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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편찬사업 구술채록3: 북한교회 재건을 위한 밀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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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편찬사업 구술채록 · 3] 북한교회 재건을 위한 밀알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간행에 앞서, 민족화해위원회(이하 민화위) 역대 위원장 및 위원 등을 모시고 민화위 설립 배경부터 방북 및 대북지원 과정, 앞으로 나아갈 발전 방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물인 이 구술채록문은 민화위 30년사에 수록될 예정이며, 그 일부를 여기 소개하고자 합니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 구술자 : 장긍선(예로니모) 신부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 • 면담자 : 이민석(대건 안드레아)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 일 시 : 2024년 6월 12일 (수) 오전 10시 • 장 소 : 명동대성당 범우관
이민석 : 신부님께서는 1997년부터 만 4년간 당시 한국인 사제로는 유일하게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정교회 신학교에서 이콘을 전공하시고, 러시아에서 귀국 후 연천본당 주임을 거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본부장 겸 성 미술연구를 전담하셨습니다. 민족화해위원회에 언제부터 어떠한 계기로 참여하셨는지요?
장긍선 신부 : 제가 신학교를 들어가고 사제가 된 목적은 북한교회의 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실향민 2세이고 제 부모님이 신의주본당 출신으로 평양 교구민이었고, 또 제 작은 할아버지가 장선흥(張善興, 라우렌시오, 1914~1958) 신부님이고, 삼촌이 장대익(張大翼, 루도비코, 1923~2008) 신부님입니다. 이런 집안 배경으로 어릴 때부터 북한에 대해서 많이 듣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97년 유학 가기 전에 원래는 북한선교위원회 총무로 내정이 됐었습니다. 제가 이미 신학생 때부터 북선위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이동호(李東鎬, 플라치도, 1935~2006) 아빠스님께서 우리 김수환 추기경님께 부탁하셔서, 제가 여태까지 다 예순이 넘으신 어르신들이 하던 북선위 총무를 처음으로 30대 젊은이로서 맡을 뻔했죠. 그런데 마침 제 유학이 논의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김수환 추기경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아직 나이가 젊으니까 조금 더 경험하고 와서 그다음에 맡겨주시면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해서 북선위 총무직을 일단 미뤘습니다. 대신 유학 장소를 결정할 때도 동방 전례와 성화를 공부하는데 그리스(Greece)도 있었지만, 제가 러시아를 고집한 이유는 공산화됐다가 민주화된 러시아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북한의 미래이기도 하고, 또 북한의 과거 모습도 볼 수 있어서 러시아를 갔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연천본당 주임 3년을 하고, 그다음에 서울교구 민화위에 부임하게 된 겁니다.
이민석 : 신부님께서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본부장으로서 많은 대북지원 사업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면 신부님께서 생각하시는 민화위의 인도적 대북지원 사업의 과정은 어떠했고,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장긍선 신부 : 저는 대북지원 사업에서 크게 세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활동했습니다. 첫 번째, 앞에 보이는 이벤트성이 아니라 북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물품 전달이 되어야 하겠다. 두 번째, 지금 남아 있을지 모르는 우리 신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세 번째, 제 전임 정광웅(鄭光雄, 요셉) 신부님을 비롯한 민화위 역대 신부님들의 활동을 계승하겠다. 이것이 제 목표였고 제 활동의 초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대북지원을 한다고 하면 지금까지도 계속 논란이 되는 게 북한 퍼주기, 그리고 몇몇 북한 지배층 그네들 배를 불리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되도록 이 세 가지에 따라서 활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민석 : 말씀하신 것처럼, 북한 퍼주기, 북한 지배층 배 불리기 등 논란이 있는 상황에서 신부님께서는 인도적 대북지원 물품이 북한 인민들에게 잘 전달됐는지 확인을 하셨을까요?
장긍선 신부 : 당시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로 남북관계가 굉장히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현장에 가서 ‘대북지원 물품 모니터링을 하지 않으면 이후 지원은 없다’는 문제로 북한과 한참 실랑이를 했었습니다. 실제로 금강산에 회담하러 갔다가, 그네들도 북한 당국에서 요청하는 요구사항들을 관철해야 하므로 우리한테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칙에 맞지 않고 누가 봐도 평양과 일부만을 위한 물품 요청이었기 때문에 회담을 엎기도 하고, 회담을 미룬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광웅 신부님을 비롯한 전임 신부님들의 노력으로 정말 어렵게 북한이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외딴 오지까지 우리 천주교는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지역들은 또 과거 우리 신자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황해도 신천과 평안남도 진남포 두 군데입니다. 한국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남한으로 내려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교우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고, 진남포는 바로 평양 인근이라 오지(奧地)는 아니지만, 신천 같은 경우는 황해도의 오지 중의 오지라서 거기에 가면 정말 북한의 속살을 볼 수밖에 없는, 그네들도 거기는 제발 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화위가 신천을 ‘뚫었다’는 것에 대해서, 통일부로부터 ‘서울 민화위는 어느 단체도 못 했던 거를 했다’고 칭찬을 받았고, 북한의 요구사항에 따라서 우리가 품목을 밀가루에서 콩기름 등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계속 현장을 가서 모니터링을 했습니다. (하략)
제가 어릴 때 저희 누나나 어른들이 장난으로 ‘거지발싸개 같은 놈’이라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저는 거지의 발싸개라는 걸 보지 못한 세대입니다. 그런데 북한에 가서 발싸개를 봤어요. 양말이 귀하다 보니까 천으로 발을 감싸고 다녔는데 자꾸 풀어지니까 길가에 앉아서 그걸 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실질적인 도움은 이런 거부터 도와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소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침 중국에 양말 공장을 하는 천주교 신자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취지를 설명했더니 몇십 만 켤레라는 엄청난 양의 재고품과 또 새 제품을 선뜻 기증을 해주셔서, 중국에서 바로 함경도 오지로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북한은 도로 사정이 열악하여 그곳에서 평양으로 다시 가지고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정말 필요한 곳에 지원했습니다.
이민석 : 신부님 말씀을 곰곰이 듣고 생각해 보니, 민화위의 인도적 대북지원 사업은 인민의 생활까지 뿌리 깊게 들어갈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긍선 신부 : 저는 전임 신부님들이 하셨던 그 길을 계속 답습을 하면서 더 발전시키려고 했었고. 그다음에 제가 노력한 부분은 숨어있는 신자들을 찾아내는 것, 신자들이 정말 존재하는가, 그리고 교회가 정말 존재하는가, 그다음에 이런 것들을 찾아보는 것도 저의 목표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도 다른 거는 몰라도 가장 보람 있다고 느껴진 건 뭐냐면 이북출신 어르신과 신부님, 수녀님, 가시겠다는 분들을 몇 차례에 나누어서 북한에 모시고 갔던 것입니다. (중략) 왜냐하면, 제가 제 부모님이 늘 고향을 그리워하시다가 고향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한 분이라도 그 고향 땅을 밟아드리게 하고자 한 그 목적이 저는 지금도 가장 뿌듯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전재선이라고 하는 평양 출신 할머니가 계십니다. 이분은 이미 전쟁 전에도 평양 일대에 엄청난 재산을 갖고 계셨던 분인데, 1·4후퇴 때 트럭에다가 집안의 살림과 하인들까지 다 싣고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파주에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지을 때, 그 모자이크 제작비 1억을 혼자서 지불을 하셨습니다. 조건으로 평양 땅 한 번만 밟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남북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모시고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시고 갈 때 허리가 ㄱ자로 꺾어진 상태에서 건강도 아주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따님이 부축하고 모시고 갔는데, 평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두 번째 날 아침 식사를 하는데 다들 내려왔는데 그 모녀만 안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또 뭔 일이 났는지 굉장히 걱정했는데, 딸이 소리를 치면서 식당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러더니 허리가 ㄱ자로 꺾어졌던 할머니가 지팡이를 내던지고 꿋꿋하게 서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기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바로 마음의 치유, 60여 년, 70여 년 가까이 못 갔던 고향 땅을 밟아봤다는 것이 그 할머니를 그렇게 힘내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게 저는 지금 생각해도 뿌듯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북한에 가서 신자 확인을 했던 사건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전에 중국을 통해서나 여러 경로로 들은 바가 있었지만, 제가 좀 더 확실하게 확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그 금강산에 회담하러 들어갔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북한 쪽에서 너무 얼토당토않은 것을 요구해서 회담을 엎었습니다. 회담이 하루 만에 끝나니까 시간이 비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먼저 남한으로 돌아올 수가 없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우리 한번 관광해보자’ 그래서 등산팀에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아직 눈이 아직도 쌓여 있는, 4월이었나, 3월이었나, 아직 눈도 있는 상태인데 우리 두 사람은 회담하러 갔기 때문에 양복에다가 구두 차림이었고, 얼마 못 가서 미끄러워서 우리 둘은 처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관광 안내하는 북한 사람들이 여러 명이 따라붙는데, 두 사람을 떼어서 우리를 따로 커버를 시켰습니다. 이 상황은 미리 준비되거나 예약된 게 아닌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커버하는 북한 청년하고 산속에 정말 둘만 남게 됐습니다. 이때 제가 로만 칼라까지 다 한 상태였는데, 이 젊은 친구가 누가 보나 살피더니 저보고 하는 얘기가, ‘뭐 하시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부입니다’ 그랬더니 화들짝 놀라더군요. 그러더니 갑자기 하는 얘기가, 다시 또 주변을 살펴보더니, ‘제 이모 할머니가 천주교 신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통해서 장충성당의 신자들에 대해서 아주 적나라하게 들었습니다. 이 청년은 어릴 때 조실부모를 해서 이 이모 할머니 손에 컸답니다. 이 친구 통해서 들은 얘기가, ‘장충성당을 이모 할머니가 나가고 있다’, 근데 ‘장충성당은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라는 얘기를 명확하게 했습니다. 첫 번째, 항상 150명을 채워놓는데 대부분은 그 행사를 위해서 동원된 아무 의미 없는 사람들. 그다음에 두 번째, 이게 핵심그룹인데, 정말 전쟁 이전에 신자였던 사람들. 그런데 열혈 공산당원이 된 신자들. 장재언 씨 같은 분들. 그다음에 세 번째, 이 할머니 같은 경우. 천주교 신자라는 게 노출이 돼서, 이런 행사 때마다 강제 동원되는 부류라고 했습니다.
이민석 : 천주교회 안에서 인도적 대북 지원 사업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장긍선 신부 : 우리가 대북지원을 한다, 그러면 우선 ‘배고픈 사람,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라고 하는 1차원적인 생각에만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 간과한 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주고만 끝날 건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면에 더 큰 목적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북한교회 재건입니다. 교회 재건을 우리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대북지원만 한다면, 반쪽짜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제 전임 정광웅 신부님을 비롯한 신부님들이 왜 그토록 신자들의 옛날 근거지를 찾아다녔는지, 그리고 그분들이 뭐라고 말씀을 하셨냐면은, “훗날의 누구라도 ‘우리가 그렇게 어려웠을 때 남측 교회가 우리를 도와줬다’라는 것을 그들이 기억하게 하자. 남측 사람이 도와줬다가 아니라 남측 교회가 도와줬다.”라고 생각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지원 물품 포장지에 십자가 넣고 민족화해 마크 넣고, ‘걔네들이 질색팔색을 하는데’ 일부러 더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북한에 대한 기억과 애정을 가진 1세대 어른들이 지금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더 우리보다 평균수명이 짧습니다. 그러므로 북한에서 전쟁 이전의 신앙을 기억했던 사람은, 이젠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이렇다면 남한 천주교회가 어떻게 방향을 세워야 하겠는가. 거기에 답이 나옵니다. 분명히 북한교회는 우리가 언젠가 재건을 해야 하고, 그리고 하느님을 다시 북한 전역에서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 교회가 해야 할 목적이고, 우리 서울 민화위나 우리 모든 민화위의 존재 목적도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창무 대주교님께서 서울 민화위 설립을 하실 때도 우리가 결코 북한 지원만 하는 거로 시작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가 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큰 걸림돌이 무관심입니다. 북한 얘기하면은 지금도 어르신들뿐 아니라, 젊은이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 그게 왜,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런데, 상관있습니다. 왜? 우리 반쪽이고. 북한은 분명히 우리의 한 형제자매이고, 우리는 분당 상황이기 때문에 완전한 해방을 맞았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온전한 하나 됨을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것을 염두에 둬야 하겠다는 점을 꼭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북관계가 힘들어도 우리가 북한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고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다못해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북한 선교 인력 양성이라든지, 선교기금 모금이라든지, 아니면 북한에 대한 어떤 여러 가지 인식 개선, 연구, 강의, 얼마든지 많다고 보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안 해서 그렇지.
이민석 : 신부님 말씀하신 북한교회 재건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는 서울 민화위가 앞으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장긍선 신부 : 나중에 천주교에 대한 기억도 없는 북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천주교를 어떻게 다시 인식을 시키고, 또 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그런 사회 속에서 우리 천주교가 자리매김 할 건가. 우리 민화위는, 지금 특히 대북지원이 지금 다 막히고 그다음에 이렇게 활동을 거의 못 하게 된 시점이지만, 오히려 이런 거를 계기로 해서 우리 내실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로드맵을 만들자. 왜냐하면 개신교는 이미 30년 전에 로드맵이 완성돼 있어요. 거기는 교단이 많기 때문에, 북한이 무너지고 나면 정말 혼란 그 자체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큰 교단들 중심으로 해서, 연합으로 로드맵을 만들어서 두 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무너진 제단을 다시 세운다』, 『북한 교회 재건 백서』, 이 두 가지 책을 이미 만들어서 교단 별로 지역을 할당했고, 그래서 또 교단별로는 자기가 맡은 지역의 선교 인력, 선교 자금 준비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거에 대한, 끊임없이 학술적 연구도 하고 있고요. 그래서 제가 개신교 목사님들과 북한 관련 개신교 목사님들과 얘기 나눠보면 부럽기 짝이 없었어요.”
우리는 이 로드맵이 주교회의 민화위에서도 여러 번 거명이 됐었고, 또 서울 민화위에서도 여러 번 거론이 됐었지만, 결실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조금씩이라도 로드맵을 준비한다면 바로 그날이,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도둑은 밤에, 도둑처럼 그날이 올 수도 있다’라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늘 깨어서 준비하고 기다려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저는 마지막으로 우리 공산당한테 학살 당하신 우리 6대 평양 교구장이신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1906~1950?) 주교님의 말씀을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외쳤으면 좋겠습니다. ‘일어나, 가자!(Surgite Eamus)’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피땀 흘리면서 기도를 하셨는데도 제자들은 세상모 르고 자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 예수님 수난의 때가 돼서야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한시도 나와 함께 깨어있지 못하느냐?’라고 하시면서 ‘일어나 가자. 자, 때가 왔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때가 오히려 지금 우리의 출발점이고 새로운 때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 모두도 이제는 우리의 무관심과 또 이런 데서, 이제는 일어나서 모두가 애정을 갖고 바라보고 이런 걸 준비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민석 : 오늘 신부님과 인터뷰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의 감동스러운 말씀도 전해 주셨는데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것으로 장긍선 신부님의 구술채록을 마치겠습니다.
장긍선 신부 : 감사합니다.
[교회와 역사, 2024년 11월호, 구술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서울대교구) 정리 이민석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0 77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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