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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구역반장 월례연수: 진리 <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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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반장 월례연수] 진리 <순교>
순교는 신앙의 실천적인 면에서 가장 최고의 모습을 보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자어로 풀이해 본다면, 순(殉)은 죽을 사(死, 歹)와 열흘 순(旬)이 합쳐진 형성 글자로서 ‘열흘도 못 기다리고 따라 죽는다’는 의미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교(敎)는 ‘가르침’으로 천주교의 가르침, 곧 천주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순교는 “천주교를 위해서 열흘도 못 기다리고 따라 죽을” 정도로 천주교를 정도(正道)요, 진리요,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리랑’ 가사에 ‘나를 버리고 가신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도 괜찮지만, 천주교와 복음을 위해서는 열흘도 못 기다리고 따라 죽을 수 있는 것이 순교입니다.
라틴어의 마르티리움(martyrium)도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증언’ 혹은 ‘증거’를 뜻하고, 특히 피로써 증언하는 것을 뜻하여, 순교(殉敎)로 번역합니다. 사도행전은 스테파노를 증거자로 부르면서 주님을 위해 죽은 첫 순교자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서는 이를 위주치명(爲主致命) 곧 ‘주님을 위해서 순교한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인들과 복자들은 모두 순교자입니다. 처음부터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시복, 시성을 추진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교를 입증시키기 위해서 교회사 자료를 순교자 위주로 수집하고, 순교자 중심으로 교회사를 서술하였습니다. 순교를 입증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데, 순교의 물리적 증거(질료적 증거)와 형상적 증거가 모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증거란 육체적 생명이 박해에 의해 참으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물리적 타격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입증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형상적 증거란 박해자의 행위가 천주교와 복음에 대한 증오에 의한 것이어야 하고, 순교한 이가 천주교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경우에만 순교로 인정됩니다.
먼저, 순교의 물리적 증거에 대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의 경우, 명례방 공동체의 집주인으로서 을사추조적발 사건(1785)으로 인하여 유배형에 처해졌고, 유배지에서 며칠 만에 죽었다는 기록과, 1-2년 후에 죽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었습니다. 순교의 물리적 증거라는 입장에서 보면, 심문과 고문의 결과로 며칠 만에 죽었다면 그것은 가해자의 타격에 의해 죽은 것이 분명하므로 순교라고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1-2년 후에 죽었다는 증언 안에서, 고문의 상처가 낫고 다른 병이 생겨서 죽었다면 그것은 순교로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김범우 토마스는 순교자 명단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한동안 명확하게 순교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늦게까지 시복을 추진하지 않았고,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순교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평소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희생하며 살아갔던 신자들, 목숨을 걸고 척박한 오지에서 선교하는 이들, 그러한 복음과 선교의 삶을 일종의 순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범우의 죽음은 한국교회의 첫 신앙의 증거자요,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명한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한국 교회의 첫 순교자가 누구인지 문의합니다. 현재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라는 두 분의 순교복자를 모시고 있습니다. 시복이 될 때 ‘하느님의 종’의 순교와 성덕을 분명하게 입증시키므로, 복자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순교가 증명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공식적인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는 현재 윤지충, 권상연 순교복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가 시복된다면, 첫 순교자는 김범우 토마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누가 첫 번째 순교자 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선배들의 삶과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례방에 있던 자신의 집을 기도의 장소로 내어준 김범우 토마스의 삶과 신앙, 그 집회에서 천주의 창조와 섭리를 강론했던 이벽 세례자 요한 등 한국천주교 공동체의 주역이 있었기에 우리 교회는 신앙과 순교의 주춧돌 위에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순교의 형상적 증거에 대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김대건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시복을 추진할 때, 박해자들의 형상적 증거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즉 김대건과 서양 선교사들은 천주교에 대한 증오 때문이 아니라, 국경을 허락 없이 넘었다는 조선법을 어겨서 사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의 새남터 순교 장면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김대건 신부님이 서양인들과 접촉한 것은 천주교와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순교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이 이제 시작된다고 증언하는 모습 속에서 참으로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순교의 형상적 증명이 이루어집니다.
한국 교회는 실로 놀라운 신앙의 증거자, 순교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실제 기록에 의하면 배교자가 더 많습니다. 수리산 교우촌에서 최경환 방지거 회장과 이성례 마리아 등 수십명의 교우들이 모두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이 배교를 시작하니 그를 따라 모두들 주님을 배반하고 풀려났습니다. 오로지 교우촌 회장 최경환과 이성례, 이 에메렌시아 여인만이 끝까지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최경환이 옥사하고 갓난아기 스테파노가 죽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려 잠시 배교의 뜻을 비추고 풀려났으나, 다시금 천주 신앙으로 돌아와 당고개 사형터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또한 홍낙민 루카는 임시 성직제도의 신부로 활동했는데, 1801년 처음 체포된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3번의 추국 동안, 그는 천주교를 떠난지 오래되었다고 하며, 배교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마지막 신문을 하며 유배 혹은 다른 형벌로 마무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4번째 진술은 마치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회개로 돌아선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낙민 루카 : “저는 이 학(천주교)이 옳은 줄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까지) 억지로 그르다고 한 것은 혹 살 길이 있을까 해서 그러한 것이옵니다. 저는 이미 중형을 받고 장차 죽을 것인데 하필 옳은 것을 가지고 그르다고 하며 교를 배반하리이까?”
심문자 : “네가 만일 예수(耶蘇=야소)의 학문을 사학(邪學)이라 한다면 복법(伏法, 사형)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그것이 사학(邪學)임을 분명히 말하라.”
홍낙민 루카 : “이미 (천주교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이제 당연히 죽어야 할 처지에 어찌 감히 야소를 욕하리요? 상고하여 처치하소서.”
이렇게 돌아섬의 증언이 한국천주교회 순교영성의 핵심이 됩니다. 홍낙민 루카 복자는 풍산홍씨 집안의 순교자 13위 중 첫 번째가 되었고, 그 이후로 3대가 더 이어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테르툴리아노 교부의 말씀대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가 됩니다. 병오년 김대건 신부님 순교 180주년에 우리도 일상에서 자신을 내려 놓는 순교의 삶을 살아갑시다.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6년 3월호,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한국 교회사 연구소)] 0 6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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