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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0) 가톨릭 농민운동의 단초 오원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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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2-16 ㅣ No.1931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0) 가톨릭 농민운동의 단초 ‘오원춘 사건’


권리 외친 가톨릭 농민 납치해 폭행… 도 넘은 정권에 거센 비판

 

 

교회 인권운동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여기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이 한국가톨릭농민회였습니다. 군사 정권의 말기적 증세는 1979년에 접어들어 극에 달했습니다. 안동교구 신자이자 가톨릭농민회 간부였던 오원춘이 5월 5~21일 사이 정부 기관원에 의해 납치·폭행을 당한 뒤, 15일 만에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오 씨는 6월 13일 이를 영양본당 주임신부에게 보고했고, 7월 5일 ‘양심선언’을 발표해 자신이 겪은 납치·폭행은 사실이며, 이후 양심이 허락하는 한 이를 번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가톨릭시보는 8월 19일자에 처음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연합회 이사 겸 영양군 청기면 분회장 오원춘(알폰소·31) 씨가 모 기관원에게 피납됐다는 안동교구 사제단과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의 주장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선 경북도경은 10일, 이 납치설은 허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히고, 이 같은 허위 사실을 유포한 오원춘 씨와 이 사건에 관한 유인물을 만들면서 국가 안녕질서를 문란케 할 내용을 삽입한 안동교구 사목국장 정호경 신부, 유인물을 배포한 정재돈(비오·25) 씨 등 3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검찰에 송치했다.”

 

- 가톨릭시보 1979년 8월 19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상반된 주장

 

 

가톨릭시보의 보도는 두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하나는 경찰 발표문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교구 사제단과 가톨릭농민회의 주장이었습니다.

 

사건을 담당한 경상북도 경찰국은 오 씨가 “지난 5월 5일부터 21일까지 포항·울릉도 등지를 개인적으로 여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모 기관원에게 납치돼 폭행·감금 또는 감시를 받았다고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정 신부에 대해서는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의 명에 의해 오 씨 납치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유인물을 작성하면서, 정부가 농민 부흥을 짓밟고 농민을 천시하며 정당한 농민운동을 탄압해 민주주의를 말살하려 한다는 등 왜곡된 설명문을 날조·전파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안동교구 사제단의 주장은 완전히 상반됐습니다. 즉, 이 사건은 “1978년 ‘청기 감자 피해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책임 있는 농정을 촉구하며 농민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던 오 씨에 대한 보복·납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제단은 오 씨가 ‘하느님께 받은 양심에 의해’ 진술한 「양심선언」을 강조하며, “신앙인의 양심으로 이 납치설의 진실을 서약했음”을 확인했습니다.

 

경찰의 발표문은 오 씨가 개인적 일탈로 인한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허위 납치극을 주장했다는 것이었고, 안동교구 사제단은 이를 정부의 농민운동 탄압으로 보았습니다. 후자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가톨릭농민회의 활동과 정부의 농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농민회의 태동과 함평 고구마 사건

 

가톨릭농민회는 1964년 가톨릭노동청년회 산하 농촌부로 시작, 1966년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로 발전했습니다. 이후 농민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1971년 ‘한국가톨릭농민회’로 개칭하고, “농민의 경제적 정의 실현, 농민의 사회적 지위 향상, 전체 농민의 단결과 공동활동을 위한 조직 강화 및 확대, 궁극적으로는 농민 문화의 재창조와 공동체적 삶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으며, 1976년에는 6개 도에 연합회를 결성했습니다. 주교회의는 1975년 춘계총회에서 각 교구가 농민회 육성을 지원하기로 했고, 1976년 춘계총회에서 이를 교회 공식 단체로 인준했습니다.

 

이후 가톨릭농민회가 전국적 관심을 모은 것이 ‘함평 고구마 사건’이었습니다. 함평에서는 매년 약 2만 톤의 고구마가 생산됐는데, 1976년에는 약 2만 5000톤이 생산되었습니다. 전량 수매를 약속한 농협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가톨릭농민회 전남지구 연합회가 피해 보상을 위한 기도회를 잇달아 개최했고, 경찰과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전국으로 확대된 이 문제와 관련해, 가톨릭농민회 전국지도신부단은 성명을 발표해 농민의 생존권과 인권을 위협하는 정부의 농정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나아가 농민들의 조직화와 의식화를 위한 ‘농민사목연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오원춘은 1978년 청기에서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연합회 산하 분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선출됐고, 교구 연합회 이사로도 선임됐습니다. 그는 그해 봄 군 당국이 농민에게 배부한 감자 씨앗에 싹이 트지 않은 문제와 관련해 피해 보상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이 확대되고, 오 씨가 강연을 통해 성공사례를 발표하기 시작하자 당국은 이를 통제할 필요를 느끼게 됐습니다.

 

- 국가 농정의 실패와 권위주의적 탄압,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연대가 충돌한 오원춘 사건은 이후 한국 농민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기반이 됐다. 2010년 12월 가톨릭농민회 등이 서울역 광장에서 전국 농민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기반

 

오원춘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오 씨의 양심선언과 이후 진술 번복은 ‘허위사실 유포’와 ‘진실 은폐’라는 두 주장 사이에서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이 진실 공방을 입증할 객관적이고 명백한 증거는 지금까지도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적 평가에 따르면, 이 사건은 농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농정의 실패와 권위주의적 탄압,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연대가 충돌하면서 이후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동시에 오 씨의 ‘진술 번복’은 당시 국가 폭력의 강압적이고 공포스러운 구조에 따른 것으로 평가됩니다.

 

1979년 10월 15일 오원춘에게는 징역 2년이 선고되었고, 정호경 신부와 정재돈 씨는 각각 분리 심리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11일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살 사건이 발생했으며, 오원춘은 그해 12월 8일 형집행정지로 정호경 신부·정재돈 씨와 함께 석방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가톨릭시보의 의아한 보도

 

한편, 여기에서 가톨릭시보의 오원춘 사건 보도에서는 몇 가지 의문점이 드러납니다.

 

첫째, 가톨릭시보의 첫 보도(1979년 8월 19일자)는 안동교구 사제단과 농민회의 주장을 말미에 병렬하고 있지만, 기사의 제목과 리드 등 핵심 구조는 경찰 발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아쉬운 대목입니다.

 

둘째, 전국 사목국장 회의, 안동교구, 주교회의 상임위가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오원춘 사건을 정부의 농민운동 탄압으로 평가했음에도, 가톨릭시보는 지속적으로 판단과 평가를 유보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1979년 8월 26일자와 9월 2일자 사설에서 상반된 두 주장 모두를 나열하고, 주교회의 차원의 조사를 촉구하면서 결론을 보류했습니다.

 

셋째, 가톨릭시보는 8월 29일부터 수일간 두 명의 기자를 파견해 현지 조사를 했고, 내부 문건에서 이 사건의 본질을 오원춘 개인의 일탈로 규정했습니다. 보고서의 결론은 기사화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이 조사는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입장을 뒷받침할 근거 탐색 및 보다 정확한 보도를 위한 자료 수집”을 목표로 했으나, 보고서가 그 목적을 충족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12월 14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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