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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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40: 절망의 시대 극복하는 희망을 통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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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15:12 ㅣ No.1001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40) 절망의 시대 극복하는 희망을 통한 행복


희망, 하느님 은총의 처방전으로 참행복 맛보는 영적 백신

 

 

- 하느님의 성실함은 변치 않기에 희망은 나그네가 겪는 시련 속에서도 그를 지탱하는 ‘영혼의 닻’이 된다. 닻을 쥐고 하느님을 향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희망을 표현한 고드프리트 마스의 <희망의 알레고리>. 위키미디어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따르면, 지옥의 입구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에 들어오는 그대여’라는 서늘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선언은 지옥을 단순히 육체적 고통이 가해지는 장소가 아니라, 기회와 용서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이 완전히 박탈된 ‘폐쇄된 공간’으로 규정한다.

 

한국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된 ‘헬조선’이란 표현은 이러한 지옥의 속성을 함축한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확신을 잠식하고, 개인의 노력이 구조적 벽에 부딪혀 냉소와 비관으로 치환되는 현실은 현대인이 처한 ‘희망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상태는 단순히 심리적 위축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파괴로 이어진다. 희망이 거세된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궁극적 목적으로 정렬시킬 동력을 잃고, 현재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희망론을 고찰함은 세속적 욕망과 참된 기대를 구별하여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지침이 된다. 토마스는 희망을 막연한 낙관주의나 정서적 위안으로 치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희망을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궁극적 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실천적 힘으로 해석한다.

 

 

희망이라는 덕의 필수 요건

 

토마스는 ‘희망(spes)’의 본질을 규명함에 있어 이를 단순한 감정적 상태인 정념과 탁월한 습성인 덕으로 엄격히 구분한다. 정념으로서의 희망은 미래의 선에 대한 본능적 기대에 불과하여 도덕적 가치에서 중립적이지만, ‘대신덕’(신학적 덕)으로서의 희망은 인간의 행위를 신적 기준에 순응시킴으로써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고차원적 원리이다.(II-II,17,1) 토마스에 따르면 희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대상이 선(bonum)이어야 하고, 미래의 것(futurum)이며, 획득하기 어려운 것(arduum)임과 동시에, 가능한 것(possibile)이어야 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요소는 ‘어려운 것’이다. 토마스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선은 단순한 갈망의 대상일 뿐이지만, 난관을 극복해야 얻을 수 있는 선만이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켜 덕의 차원으로 이끈다고 보았다. 이러한 어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게 만들고 희망을 통해 그것을 넘어서려는 투쟁적 용기를 북돋운다.

 

또한 대신덕으로서의 희망은 그 가능성의 근거를 인간의 계산이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에 둔다는 점에서 세속적 낙관주의와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희망의 궁극적 대상은 하느님 자신이며, 그분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행복(beatitudo)이다. 이는 지상에서의 일시적 안락을 넘어선 완전한 선에 대한 확신을 제공한다.

 

 

‘나그네’로서의 삶에 필요한 하느님의 도우심

 

인간은 본래 미완성의 존재로서 본향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나그네(viator)’의 지위에 있다. 이러한 나그네로서의 처지는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내지만, 역설적으로 무한한 희망의 근거가 된다.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최고선에 이르기 위해 하느님의 권능에 전적으로 의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동력이 바로 ‘하느님의 도움(auxilium divinum)’이다. 토마스는 희망이 하느님의 전능과 자비에 유착함으로써 덕의 지위를 획득한다고 논증한다. 인간이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존하는 방식은 비굴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활동에 적합한 척도를 확립하는 영적 완전성을 의미한다.(II-II,17,1)

 

이러한 의존은 희망의 확실성으로 이어진다. 비록 인간의 노력은 실패할 수 있으나, 약속하신 하느님의 성실함은 변치 않기에 희망은 신앙에서 유래하는 확실성을 지니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II-II,18,4) 따라서 희망은 나그네가 겪는 시련 속에서도 그를 지탱하는 ‘영혼의 닻’이 된다. 그러나 이 완전한 신뢰의 여정은 양극단의 왜곡, 즉 절망과 자만이라는 암초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절망과 자만에 의한 희망의 왜곡

 

토마스는 희망의 덕에 반대되는 두 가지 악습으로 ‘절망(desperatio)’과 ‘자만(praesumptio)’을 지목하며, 이를 인간 행복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장애로 분석한다. 절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의지적 거부이며, 영원한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상태이다. 토마스는 절망을 가장 위험한 죄 중의 하나로 규정하는데, 이는 희망을 버린 인간이 선을 추구할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필연적으로 악습에 추락하기 때문이다.(II-II,20,3) 이는 하느님의 전능을 자신의 나약함 아래에 두는 인식적 왜곡의 결과이다.

 

반면 자만은 하느님의 정의와 지혜를 도외시한 과잉된 신뢰이다. 이는 회개 없는 구원을 바라거나 자신의 자력만으로 최고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방자한 태도이다.(II-II,21,1) 현대 사회의 냉소적 비관주의가 절망의 변종이라면, 기술적 진보나 물질적 풍요가 모든 실존적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자만의 한 형태이다. 토마스의 관점에서 이 두 극단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한 영적 파멸의 징후들이다. 이 악습들을 극복할 때 비로소 희망은 인간을 진정한 인내로 이끄는 동력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유를 통해 확인한 희망은 단순한 심리적 낙관이 아니라, 신적 도움에 의탁하여 최고선을 향해 나아가는 ‘확실한 덕’이다. 지옥문 위의 경구가 희망의 단절을 선포하고 세속적 희망이 인간의 계산에 머문다면, 신학적 희망은 인간의 시선을 영원한 행복과 연결하여 현재의 결핍을 완성의 과정으로 정화한다. 토마스의 희망론은 어떤 시련 속에서도 인간이 신적 은총을 통해 최고선에 연결되어 있음을 증언한다. 

 

현대인이 처한 ‘헬조선’의 폐쇄성은 토마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아직 본향에 도달하지 못한 ‘나그네’임을 망각한 데서 기인한다. 희망의 덕을 지닌 이는 타인과 연대함으로써 공동체 전체에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절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희망의 덕을 함양하는 것은 인간 본질을 회복하고 진정한 행복의 가능성을 수호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자신의 무력함에 침잠하는 절망과 역량을 과신하는 자만을 경계하며, 신적 은총에 의탁하여 영원한 선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나그네의 자세를 회복해야 ‘참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26년 8월 2일,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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