워졌음을 보여 준다.
3. 교만한 자와 가난한 자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3절). 여기서 굶주린 이는 단순히 물질적 가난이 아니라,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반대로 부유한 자는 스스로 충만하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자들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하느님을 향한 갈망”의 신비로 해석하며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음식으로 주셨다. 그러나 자기 배를 채운 자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Adversus Haereses V, 34,2) 곧, 하느님은 굶주린 자들의 양식이시며, 성체성사 안에서 이를 가장 완전하게 실현하신다.
4.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 “그분께서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54-55절). 마리아의 찬미가 끝맺음은 언약의 성취를 선언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가르친다. “마니피캇은 하느님의 자비가 역사 안에서 어떻게 충만히 드러났는지를 보여 주는 노래이다.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성취되었다.”(Deus Caritas Est, 41) 마리아의 노래는 곧 언약의 성취를 노래하는 교회의 찬미이다. 그래서 교회는 매일 저녁 기도(성무일도)에서 이 노래를 바친다.
5. 영성적 적용 마리아는 단순히 말씀을 잉태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분이시다. 말씀을 믿고, 말씀을 품고, 말씀을 삶으로 낳아주셨다. 따라서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마리아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신앙은 곧,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마리아는 믿음 안에서 복되신 어머니일 뿐 아니라, 교회가 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이다. 교회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봉헌하며,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세상 안에 그리스도를 낳는다.”(RM, 43) 마리아의 찬미가 마니피캇은 겸손한 영혼의 찬미, 언약 성취의 노래, 교회의 일상적 기도의 핵심이다. 마리아가 성탄을 준비한 방식은 바로 말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실천이었고, 이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성탄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전삼용 신부님_신앙인이 항상 기쁠 수 있는 이유
찬미 예수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나이팅게일』에는 아주 흥미로운 대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중국 황제에게 일본 천황이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황금 나이팅게일'을 선물합니다. 태엽만 감으면 언제나 똑같은 박자로 완벽한 노래를 부르는 기계 새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화려함에 감탄했고, 숲에 살던 진짜 나이팅게일은 초라해 보여 숲으로 쫓겨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떻게 되었을까요? 황금 새의 부품이 마모되어 소리가 나지 않게 되었고, 황제는 병이 들어 죽음의 문턱에 섰습니다. 그때 숲에서 진짜 나이팅게일이 날아와 노래합니다. 기계 새는 누군가 조작해야 노래하지만, 진짜 새는 생명으로 노래합니다. 황제는 그 생명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건강을 되찾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숲으로 쫓겨났던 진짜 새는 슬펐을까요? 아마 잠시는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계속 노래했을 테고, 결코 좌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받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가짜 새는 다릅니다. 상품성이 떨어지고 태엽이 풀리면, 더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화려해도 내면은 늘 불안합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기쁨을 세상에 팔리는 '상품성'에서 찾는 사람이 있고, 창조주에게서 오는 '은총'에서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조화'의 인생이고, 후자는 '생화'의 인생입니다.
오늘 복음과 마태오 복음 6장을 연결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들판의 꽃 한 송이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의 옷은 당대 최고의 기술로 만든 명품, 즉 상품이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자신의 위엄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걸친 것이었습니다. 입을수록 낡아지는 조화와 같습니다.
반면 나리꽃은 아침마다 하느님이 주시는 이슬과 햇살을 머금고 새로 피어납니다. 살아있는 생화는 언제나 물과 영양분을 공급받기에, 그리고 그 덕분에 누군가에게 생명력을 줄 수 있기에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의 기쁨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는 조화가 되기도 하고 생화가 되기도 합니다. 생화는 타인의 시선보다는 창조자에게서 오는 기쁨에 초점을 둡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가 그러셨습니다. 그분은 비천한 여종이었지만, 성령으로 구원됨을 느끼며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스스로 빛나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빛을 받으려 했기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여전히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어 진열대에 올리려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서 오는 보상과 인기를 바라지만, 결국 그 끝은 자신이 그저 하나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좌절감뿐입니다.
세기의 아이콘 마릴린 먼로를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조화'였습니다. 그녀는 화려했지만,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할 정도로 늘 불안했습니다. "나는 대중의 것입니다. 내 몸도, 내 웃음도."
그녀는 자신을 대중에게 팔려야 하는 상품으로 여겼기에, 인기가 떨어질까 봐 극도의 불안과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끊임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생명수)을 느끼지 못했기에, 약물과 알코올로 시든 꽃잎을 억지로 붙이고 있다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이클 잭슨, 어니스트 헤밍웨이,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최근의 지드래곤까지...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상품이 아닌 작품으로, 조화가 아닌 생화로 살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무엇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받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동화 『벨벳 토끼 인형』에 아주 감동적인 대화가 나옵니다. 장난감 방의 반짝이는 새것들 사이에서 낡은 토끼 인형이 지혜로운 말 인형에게 묻습니다. "진짜가 된다는 건 태엽이 감겨서 움직이는 건가요?" 말 인형이 대답합니다. "아니란다. '진짜'는 어떻게 만들어졌느냐가 아니라, 아이가 너를 오랫동안 진심으로 사랑해 줄 때 일어나는 일이야. 털이 빠지고 눈이 떨어져 나가도, 사랑받는 존재는 낡아지는 게 아니라 '진짜'가 되는 거란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세상의 눈에 우리가 조금 낡아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순간 우리는 상품이 아니라 '진짜 생명'이 됩니다.
저 역시 사제로서 매일 강론을 씁니다. 하지만 저는 강론을 '잘' 해서 여러분께 박수받는 상품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강론을 쓰기 위해 묵상하는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성령의 깨달음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 진짜 목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강론을 들어주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제가 주님 앞에 앉아 사랑받음을 느끼고, 그렇게 저는 비로소 사제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생화)가 열매를 맺기 위해 스스로 끙끙대며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지의 유일한 의무는 나무(예수님)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조화는 붙어 있지 않기에 스스로 빛나야 하지만, 생화인 가지는 붙어 있기만 하면 뿌리에서 올라오는 수액, 곧 성령이 저절로 꽃을 피웁니다.
오늘 하루, 세상의 진열대에서 내려와 주님의 품에 안기십시오. "나에게 붙어 있어라." 이 말씀에 머무를 때, 우리는 비로소 향기 나는 생화가 되어 세상에 참된 기쁨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9)
'우리도 하느님께 감사 찬미가를 불러드리자!'
오늘 복음(루카1,46-56)은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시간경 기도인 성무일도 저녁기도를 바칠 때 부르는 '성모의 노래', 곧 '마니피캇(Magnificat)'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찬미가'입니다. 비천한 종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드리는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6-48)
마리아가 하느님 아버지께 바친 감사 찬미가인 '성모의 노래'는 우리가 매일, 아니 매순간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드려야 할 '감사 찬미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매일, 매순간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나의 주파수, 곧 나의 몸과 마음이 하느님의 주파수에 맞추어져 있으면 하느님의 은총이 나에게 쏟아집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주파수에 나의 주파수를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노력이 바로 '기도 생활'이고, 바로 '내가 미사에 참례하는 이유'이며, '매일 성경을 필사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삶이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물이 많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시는 성탄입니다. 보잘것 없는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허물을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니,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 밖에도 우리가 받은 크고 작은 감사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은총에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을 찾아내서, 우리도 성모님처럼 감사의 찬미가를 불러드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8)
(~ 토빗8,12)
병자를 위한 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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