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6일 (금)
(홍)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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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1) 박정희 대통령 피살과 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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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10:13 ㅣ No.1932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1) 박정희 대통령 피살과 ‘서울의 봄’


봄을 바랐지만 다시 겨울로…신군부 독재 야욕에 멀어진 민주의 길

 

 

- 고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미사가 1979년 11월 2일 오후 6시 서울 명동주교좌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한국 주교단 12명의 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독재자의 죽음과 유신체제의 종말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따라 한국천주교 주교단은 11월 2일 오후 6시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미사를 엄수키로 결정했다. 지난 10월 26일 오후 7시50분경 서거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덕을 추모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이날 추모미사는 서울대교구 주관하에 한국천주교 주교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된다.”(가톨릭시보 1979년 11월 4일자 1면)

 

1970년대 한국교회는 사회정의와 인권 수호를 위해 독재 정권과 대립하며 예언자적 소명을 실천했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체포되는 등 희생이 뒤따랐고, 긴급조치로 정국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10월 26일, 영원할 것 같던 독재 권력은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교회의 추모와 애도

 

유신독재의 핵심 저항 세력이었던 교회는 비보를 접하자 비판을 멈추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교회는 10월 27일 비상계엄 선포 속에서 모든 행사를 취소하고 전국 성당에서 추모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당시 주교회의 의장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는 난국을 헤쳐 나갈 지혜를 청하는 기도를 당부했습니다. 로마에서 급거 귀국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또한 “여야와 정견을 떠나 증오심을 버리고 일치단결하여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자”며 국민의 단합과 평화를 호소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이날 모든 신자가 국가와 국민의 단결을 위해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여야당을 막론하고 그리고 모든 정견을 떠나서 서로 간의 증오심을 버리고 일치단결하여 중대한 국가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이어 ‘오늘의 사태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라고 강조하고 ‘모든 신자는 단합과 사랑과 신뢰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호소했다.”(가톨릭시보 1979년 11월 4일자 1면)

 

- 1979년 11월 4일자 가톨릭시보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민주 헌정 질서의 회복을 위한 건의

 

박 대통령의 죽음은 유신체제의 붕괴와 '서울의 봄'을 불러왔습니다. 비상계엄하에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과도적 조치였습니다. 국민은 유신헌법의 종식과 민주적 질서의 회복을 기대했고, 억눌려 있던 사회 전반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언론 통제가 완화되고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에서 공개 토론과 집회가 가능해지면서 한국 사회는 잠시 정치적 해빙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흔히 ‘서울의 봄’이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 역시 신중하게 민주 헌정 질서의 회복을 위한 기대와 제안을 피력했습니다. 김 추기경, 그리고 주교회의 윤공희 대주교와 부의장 김남수(안젤로) 주교가 11월 24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만나 구속 인사들의 석방을 건의했습니다. 이에 앞서 정의평화위원회도 공적 서한 형식의 건의서를 발송, 민주화 일정의 투명한 공개를 요구했습니다.

 

최 대통령은 12월 7일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함으로써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 등 복역 중이던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모두 석방됐습니다.

 

 

12.12 군사 반란과 신군부의 부상

 

하지만 ‘봄’은 짧았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새 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헌법상 대통령과 정부는 존속됐지만, 실제 권력은 신군부 핵심 인물들에게 집중됐습니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자리에 민주적 질서가 아니라 또 다른 군사 권력이 대신 들어앉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곧 닥쳐올 민족의 고난을 예견한 듯, 1980년 신년사에서 성찰과 다짐을 드러냈습니다. 김 추기경은 지난 10년간 교회가 ‘인간의 가난과 비참, 죄와 죽음의 심연에까지 깊이 내려가는 강생의 신비’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렸을 뿐’이라고 자책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는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독재의 사악한 뜻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1980년 2월 18일, 김수환 추기경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고, 주교회의 부의장인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3월 13일 발족한 정부의 ‘개헌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됐습니다.

 

 

민주화 요구의 확대와 신군부의 강경 대응

 

군사 반란 이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 속에서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헌법 개정 작업이었습니다. 정의평화위원회는 1월 16일 ‘헌법 개정을 위한 원리적 건의’를 통해 군부 독재의 봉쇄와 민주화를 위한 5개 항의 법적 원칙을 요구했습니다.

 

1980년 초로 접어들면서 사회 전반에서는 다시금 민주화 요구가 거세졌습니다. 대학생들은 계엄 해제와 학원 자율화, 정치적 자유 회복을 요구했고, 노동 현장과 종교계, 지식인 사회에서도 유신 잔재 청산과 헌정 질서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복권 문제 역시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급격하게 고조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주교단은 5월 6~9일 춘계 주교회의를 열고 첫 시국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주교단은 담화문에서 “오늘의 우리 시국은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고비에 서 있다”며 가장 큰 문제는 인간 존엄성과 기본권을 존중하는 민주 헌정 수립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비상계엄령을 해제하고 민주정치를 속히 정착시켜야 한다”며 “과거의 정치적 과오에 책임이 있는 인사들은 최대한의 겸허와 자숙이 요망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러한 흐름을 ‘체제 위협’으로 규정했습니다. 민주화 요구는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행위로 낙인찍혔고, 군부는 점차 강경 노선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1980년 5월 17일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였습니다. 이 조치로 국회는 사실상 해산되었고, 정당 활동과 언론 보도는 중단됐으며, 주요 정치인과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됐습니다.

 

이로써 ‘서울의 봄’은 종식됐고, 한국 사회는 다시금 전면적인 군사 통제 아래 놓이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억압적 조치들은 광주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12월 25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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