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사제관일기76/ 김강정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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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daegun011] 쪽지 캡슐

2001-06-23 ㅣ No.3895

 

    사제관 일기 76  

 

"신부님.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건 뭘까요.

바로 그것을 찾아보세요......."

한 자매님의 메일 속 마지막 물음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과연 무얼까......

며칠 째 그에 대한 답을 도무지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머리 속에만 맴돌던 이 어려운 숙제가 오늘에야 풀렸습니다.

저는 정답을 들고 서둘러 그분에게 이렇게 메일을 보내드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마음을 잃지 않고 사는 일입니다..."

 

마음......

가장 소중하면서도 가장 쉬이 잃어버리는 것.

가장 강한 듯 하면서도 가장 다치기 쉬운 것.

하여, 신께서 보이지 않는 자리에다 넣어놓으셨다는, 그 은밀한 보물.....

그 마음이야말로 세상 제일로 소중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

제 답이 맞으면 좋겠지만, 아니래도 좋습니다.

저는 그것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일로 여기며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물음 앞에 답을 내고도 자꾸만 자신이 없어집니다.

하마 마음을 잃고 사는 저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사제로서의 참 마음을 잃고 산지도 오래입니다.

세속보다 더 세속적인 모습의 삶을 봉헌하면서도,   

사제라는 이름만으로 거룩한 삶이 되고 마는 이 모순이 차마 죄스럽습니다.

사제가 사제로서의 냄새가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거늘,

제 마음은 그리스도의 향기조차 맡을 길 없는 메마른 황무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코 불행한 사제는 아니지만, 스스로 불행을 사는 사제가 되어,

이 거룩한 직분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

저에게도 첫 마음은 있었습니다.

사제로 서품이 되는 그 날,

저는 그 누구보다 많이 울어야 했습니다.

"예"라는 한마디의 수락을 놓고,

제단 앞에 부복하여 펑펑 울면서 첫 결심을 마음 속에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기겠노라고.......

그러면서, 제 첫 마음을 글 한편에 이렇게 옮겨 놓았습니다.

 

자랑할 바 없는 비천한 제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들고 살아온 지 어언 10년.

10년의 신학생 생활을 마감하고 이제금 사제의 반열에 들어

제 삶의 조그만 완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할수록

하느님의 무량한 은총이며 제게 안배하신 경이로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한 유력한 자들을 무력하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바로 제가 그 어리석은자고, 약한자며, 보잘것 없고, 아무것도 아닌 자였습니다

그런 미약한 한 사람의 손에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사명을 도맡을 열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미련을 포기하지 못해

세상과 하느님을 선택해야 할 기로에서 번번히 세상 것을 택해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수많은 은총과 시간을 허비하시면서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릇된 것에 눈이 멀어 참으로 지녀야 할 것을 잃고,

버려야 할 것에 탐착하던 지난 시간들을 깊이 뉘우칩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각인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도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한시라도 하느님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목숨이기에

제가 지닌 한계와 부족함을 인정하며

그분의 은총과 여러분의 기도에 힘입고 싶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제단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제이길 기도해주십시오.

인간의 인기에 영합하는 사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좇아 따르는 겸손한 사제이길 빌어주십시오.

항상 소외된 이들 편에서 함께 울고 아파하는 사제,

성덕과 겸덕을 겸비한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제가 되도록 빌어주십시오.

겸하여, 한가지 것을 더 청한다면,

서품 제의를 평생을 지켜 죽을 때 수의로 입고 갈 수 있도록 빌어주십시오.

동안엔 정말 감사했습니다.

.....................

.....................

제 삶을 고백하건데,

결코 이 글만큼 아름다운 삶은 아니었습니다.

사제직을 꿈으로 살기에는 넘어서야 할 현실이 너무나 높았습니다.

그 현실 앞에서 나날이 쓰러져온 비참함.....

이것이 제 삶의 역정이었고, 빌어야 할 잘못입니다.....

 

사제성화의 날인 오늘.....

지금 저는 사제관에서 맥주 한 캔을 놓고 자축의 파티를 벌이고 있습니다.

서품5주년을 기념하는 사제성화의 날.

초청도 없고, 방문도 없는 쓸쓸한 자축연이지만,

하느님과 저만의 은밀한 시간이기에 더없이 소중합니다.

 

그리고,

저의 결심을 다시금 조용히 되 뇌이며 하느님께 고백하고 싶습니다.

서품을 받던 날, 그 날의 눈물을 생각하며, 더 많이 울거라고,.....

그래서, 첫 마음을 잃지 않고, 나날이 새로운 모습으로 살거라고......

비록 5년씩이나 묵은 낡은 신부지만,

당신께 서투른 사랑의 고백을 하는 새신부의 마음은 남아있다고.......

그렇게 그렇게 당신 앞에 고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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