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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최창무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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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04 ㅣ No.674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 (1)


60년 사제의 길… 성령께서 하시는 일의 심부름 했을 뿐

 

 

- 최창무 대주교는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느님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 박원희 기자.

 

 

“오 나의 주님, 제 마음과 제 몸과 저의 온 존재를 받아주소서. 저는 기도할 줄도 사랑할 줄도 고통을 이겨낼 줄도 모릅니다. 당신 친히 오시어 제 안에서 모든 것을 완성해 주소서.”

 

이 기도를 바치며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렇게 사제로 살아온 모든 시간, 그 면면은 어떤 질곡에도 주님을 닮고 그 가르침대로만 살려고 노력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사제로서 혼신을 다했던 삶에 대해 ‘그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의 심부름을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햇수로 60년째 사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후배 사제들을 양성하는데 바친 시간만 25년이었습니다. 이어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특히 사회사목 주교대리로서 세상을 위한 교회를 구현하는데 힘썼습니다. 광주대교구장을 맡아 교구가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는데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본당 주임은 한 번도 못 맡았습니다. 아쉽지 않느냐는 신자들의 짓궂은 질문에 ‘저는 전남 광주 본당 신부였는데요’라고 통 크게 대답하는 이, 그 주인공은 전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안드레아·86)입니다.

 

혈연, 학연, 지연에 연연하는 분이다? 사실입니다. 대주교님께선 “하느님의 자녀라는 혈연, 복음을 배우는 학연, 천국 시민권을 가진 지연으로 엮여있다”라고 하십니다. 모든 신자들과 말이죠.

 

이어진 구술 기록 시간, 시종일관 ‘부럽다’는 생각이 끼어들었습니다. 한 순간의 흐트러짐 없이, 한 치의 의심 없이 하느님을 믿고 따라온 삶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말보다 기도를 먼저 배웠다’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최경환 성인의 신앙을 이어받은 일가. 수 대(代)를 이어오면서도 그 신앙은 더욱 뜨겁게 이어졌고, 대주교님 또한 태중에서부터 신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대주교님께서 태어나 자란 곳은 교우촌이었습니다. 숯과 옹기를 구워 팔고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꾸려가던 삶, 그래도 가난을 힘겹다 느낀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매일 매일이 즐거웠던 덕분입니다. 도리어 교우촌과 학교가 있는 바깥세상, 두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했던 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너희들이 바보야.’ 신자로서의 자긍심 그득한 모습이지요. ‘사주구령’(事主救靈·하느님을 섬기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 ‘위주치명’(爲主致命·하느님을 위하여 순교함)이 소원인 어린아이, 상상이 되시나요?

 

- 태중에서부터 매일 기도하는 삶, 최창무 대주교는 잠시의 산책 중에도 묵주를 놓지 않는다.

 

 

‘감히’, 신부님이 되겠다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한 해 두어 번 판공성사 때나 뵐 수 있는 신부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분’인줄 알았기 때문이라고요. 그런데 수도회에 입회한 큰 누님을 뵈러 간 자리에서 한 수녀님께서 갑자기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물어보셨습니다. 어린 소년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 수녀님께선 ‘안드레아는 신부님이 되고 싶어 한다’고 가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녀석, 신부될 놈이 그러면 되겠냐’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은 자연스럽게 삶의 기준이 됐습니다. ‘사제의 삶을 살아야 하는구나’라고요. 소신학교 때부터 너무나 고단한 길을 견뎌야 했지만 ‘신부가 되기 위해선 당연한 과정인가보다’ 생각했답니다. 그렇게 애써온 시간들에, 옹기그릇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더욱 단단히 익어가는 모습이 겹쳐집니다.

 

대주교님께선 광주대교구장으로서 순명한지 꼭 10년 만에 교구 출신 사제에게 그 자리를 이임하고, 전남 나주 이슬촌에 자리한 노안성당 옆에 새 둥지를 마련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자들과 함께 소박하게 지내며 미사를 봉헌하고 텃밭도 가꾸며 살아가는 사제로 살고 싶다’는 바람을 이룬 시간이라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옛 광주가톨릭대 인근 원로사목자 연수원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감사기도만이 넘치는 일상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그 품안에서 성장하고 사제로 살게 해주신 모든 것에 감사했던 지난 시간. 이제 다시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몫은 예수님을 닮는 것, 그 하나에 더욱 매진하며 살 수 있어 감사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담고 있어 하느님을 닮도록 노력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을 담은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빼버리면 알맹이 없는 모습이 됩니다.”

 

하느님 이야기만 나오면, 대주교님의 얼굴엔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빛과 더할 나위 없이 환한 미소가 더해집니다. 그 신바람 나는 신앙 이야기가 다음 주부터 이어집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7월 3일,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 (2)


‘사주구령’과 ‘위주치명’이 매일 삶의 슬로건

 

 

- 국민(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 여름, 개울가에서 학습한 후 찍은 사진. 가운데 동그라미 속 얼굴이 소년 최창무. 광주대교구 제공.

 

 

신자 여러분들의 영육 간 건강을 빕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서로가 항상 영육간 건강을 기원해주길 바랍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노력만 가지곤 안 되고 은총 안에 있어야만 유지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길 바랍니다. 우리 사회에선 웰빙이란 단어가 좀 편협하게 쓰이는 것 같은데요. 신앙인으로서 ‘훌륭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웰빙(well-being)의 삶 살아가길 바랍니다.

 

‘안드레아’. 제 본래의 이름 ‘본명’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삶은 ‘생성완숙’, 여물어 가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지금도 완숙되어 가는 시간이지요. 기도를 언제부터 했는지 기억하진 못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기도소리를 듣고 함께 기도했으니까요. 태중교우죠.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온 가족이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긴 합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교우촌입니다. 서울 근교(현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칡이 우겨졌다고 해서 ‘칠울’(칡울), 지금은 갈곡리라 불리는 곳에 자리했는데요. 제 외조부이신 박반보(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저희 가정과 다른 두 가정, 총 세 가정이 한뜻으로 황무지와 같은 곳에 세우고 터를 다진 교우촌입니다. 교우촌은 숨어 살되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그 신앙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하며 자랐기 때문에 행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안 신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최경환 성인께 닿으니 7~8대 신앙이 이어져 온 거죠.

 

국민(초등)학교 6학년 때 모습으로 소신학교 입학원서에 첨부한 사진이다. 광주대교구 제공.

 

 

저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요. 태어나자마자 두 세상을 동시에 살았어요. 초등학교가 있던 세상에서는 속명(세속명)으로 불리고 일제 치하에서 일본어를 쓰며 지내야 했고, 교우촌으로 들어오면 안드레아로 그야말로 자유로웠죠. 교우촌 신자들은 숯과 옹기를 구워 팔거나 화전을 일궈 생활했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았지만, 한 번도 가난이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신앙생활만으로도 기쁨이 넘쳤거든요.

 

“우리 아기가 벌써 ‘성부와~’해요!”

 

교우촌에선 말 배우면서 동시에 성호경을 배우는 게 자랑거리인 분위기입니다. 아기들이 ‘엄마’, ‘아빠’하며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부모들은 아기 손을 끌어다가 ‘성부와 성자와 성신(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자연스럽게 반복해주거든요. 그러니까 말 배우면서 기도 배우고 기도 배우면서 말을 하니, 흔히들 ‘태어나면서부터 기도했어’라는 표현이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주구령’(事主救靈·하느님을 섬기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 ‘위주치명’(爲主致命·하느님을 위하여 순교함)이 매일 삶의 슬로건이기도 했고요.

 

일 년에 두 번 판공성사를 위해 신부님께서 교우촌에 오시는 때는 정말 축제예요. 그런데 동시에 긴장되는 비상 기간이기도 합니다. 고해성사 하기 전에 찰고를 받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일종의 연좌제예요. 온 가족이 함께 신부님 앞에 나가서 찰고를 받는데, 예를 들어 아이가 대답을 못 하면 부모는 ‘자녀를 어떻게 가르쳤어’하고 호통을 맞곤 하죠.

 

저는 기억도 안 나는데요, 누님 말씀으론 찰고 때 제가 대답을 아주 잘했다고 해요. 그래서 아직 첫영성체 반에 들어갈 나이가 되지 않았는데도 신부님께서 ‘첫영성체 해도 되겠다’라고 하셔서, 제가 월반을 했어요.

 

제가 참 곤혹스러운 것은요, ‘왜 신부가 됐느냐’, ‘언제부터 신부가 되고 싶었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랍니다. 제 성소는 그냥 이뤄진 것이지, 제가 뭐 대단한 포부를 갖고 희망했던 적은 없었거든요. 더 솔직히는 ‘언감생심’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엔 일 년에 몇 번 겨우 만나 뵙는 신부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국민(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신 큰 누님 면회를 갔습니다. 그때 수녀회 외부 담당 수녀님께서 ‘안드레아,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제 미래에 대한 질문은 그때 처음 받아본 것 같아요. 대답을 바로 못 했는데 그 다음날 또 물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신부 되지 그래’ 하셔서, 싫다고도 하겠다고도 대답을 못 했는데, 수녀님께서 가족들이 함께 있는 면회실에 오셔서 대뜸 ‘안드레아는 이 다음에 신부 된데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전 신부 지망생이 되어 버렸죠. 이후론 아버님께서도 혼내실 때마다 ‘이 녀석아, 신부 될 놈이 그러면 되냐’라고 하셔서, 저도 덩달아 ‘아 나는 신부가 되나 보다’라고 생각한 거 같아요. 제가 지원한 건 아니지만 소신학교에 입학하게 됐고, 일단 입학을 했으면 쫓겨나면 부끄럽잖아요. 그래서 뭐 쫓겨나지 않을 정도론 공부를 열심히 했던 거 같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7월 10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 (3)


혼자 울고 있는 꼬마의 손 잡아준 김수환 대신학생

 

 

- 1957년 서울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거행된 삭발례. 최창무 신학생도 두발 가운데를 비롯해 십자 모양으로 양옆, 앞뒤 등 다섯 군데를 잘라내는 삭발례를 받았다. 광주대교구 제공.

 

 

소신학교(성신대학교 부속 중학교) 시절,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특히나 물과 불이 부족한 삶이었습니다. 학교에 우물은 하나뿐이었고, 당시 사용하던 북한 전기는 오후 8시면 딱 끊어졌거든요. 그래서 학생들은 매일 저녁이면 한강으로 나가서 물을 떠와야했고, 전기가 나가면 잉크병으로 만든 등잔에 석유를 넣고 불을 붙여야 했습니다. 우리 반 학생만 해도 60여 명, 공부를 하기 위해 모두가 등잔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정말 엄청나게 생겼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타 지역 사투리도 들었죠. 라틴어도 배우기 시작했고요. 그 시기, 또 하나 인상 깊게 기억나는 일과는 당시 소신학교 성당에 안치된 김대건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매일 저녁 시성을 위한 기도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입학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소신학교가 용산 언덕 지대에 있던 관계로, 6월 28일 새벽 한강 위에 단 하나 세워진 인도교였던 한강대교가 큰 굉음과 함께 섬광 속에서 솟았다가 가라앉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후퇴하는 국군은 강가에 있던 소형 배나 끊어진 철교를 통해 도강(渡江)을 해야 했습니다. 많은 신학생들도 그 길을 선택해야 했고요.

 

상황의 다급함을 감지하신 교장 신부님께선 창고 문을 열어 식량들을 전교생들에게 분배하고 금고의 잔액도 나눠주시면서, 각자 어떻게 해서든 서울을 빠져나가 수원 북수동성당으로 모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곳에 가면 지도신부님께서 다시 인도해줄 거라 하시면서요. 저도 다행히 한강을 무사히 건너 저녁 때 북수동성당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밤샘을 하고 아침이 됐는데도 학생들을 안내할 신부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들 우왕좌왕 혼란 그 자체였죠. 보다 못한 한 대신학생이 나서서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목포 등 이동 방향별로 학생들을 나눠 조를 지어줬습니다. 각 조마다 상급생 한 명을 인솔자로 지정해 주고요. 이어서 신학생들은 각각 자기 집을 향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저만 혼자 남은 겁니다. 당황한 제가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때 그 대신학생이 다가와 왜 혼자 서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저의 집은 이미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한 파주여서 갈 데가 없다’고 하니, 안타깝게 저를 내려다보다 자신과 같이 가자며 제 손을 꼭 잡아주는 겁니다. 그 손을 잡고 수원병점역까지 갔더니 먼저 도착한 신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손과 발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는 사람들이 매달려 있어 그야말로 사람 덩어리였거든요. 먼저 왔던 친구들을 만나, 덕분에 기차 등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저를 데리고 갔던 대신학생이 신학생들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졸다가는 기차에서 떨어져 죽을 수 있으니, 서로 꼬집어주면서라도 졸지 않고 가야 한다’고요. 저는 무사히 대구 방향으로 가는 신학생들과 함께 대구역에 도착했습니다. 이어 대신학생은 저를 대구 남산동에 있는 대구교구청에 데려다주고, 그곳 신부님께 피난 상황을 설명하곤 훌쩍 떠났습니다. 그땐 이름도 몰랐었는데요. 뒤늦게 그 대신학생의 정체를 알게 됐습니다. 그는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독일 유학을 갔을 때, 당시 김수환 신부도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학위 논문 과정 중에 있단 소식을 듣고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늦게나마 감사드리기 위해서요. ‘그때 북수동성당에서 혼자 울고 있던 꼬마가 바로 저였습니다. 무사히 성장해서 유학까지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그 학생이 바로 자네였나’ 하시며 답장을 보내주셨고, 그 후로도 소식을 몇 번 교환했습니다.

 

대구교구청에서 저는 미사복사를 서고 잔심부름도 하며 편히 지낼 수 있었는데, 한 달쯤 후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며 대구도 위험할 수 있다고 하여 교구청 당가 신부님께서 저를 경주본당으로 보내주셨습니다. 뒤이어 포항 전선이 무너지고 성당이 학도병 부상자 등으로 가득차자, 경주본당 신부님께선 저를 기차에 태워주시며 부산 중앙성당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며칠 지내다가 대구교구 외 다른 교구 신학생들과 함께 초량에 임시가옥을 얻어 살게 되었는데, 선배 신학생들은 미군부대 식당이나 적십자병원선 페인트 일 등의 작업을 하며 생계유지에 힘을 보탰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나서야 고향으로 갈 수 있었는데요. 전쟁이 발발한 지 5개월만이었습니다. 고향에선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너무나 기뻐하셨죠. 그 시간도 잠깐, 중공군 참전으로 1·4후퇴가 시작됐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적군과 국군 사이 전선에서 3개월간 남하하게 되었습니다. 평택까지요. 그러다 충남 성환에 잠깐 머무르는 동안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게 됐고, 남은 식구들은 피난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전쟁 중이었지만 신학생 양성은 중요했기 때문에 대신학교는 부산에서, 소신학교는 밀양에서 임시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휴전이 되고 나서야 신학생들은 서울 신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7월 17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 (4)


신학생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안전하게 살아왔는가

 

 

- 사제서품식은 1963년 6월 9일 독일 프라이부르크 주교좌대성당에서 거행됐다. 사진은 6월 23일 독일 성베드로바오로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최창무 신부(가운데)의 모습. 광주대교구 제공.

 

 

전쟁 후 모두들 참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사제양성은 로마 교황청 후원과 해외 각국 교회 장학금 등의 지원을 받아 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신학교에서 넉넉한 건 사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신학생들도 닭과 돼지 등을 키워 자급자족하려 애쓰고 교우들은 성미운동 등을 해서 학생들의 먹을거리를 보태줬지만 늘 부족했죠. 해외유학은 사제양성에서 중요한 한 과정이기도 했지만, 사실 당장 먹을 입을 줄인다는 면에서도 절실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유학을 가기 위해선 군복무를 하고, 해당 국가 언어와 국사가 포함된 국가고시를 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군대생활이 제 인생에선 처음 하는 사회생활로서 의미가 컸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신학생으로만 살았는데, 모라토리움(일종의 현장 실습) 조차 없던 시기였거든요. 그땐 교구 소속 사제를 ‘재속사제’라고 했는데요, 저는 사회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수도사제’가 돼야 하는 건 아닌지 갈등하기도 했답니다.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갔지만, 내무반 생활수준은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무엇보다 폭력을 일삼고 갖가지 생활고를 겪던 이들이 한데 모인 곳이라 하루하루 생활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제일 ‘쫄병’이 신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괴롭힘을 받기도 했고요. 하지만 바로 그 시간이 제 인생에선 깊은 회심의 기회였다고나 할까요.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하는 시간으로 남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몇몇 선임병들을 보면서 내심 ‘난 그들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어. 저들과는 다른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의 벽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이란 범죄의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이라는 말이 있죠. 척박한 군대생활 중에도 ‘평생 처음으로 하루 세끼 걱정을 하지 않는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신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안전하게 또 혜택을 받으며 살아왔는가’ 돌아보게 됐습니다. 게다가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이웃으로 받아준 사람은 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선 가장 불우하게 살았던 이들이었습니다.

 

군인 최창무는 27사단 79연대에서 480주특기(재봉사) 병사로 근무했다. 광주대교구 제공.

 

 

한번은 나쁜 짓을 일삼는 선임병이 하도 돈을 꿔달라고 조르는 통에 꽁꽁 숨겨둔 비상금을 내준 적이 있었거든요. ‘뺏겼다’라는 심정으로 억지로 내놓았고 돌려받지 못할 거라고 단정했었죠. 그런데 뜻밖에도 빈털터리가 되니까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걸 체험했습니다. 게다가 돈을 빌려 간 이는 제가 갑자기 전역한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돈을 구해 한밤중에 저에게 주는 겁니다. 저의 생각과 달리 약속을 지키려고 끝까지 애쓰는 그 모습을 보고 부끄러웠습니다. 천국과 같은 노아의 방주 안에서만 지낸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군대에서 그런 체험을 하지 못했다면 저는 머리로만 혹은 말로만 하는 사목을 할 수도 있었을 테죠.

 

전역을 하고 출국준비를 하던 시간은 설렘이나 두려움이 아닌 초조함 그 자체였습니다. 5·16 군사정변의 여파로 항만이 봉쇄되고 신원 조회를 거쳐야 출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정해진 기간 내에 유학을 떠나지 못하면 다시 군대로 돌아가야 했고요. 3개월을 넘게 기다려 출국 만료일까지 불과 열흘 남짓 남았을 때 드디어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유학생을 위한 독일어 어학수업을 따로 거칠 틈도 없이, 어학과 교과과정을 동시에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시험은 라틴어로 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했죠. 유학생활이 고단하거나 어렵다는 그런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이 그야말로 정신없이 공부했습니다. 한국에서 늘 아쉽게 생각했던 성서신학과 교회사 등도 신나게 배웠습니다. 성경과 신학 전반에 대한 안목이 넓어지면서 더욱더 신나게 공부했고요.

 

저는 원래 영성신학을 전공하고자 했습니다. 교구 사제로서 영성적 기틀을 더욱 다지고 성숙한 모습을 갖추길 원했거든요. 동시에 세속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성숙을 위한 신학 연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사제로서 평신도들에게 어떻게 영성적으로 더욱 도움을 줄 수 있을까가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럽 여러 교회에서 온 장학금을 분배하는 제비뽑기에서 저는 뒤로 밀렸고 남은 곳이 독일이었기에 독일로 유학을 갔습니다. 아쉽게도 독일 교과 과정은 윤리신학 안에서 영성신학을 다루는 체제였어요. 하지만 조직신학으로서의 윤리신학 원론과 사회윤리, 실천윤리(카리타스)가 통합된 윤리신학 과정을 배우면서 오히려 신학 전반을 통합적으로 관망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7월 24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 (5)


신학생들 향한 애틋한 마음으로 사제양성에 매진

 

 

- 최창무 대주교(왼쪽에서 세 번째)가 1987년 3월 28일 독서직을 받은 신학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광주대교구 제공.

 

 

신학교 교수 시절, 신학생들은 나를 ‘칼창무’라 부르곤 했습니다. 원리원칙을 잘 지킨다는 뜻을 담은 별명인데요. 제가 원리원칙을 좋아하는 이유는 순리에 맞닿기 때문입니다. 내심 그게 편하다는 이유도 큽니다. 교통법칙을 잘 지키면 가장 먼저 자신이 보호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반면 원리원칙을 잘 지킨다는 것은 융통성이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요. 모든 것은 양면성이 있으니까요. ‘외강내유’, 사제로서 살면서 제가 지켜온 대표적인 모습인 듯합니다.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자마자 저는 신학대학 교수로 발령받아, 사제양성 소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사제양성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성장하고 영성을 키우는 과정이었죠.

 

사실 신학생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독일 유학 중에도 컸습니다. 하느님을 깊이 알아가는 학문에 흠뻑 빠져들어 보니, 교재도 부족한 상황에서 공부하는 후배 신학생들이 자꾸 생각났죠. 유럽 곳곳에서 유학 중인 동기 신부들과 처음 모인 자리에서, 우리는 후배들을 위한 신·구약 성경 입문 책자를 함께 번역하자고 합의했습니다. 각자의 학업 분량만도 벅찬 상황이었지만 모두가 기쁘게 분담했고, 분도출판사를 통해 한국어 성경 신학 교재를 발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유학 과정을 다 마치지 못했는데요. 독일 유학 중 사제품을 받았는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후인 1966년 한국으로 불려 들어와 서울 명동성당에서 사목실습을 해야만 했거든요. 공의회 교부들은 사제양성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컸습니다. 이에 따라 사목실습도 권고사항으로 마련됐죠. 동기 중에선 저만 불려 들어왔는데요. 그래도 명동본당 수석보좌로서 정말 신나게 사목했었습니다. 예비자들 중 청년들이 엄청나게 몰려들던 때였습니다. 청년 예비자 교리를 열심히 지원했는데요, 유명 대학 강의실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다른 보좌신부 2명과 믿을교리편, 은총편, 성사편 등으로 과정을 나눠 맡았는데요. 이때 했던 믿을교리 강의 내용은 나중에 「빛을 찾아서」라는 교재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성삼회’라는 청년모임도 있었는데, 저도 청년들과 함께 분야별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던 중 노기남 대주교님께서 퇴임하시고 당시 수원교구장이셨던 윤공희 주교님께서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으셨는데요, 저를 부르시더니 가톨릭대(신학교)로 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는 ‘대학을 중퇴했기에 대학에서 봉사할 자격이 없다’라며 고사했더니, 윤 대주교님께서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서 공부를 마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독일로 다시 가자마자 쓰던 논문 마무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지도 교수님께서도 기쁘게 도와주셨습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는 것은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과정을 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능력을 키우고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죠.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톨릭대 교수 발령을 받자마자 정말 가르치면서도 배우고 또 배우면서 가르치는 일상이 시작됐습니다. 윤리신학은 물론 신학원론 등 신설 과목을 가르쳐야 했고 성서학자가 부족해 성서 입문 강의도 맡았고, 교회사와 히브리어 및 독어 강의도 해야 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학교 안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거든요. 가톨릭대는 6개 교구 신학생들을 아우르는 관구 신학교가 됐습니다. 각자 자기 나라 언어로 전례를 거행하게 되면서 기존에 로마 교황청에서 일괄 발간하던 라틴어 교재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1976년 안식년엔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연구교수로 가서 신학생들을 위한 교재를 만들기 위해 힘썼습니다.

 

1977년엔 관구 신학원장을 맡았죠. 사제양성 지원을 좀 더 탄탄히 하기 위해 영성 협력자들도 초빙했습니다. 예수회 이한택 신부님, 베네딕도회 이덕근 신부님 등을 모셨죠. 이에 앞서서는 학생처장을 시작으로 대학원 교학감, 신학부장 겸 교무처장으로도 활동했고요. 사제양성을 위해서는 신학공부만이 아니라 사목자 양성을 위한 지원은 물론 연구도 필수적인데요, 나중에 가톨릭대 부설 사목연구소 소장도 역임했습니다. 1972년엔 학제 개편으로 가톨릭대와 신학원이 이원화됐고, 저는 제11대 가톨릭대 학장의 소임까지 겸해야 했습니다. 석·박사 과정 개편은 물론 교직 과목도 신설했습니다.

 

당시 가톨릭대에는 신학부와 의학부 2개 단과대학만 있었습니다. 종합대학교가 되려면 3개의 단과대학 이상이 있어야 했는데, 법령이 바뀌면서 이듬해인 1992년 가톨릭대학교로 승격되고 동시에 저는 총장이 됩니다. 1994년엔 성심여대와 통합, 성심·성의·성신 3개의 캠퍼스를 갖춘 통합 가톨릭대학교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래서 왜 교회가 대학과 병원 등을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념 교육 등에도 적극 힘쓰게 됐지요. 대학교육과 사제양성을 통합해서 추진해야 하니 더욱 소임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7월 31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 (6)


말씀 향한 청년들 열정은 기쁨과 활력의 원천

 

 

- 1980년대 초 ‘가톨릭성서모임’ 출신들과 함께한 모습. 광주대교구 제공.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는데요, 그중 하나는 신학과 철학 등을 신자들도 접할 수 있도록 신학교도 개방을 하라는 권고였습니다. 그래서 1972년 봄부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도 신부 지망생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을 위해서 청강제도와 함께 정규과정도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더욱 빨리 확산하고 적용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때는 신자들의 열성도 대단했습니다. 당시 평신도들의 대부라 손꼽히던 현석호·양한모·하승백·김태봉 회장님 등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교회학문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사도직 활동에 힘쓰셨습니다.

 

일반 신자들의 열정도 대단했습니다. 선교 열의가 대단하여 예비신자들을 적극 인도해 본당마다 신자들로 가득했습니다. 평신도사도직협의회를 중심으로 평생교육 차원에서 다양한 강의를 주최했고요. 어떤 때는 천진암/주어사 강학과 같은 모습 또한 보여 제가 감동하기도 했는데요. 신자들이 서울 남대문시장 안에 있는 방 하나를 임대해서 매주 목요일마다 세미나를 여는 겁니다. 저는 신자들의 요청으로 그 세미나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등에 관한 강의를 했고요. 그들의 열성에 신학교 교수 업무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더라고요.

 

이 시대 성경모임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저에게 성경은 ‘말씀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고, 말씀의 힘입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 예수님을 만나는 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따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1970년대 신자들은 성경공부와 나눔에도 정말 열심이었는데요. 저 또한 성서학자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성경모임을 지원하는데 힘껏 나섰습니다. 당시 한국교회에는 성경전서가 없었던 상황인데도 많은 이들이 성경공부에 열성적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성경이 나온 것도 1977년이거든요. 당시 젊은이들은 선종완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모세오경, 그것도 절판된 책을 구해 복사해서 모임 때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1975년경 ‘가톨릭성서모임’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광주대교구 제공.

 

 

저는 1971년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몇몇 보좌신부님들과 함께 다가오는 주일의 복음 묵상 모임을 했습니다. 그러다 대학생들을 위해서도 지원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했었는데요, 그때 교구 대학생 지도는 오태순 신부님과 조마오로 수녀님께서 맡고 계셨고, 서로 의기투합이 됐습니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대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은 금지됐었거든요. 가톨릭 학생회 활동도 제재를 받았죠. 하지만 성경공부는 일반 동아리 모임이 아니었기에 정부도 금지할 수 없었습니다. 유신정권 시절, 젊은이들의 성경모임은 오히려 훈풍을 맞은 존재 같았고, 삶의 힘이 됐습니다. 1972년 7월 한여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임은 ‘가톨릭성서모임’으로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이 모임은 참가자 누구나 성경을 중심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인원을 5~8명으로 제한했습니다. 모임의 중심은 성경이고, 인도자는 성령이며, 말씀의 봉사자는 대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도우미일 뿐이라는 원칙도 강조했고요. 먼저 성경 본문을 읽고 새기고, 이어 그 말씀에 비추어 생활을 성찰하고, 말씀을 생활 깊숙이 적용해 증인이 되어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한 과정을 마무리하는 4박5일간의 연수 때에는 신학교 교수 신부님들이 통합강의를 지원했고, 수료생들은 ‘말씀의 봉사자’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성경모임 참가 대학생들은 과외를 하면 그 돈을 자신만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1/3씩을 떼어 모아 가난한 이들을 돕기도 했는데요. 얼마나 기특합니까. 신학교 교수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제 개인 시간 등을 쪼개고 쪼개 성경모임에 함께한 것, 힘들었다기보다는 기쁨이고 활력의 원천이 됐던 것 같습니다. 가끔 신학생들이 ‘왜 우리들을 두고 다른 대학생들을 돌보러 가시느냐’고 투정의 소문도 듣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요…. 제 소임에는 소홀함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는 큰 은총의 때였습니다. 한국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등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복음정신에 따라 대사회적인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죠. 한국교회의 존재가 더욱 크게 드러났던 계기가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과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선교 200주년 기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또한 103위 순교자 시성이라는 영광의 열매를 선물 받았죠. 특히 교회가 외적 성장과 활동만이 아니라 내실을 기하기 위해 힘쓴 자리가 바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였습니다. ‘받던 교회가 주는 교회로’라는 기치 아래 나눔 운동으로 한국교회는 더욱더 사회 안으로 들어가는 성숙한 교회로 발돋움하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 성체성사의 정신을 살고 나누는 교회로서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까지 열었습니다. 그 결과물로 ‘한마음한몸운동본부’ 탄생을 봤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8월 14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 (7)


세상 속 교회가 할 일에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 1996년 4월 7일 서울 종로구 무악동에서 집 없는 이들과 함께 봉헌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 광주대교구 제공.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며 웃었던 적도 있습니다. “나, 하느님께 너무 당하는 거 아닌가?”신학생 때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시작으로 레지오마리애, 가톨릭성서모임을 비롯해 각종 사도직 단체 활동과 강의 등을 다채롭게 지원해왔습니다. 정식 발령을 받은 것도 아니고 신학교 교수로 살면서 시간을 쪼개고 쪼개야했지만 힘차게 동참했던 활동들이었거든요. 이상하리만치 하느님께서는 저를 갖가지 활동으로 이끌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신나게 살고 있는데 갑자기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교황님께서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지명하셨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당황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신학교에서 살다가 무덤까지 갈 줄 알았습니다. 1976년 호적제도가 바뀔 때 고향집에서 분가하면서 저는 본적도 혜화동 90-2(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로 옮겼고요.

 

제가 주교직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사제인지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일주일의 말미를 얻었죠. 묵상을 하면서 다시 사제로서의 정체성을 돌이켜보았습니다. 주교직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다만 주교는 세계교회의 신부가 되는 것이죠. 또 한 지역 교회의 중심이 됩니다. 정식으로 본당사목구를 맡아 본당신부를 한 적도 없었는데, 감히 세계교회의 사목을 책임지는 주교가 될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죠. 하지만 저는 교구장 주교도 아니고 그 교구에 적을 두고 교구장 승계권을 이어받는 부주교도 아니고, 교구장에 협력하는 보좌주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다소 위안이 되었습니다. 보좌주교에겐 명의교구, 즉 주교좌가 현존하지 않고 이름만 남은 교구가 주어지기에 다른 교구에 가서 협력을 하게 됩니다. 저에게 주어진 건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님을 보필하면서 사목에 협력하고 그 심부름을 하는 일이었기에 감히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서울본당’ 보좌라고나 할까요.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저는 그저 이 한마디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1995년 5월 15일 평양교구 사목방문 중 평양 장충성당 교우들이 최창무 주교 일행을 환영하고 있다. 광주대교구 제공.

 

 

주교가 되고 한 달여 만에 담당 업무를 받았는데 ‘사회사목 주교대리’였습니다. 이러한 직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적용하는 노력의 하나로, 한국교회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실천하고 세상 속에서 발로 뛰는 모습을 더욱 확산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또한 그들과 함께 하는 사목을 맡아 신이 났습니다. 사실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일이 생깁니다. 제가, 교회가 다 해결할 수도 없지요. 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복음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동행하고…. 힘껏 뛰었습니다. 아쉬운 건 이른바 사회 기득권 세력의 벽이 너무 높다는 것…. 어머니들이 우는 아이만 계속 안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처럼 여러 가지 선택과 활동을 함께 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지요.

 

주교가 되고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주례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장소가 교도소였습니다. 견진 대상자들 중에는 연쇄 살인 사건과 연루된 두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시 악명 높은 소위 지존파로 알려진 이들이었습니다.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옮긴 이들이었죠. 하지만 제가 만난 이들은 누구 못지않은 선량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사회교정 역할의 중요성도 다시 느낄 수 있었죠. 이들은 교도소에 들어와 교리를 배우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회심한 그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교도소 생활을 어려워하기는커녕, 태어나 처음으로 의식주를 걱정 없이 해결하고 사람대접도 받았다며 눈물 흘리는 모습에 제 가슴도 먹먹할 지경이었습니다.

 

안양교도소 견진성사 중 견진자에게 도유하고 있는 모습. 1996년경. 광주대교구 제공.

 

 

교직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민족화해학교, 참생명학교, 사회교리학교 등 다양한 학교를 열었습니다. 소위 특수사목이라고 하는 분야를 담당하면서, 신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펼쳐나갈 것들을 평생교육 차원에서 익힐 수 있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바로 기도와 교육, 실천이 한데 어우러져 꾸준히 지속되는 장이지요.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김수환 추기경님을 대신해 한국교회 고위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사목방문했던 일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왜 북한과 대화하느냐고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북진통일이니 적화통일이니 그런 모습이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인데,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해결하면 자연스럽게 다시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가장 먼저 남북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함께 하기로 약속했는데, 매주 화요일 명동대성당에서 봉헌하는 민족화해 미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금수강산이 묘지강산’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 화장(火葬)도 선호하는데 앞장서고,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를 바로 연결하는 도농직거래를 트고, 빈민사목 지원의 하나로 명례방협동조합을 만들고, 도심 재개발지역에서 밀려난 이들이 임시로 살 수 있는 거주지 마련을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하고, 일반병원의 원목실을 적극 마련하고…. 세상 속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정말 많았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8월 21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 (8)


“네,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며 사제로 주교로 살아왔죠

 

 

- 2005년 5월 8일 소록도본당 견진성사 중 최창무 대주교가 견진자들에게 도유하고 있다.

 

 

교회는 여러 지체들이 함께 협력하고 성체의 신비 안에서 하나로 녹아드는 신비체입니다. 저의 몫은 서울대교구 사회사목 주교대리, 이른바 ‘서울본당 보좌’라고 할까요. 내적으로는 신자들의 평생교육 차원에서 민족화해학교, 사회교리학교 등을 설립해 다양하게 현장사목을 지원하고 외적으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대변하고 함께 뛰는 데에 여념이 없는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습니다. 꼭 5년간이었습니다.

 

갑자기 광주대교구 부주교 임명을 받았습니다. 정든 친정을 떠나 시집가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죠. 부주교는 교구장 승계권을 가진 주교이기에 부담도 컸습니다. 하지만 저의 일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을 위해, 한 가족이고 한 지체인 교회 안에서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순명하며 자리를 옮겼습니다. 광주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소록도를 먼저 방문했고 이어 1년여간 91개 본당을 다 돌아봤지요. 미리 알리면 본당 측에서 뭔가 준비를 해야 하니까, 시간이 될 때마다 그냥 예고 없이 찾아보곤 했습니다.

 

2000년 대희년 광주대교구장 착좌 전부터 광주대교구가 어떤 모습이 되길 바라고 이끌 것인지 등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교회’가 어떻게 되길 구상한다? 저의 소명은 어떻게 이끌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 입니다.

 

착좌 인사말 중에 저는 ‘나는 신학교 교수를 오래 했으니 제 장점은 공의회 정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잘 따를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광주대교구는 사제 수가 좀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사제 양성에 더욱 관심을 갖자고도 권고했고요. 일선 본당 신부님들께서 각각 본당 사목에 집중하고 계시니, 교구 차원에선 사회사목 분야에 더욱 힘을 기울이자는 뜻 또한 피력했습니다.

 

2001년 세계 주교시노드 제10차 정기총회에 참석한 최창무 대주교가 프랑스 생드니교구장 오영진 주교(Olivier de Berranger)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실제 교구장 착좌 후 3년간 교구 전체가 내적 쇄신과 교회에 관한 더욱 깊은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전례현장과 교회헌장, 사목헌장을 차례대로 공부했고요. 교구민들이 성경 필사에 맛들이고 각 본당마다 성경통독 프로그램을 실시하도록 도왔습니다. 청년성서모임도 도입했습니다.

 

사회사목에 집중하는 노력으로는 사회복지재단을 만들어 사회적 변화에 발맞춰 관련 기관들을 보다 능률적으로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대학병원들과 사회 일반병원의 원목 활동을 적극 지원하며 병원사목의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안의 하나로 협력 사목, 예를 들어 지구별 협동사목 체계를 갖추고 다져주고 싶었는데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본당 및 지역 간 유대를 강화하는데 협력 사목은 큰 도움이 될 수 있거든요.

 

교구장 재임 시절을 돌아보면, 특별히 기뻤던 한 가지는 바로 공소사목 활성화였습니다. 광주대교구 내 공소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온 교우촌이 공소로 자리 잡은 형태가 아니라, 선교사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착좌 당시 공소가 110여 개 있었거든요. 신부들이 이 공소를 순회하며 사목할 수 있도록, 각 공소들이 독립적인 신앙공동체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뜻에서 지원한 것이지요.

 

- 2004년 5월 31일 우수영본당 예락공소 100주년 감사미사를 주례한 최창무 대주교가 강론을 하고 있다.

 

 

광주대교구장 재임 중에 5·18 민주화운동 25주년도 맞이했습니다.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 교회로서는 파스카의 신비로 성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한 기념행사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이들이 그 잘못을 인식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도록 교회가 다리가 돼야 했죠. 더불어 25주년 기념미사 때에는 군악대와 신학생들이 함께 합창하고, 모든 참례자 등에게 주먹밥도 나눠주며 민주화운동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가져 뜻깊었습니다.

 

또한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릇된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고 화해하는 계기를 갖는 노력의 하나로 저는 기념미사를 제정하고 광주 남동성당을 5·18기념성당으로 지정했습니다. 이 기념미사는 지금도 해마다 봉헌되고 있습니다.

 

아쉬웠던 일의 한 가지는 여러 복합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교회가 해야 하는 의료봉사의 한 구심점이었던 목포가톨릭병원을 폐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터에는 현재 가톨릭목포성지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 준대성전 등이 서 있습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사제로, 주교로 살아온 저의 모든 시간은 근본적으로 부르심에 ‘네’하고 응답하는 삶이었습니다. 저의 몫은 교회 일을 맡아서 하는 것, 주어지는 것에 응답하는 그것 하나였습니다. 사실 늘 버거울 뿐이었지만 또한 항상 하느님의 은총이 넘쳤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주교나 사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 모두를 부르시고 각자의 사명을 부여해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8월 28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 (9 · 끝)


“제 온 삶이 ‘말씀’으로 채워져 있음을 새삼 절감했죠”

 

 

- 제8대 광주대교구장직을 이임하는 최창무 대주교가 이임미사 강론을 하고 있다. 2010년 4월 14일 광주 임동주교좌성당. 최 대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교구장직을 떠나도 교구의 구원사업에 기도와 삶으로 동참하며 주교로서 여러분을 떠나지는 않겠다”고 전했다. 광주대교구 제공.

 

 

소금은 풀어져 맛을 내 주고 할 바를 다 하게 됩니다. 나침반은 언제 어디에 두어도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해바라기처럼(네메세기 신부) 주님께서 계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60여 년 사제로서 한 길을 걸어온 저는 사실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 아닐까요? 하느님 사랑 안에서 시키시는 대로만 하는 것이 가장 좋고 편해서 그것만 했거든요. 갖가지 소임을 주신 것은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 그때그때 가르치며 쓰시느라 기회를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교로서 부르심을 받았을 때도 나는 교회의 ‘쓰레기통’이 기꺼이 되고, 그 안에서 열심히 분리수거하며 교회가 빛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을 닮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내는 소리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담아야 합니다. 말씀이 담기지 않은 소리는 헛소리가 됩니다. 그렇게 소리의 힘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이 교회 안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평소 많은 분들이 제 모든 말은 ‘말씀’에서 시작해 ‘말씀’으로 끝난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인터뷰는 저에게도 지난 삶을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이 됐는데요. 새삼 더욱 절감되는 것이 있더군요. 제 온 삶이 ‘말씀’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지난 모든 삶은 크게는 이 말씀의 뜻이 더욱 확장되는 시간이었다 생각합니다.

 

제가 이 세상에 나기 전부터 저에게는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평생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성소라고 하지요.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방법은 가장 먼저 부모님께 배웠습니다. ‘사주구령’(事主救靈·하느님을 섬기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 ‘위주치명’(爲主致命·하느님을 위하여 죽기에 이름). 오로지 그 말씀을 새기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 학문적, 인간적, 수덕적 삶을 배우면서 사주구령·위주치명을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은 사제가 되는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사제가 되자 진정 저의 삶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는 말씀이 이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어 점점 더 깊이 ‘영광일랑 오직 당신 이름에 돌려주소서’라는 말씀과 같이 기도하게 됐습니다.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에게는 마시옵소서, 영광일랑 당신의 사랑과 진실로 말미암은, 영광일랑 오직 당신 이름에 돌려주소서.”(시편 113,1 최민순 신부 역/ 115,1) ‘Non nobis Domine, non nobis.’ 매주일 저녁기도 때 바치는 이 기도, 저희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뜻의 이 구절이 더욱 깊이 새겨졌습니다. 사제직은 누군가에게 군림하라고 불리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하라 불리운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주님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단 한 순간도 이 길을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갈등한 적은 있어도 단 한 순간도 잘못 든 길이라 생각한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창무 대주교가 2007년 5월 27일 광주 평생교육원 운동장에서 열린 광주대교구 설정 70주년 경축제에서 청소년들에게 환영의 인사를 하고 있다.

 

 

저는 사제서품 성구도 ‘저를 차지하사 온전히 당신 것으로 삼으소서’로 정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것이고 주님 또한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교로서 사목표어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로 선택했습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사람을 통해 우리의 역사 안에서 계속 함께하신다는 것(임마누엘)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광주대교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광주는 빛고을이라 하니 참빛이 교회를 통해 비치길 소망하며 ‘말씀은 생명의 빛’이라는 사목표어를 새겼습니다. 말씀에서 생명이 주어졌고 또 그 말씀은 생명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여러분, 부르심이 자신의 것이 되려면 응답해야 합니다. 밭에 묻힌 보화를 갖기 위해 온 재산을 털어 그 밭을 사듯이(마태 13,44 참조) 내 모든 것을 내놓고 응답해야 합니다. 저 또한 자격은 없지만 부르심이 있기에 자격을 얻었으니, 천만 번이라도 빌고 노력합니다. 세상 끝날 주님께서 저에게 ‘날 닮았다’(성가 ‘임쓰신 가시관’·하한주 신부 詩) 하시며 저를 안아주시길요.

 

여러분, 누구든 그 안에 보화를 품고 태어납니다. 왜냐고요?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으니까요, 하느님을 닮은 얼이 담겨 있으니까요. 특히 세례를 받으면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온 생을 다 해서 그 보화를 찾고 실천하는 것은 사제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소명, 부르심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2티모 4,7)라는 말씀이 이뤄질 수 있도록 남은 시간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앞으로 활동을 접더라도 ‘여러분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9월 4일, 정리 주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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