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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부드러운 오빠와 고약한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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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관 [gabie] 쪽지 캡슐

2002-04-21 ㅣ No.32262

復活 第4主日

(2002. 4. 21. ’착한 목자 주일 - 성소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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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오빠와 고약한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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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활 제4주일을 일컬어서 ’착한 목자 주일’이라 합니다. 그 까닭은 매해 이 부활 제4주일에는 요한 복음서 10장을 봉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요한 복음서 10장은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를 주제로 당신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가 밝히시고(요한 10, 1∼18의 내용), 그 때문에 유다인들로부터 악의의 오해와 박해를 받으시고 결국 죽으실 운명의 빌미를 잡히시게 되는 내용(요한 10, 19∼39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착한 목자’를 주제로 하여 우리는 오늘 그 착한 목자의 부르심을 알아듣기로 다짐하면서 오늘을 또한 [성소주일]이라 합니다. 그 목자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 형태에 따라 ’사제 성소’니 ’수도자 성소’니 또는 신자들의 ’일반 성소’니 하는 이야기들을 오늘 교회는 펼칩니다.  

이러한 성소 주일에 특별히 ’착한 목자’를 주제로 하는 사제 성소에 대한 계몽을 많이 하게 되는데 저는 오늘 그래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의 이 무거운 심정을 ’착한 목자 콤플렉스’라고나 할까요…!

저의 ’착한 목자 콤플렉스’라는 것은 저 자신이 신자들로부터 ’착한 신부’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저를 아는 신자 분들은 대개 저를 ’무서운 신부’라고 평가합니다. 저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참 기분이 나쁩니다.

얼마 전에 저의 후배 신부님께서 군종감으로 취임하시게 되어서 그 축하식에 참여한 일이 있습니다. 그 축하 미사에서 군종 교구 주교님께서 강론 중에 그 신부님의 착한 성품을 칭찬하시면서 그 신부님의 별명을 소개하셨습니다. 그 신부님은 ’부드러운 오빠’라는 별명이 있답니다. 저는 그 신부님의 그 별명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미사 후 축하 파티 중에 저의 옆에 앉아 계시는 다른 선배 신부님께 농담조로 여쭈어보았습니다. "저도 ’부드러운 오빠’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없을까요?"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 대답은 저를 더욱 실망시켰습니다. "윤 신부는 ’고약한 오빠’라고 불러야 되지…."

하여간 저의 캐릭터는 ’고약한 사람’인가 봅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만, 정말로 기분 나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지내던 본당의 인근 성당에 행사가 있어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행사 후 식사시간에 주교님 앞에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본당의 부인회장님께서 주교님께 맥주를 따라드리자 주교님께서 그 부인에게 "앞의 윤 신부님께도 한 잔 권하시지요."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께서 저보고 "어디서 오신 신부님이세요?" 하시지 않겠어요. 그래서 "00동에서 왔습니다." 했더니 그 부인께서 대뜸 하시는 말씀이 "아이구! 무서운 신부님!"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의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참으로 기분 나빴습니다. 저는 즉각적으로 반격을 했지요. "자매님, 저를 언제 보셨다고 초면에 그런 식으로 말씀하세요?"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즉시 대답하기를 "그 00동 본당 신자들이 그러던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더욱 기분이 나빴지요. "우리 본당 신자들이 나에 대해서 그렇게 소문을 내고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자리의 밥맛이 싹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주교님께서 그 부인에게 "자매님, 윤 신부님은 알고 보면 그렇지 않아요. 윤 신부님이 얼마나 마음 여린 분인데요…!" 하시는 바람에 상한 기분을 억누르고 그 자리에 끝까지 앉아 있을 수는 있었습니다만, 그 후로도 그 때의 그 부인께 들은 말이 가끔 회상되어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저에 대한 평가는 제가 신자 분들께 잘못 하고 살았기 때문에 당하는 자업자득이겠습니다만, 저로서도 할 말은 있지요. 그런 저에 대해서 변명을 하자면, 저는 본당의 모든 일을 저 독단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도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억울합니다. 사목회나 신자들의 각종 모임에 해당되는 사항들을 꼭 그 해당 조직의 토의 과정을 통해서 시행하고, 그런 절차 없는 것 그래서 서로 책임을 분명히 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편법적으로 제가 처리하지 않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당의 모든 재정 사항을 완전 공개하고 사목회장단의 결재 없이 처리하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신앙 교육이나 선교 활동에 대해서도 신자들의 토의 과정을 통한 방향 설정에 따라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자료 마련을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하여 발표하고 그 프로그램에 대한 신자들의 동의를 구해서 시행하였습니다. 전례에 있어서도 지속적인 교육을 해서 그 진행 봉사자들을 배치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매 주간의 자료(주보 형태)로 교우들께 제시할 것을 마련하기 위해 섣불리 여행을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저의 자랑을 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저의 노력에 대하여 일부 교우들이 보이는 반응이 실망스러웠을 때 쉽게 분노하는 것이 저의 큰 문제 거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매 주간 제가 밤잠 자지 않고 만들어서 신자들께 나누어드리는 ’성서 읽기 자료’를 가져다 읽지도 않으면서 나중에 엉뚱한 말을 하시는 분이 계시면 참지 못하고 꾸짖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일종의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에게 제가 친절한 반응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토요일 밤인데 저보고 함께 술을 마시러 가자고 보채는 분이 계시면 제가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나는 중이올시다. 내일 아침 불공(주일 미사) 드려야 할 중에게 오늘 밤 술 마시자 하면 되겠습니까?" 저의 이 말을 듣고 돌아서는 분께서는 무안을 당했다고 생각하십니다.

이러한 저에게 문제가 있지요. 친절한 어조로 차근차근 깨우쳐 드려야 할 터인데 그러하질 못했으니까요.

제가 친절하고 차분하게 말씀을 드려야 할 터이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이 사실 저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에게 다시 생각할 것이 있는 것이지요. 공적으로 한 번 알려드리면 다 되었을 일도 개인적으로는 이분 저분에게 수십 번이고 수 백 번이고 반복해서 말씀 드려야 하는 경우에 성격 급한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신자 분들께 불친절한 사목자로 낙인찍힌 것입니다. 저는 죽는 날까지 노력해도 만족스런 단계의 수양에 이른 사목자가 되지 못할 것 같이 저 자신을 이기지 못해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 때문에 상처받으신 분들의 마음을 제가 죽기 전까지 모두 어루만져 드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죄를 짊어지고 주님의 심판 대전에 설 것이 저는 두렵습니다. 그리고 주님 대전에 심판 받기 전의 현세에서도 이미 상처받은 많은 분들로부터 소리 없는 원성을 듣는 것은 벌써 저에게 내리는 심판이 아니겠는가 하는 두려움이 저를 짓누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른 신부님들처럼 ’착한 신부’라는 말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그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튼 ’착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기분 좋은 일이겠지요. 어떤 신자 한 분만이라도 저를 ’착한 신부’라고 불러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이 정도로 저는 ’착한 목자 콤플렉스’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일컬어 ’착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0, 11 이하 참조). 그래서 저도 언감생심 저 자신을 일컬어 ’착한 신부’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라고 일컬으신 그 까닭에, 악의의 오해를 받고 죽으시는 운명으로 들어서시게 되는 것을 요한 복음서 10장이 수록하고 있는 바를 주목해야겠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착한 목자’로 자칭하신 것이 빌미가 되어 배척을 받으시고 죽으시게 된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목자’라는 그 명칭은 아무에게나 쓰는 게 아닙니다. 함부로 써서는 아니 되는 명칭입니다. 특히 저 겉은 ’고약한 오빠’가 언감생심 그 칭호를 바래서야 되겠습니까?

사실 농경 정착 문화를 바탕으로 해서 살고 있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본래 목축 유랑 문화적 배경의 ’목자’라는 말이 조금은 생소한 명칭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래가 유목 민족 즉 "떠돌며 사는"(신명 26, 5)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머리 속에는 ’목자와 양떼’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양떼를 몰고 다니는 목자의 모습에서 그들은 민족의 지도자를 연상하였습니다. ’목자’는 양떼의 주인이며 동시에 동반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그야말로 떠돌이 유목 민족으로서 출애굽 과정과 그 후 가나안 정착까지의 역사를 양떼와 같은 운명의 역사로 기억할 수 있었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목자’인 것입니다. 그런 떠돌이 양떼로서 그들은 양떼의 주인과 같은 민족의 영도자를 동시에 그들의 애환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 보았습니다. 목자는 야수로부터 양떼를 지키는 힘을 가진 지도자이며(1사무 17, 34∼37 ; 참조 마태 10, 16 및 사도 20, 29의 내용), 동시에 양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창세 33, 13∼14의 참조) 연약한 양들을 안아주고(이사 40, 11 참조) 모든 양들을 자기 딸처럼 사랑합니다(2사무 12, 3 참조). 이러한 목자의 권위는 강력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헌신과 사랑에 근거한 권위입니다.

특별히 숱한 고통과 배고픔과 목마름 가운데 출애굽으로 광복을 향하여 걷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여정은 광야에서 배부른 종살이로의 회귀를 손짓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채찍질하며 이끌어 준 위대한 목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여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그 위대한 목자는 곧 ’야훼 하느님’이십니다(시편 78, 52∼53 ; 80, 2 ; 95, 7 ; 이사 40, 11 참조). 종살이 땅을 박차고 그 민족을 자유천지의 땅으로 인도해준 영도자, 헤매는 양떼를 척박하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자유의 땅으로 이끌어 준 목자, 그분이 곧 하느님이십니다.

그렇게 당신 양떼를 몸소 치시는 하느님(시편 100, 3 ; 79, 13 ; 74, 1 ; 미가 7, 14 참조)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양떼를 맡기셨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손을 빌어"(시편 77, 21) 당신 백성을 인도하시고, "목자 없는 양떼가 되지 않도록"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삼으셨습니다(민수 27, 15∼20 참조). 그리고 양떼 가운데서 다윗을 뽑아 당신 백성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시편 78, 70∼72 ; 2사무 7, 8 참조).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께 책무를 부여받은 백성의 목자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판관들이나(2사무 7, 7) 백성의 지도자들이나(예레 2, 8) 왕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예레 25, 34∼36 ; 나훔 3, 18 ; 이사 44, 28 참조). 그러나 그런 목자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참 목자이신 하느님을 배반하여(예레 2, 8 참조) 양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제 살길만 궁리하여, 양들은 방치되고 흩어져버리는 때가 많았습니다(예레 23, 1∼2 ; 에제 34, 1∼10 참조). 권력을 휘두르고 이방인을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한 나쁜 목자들도 많았기에 양떼인 민족은 이방인들(야수)에게 끌려가고 고통을 받고 죽기도 하던 불행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그리하여 참 목자이신 하느님께서는 못된 목자들을 축출하시고(즈가 13, 7 ; 11, 15∼17 참조),양떼를 직접 돌보시려 모아들이셔서(예레 23, 3 ; 미가 4, 6 참조) 새 목자에게 마지막으로 맡기시기로 하셨는데 그 분은 곧 묵묵히 끌려가는 양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흩어진 양들을 모아 의롭게 하는 ’야훼의 종’(이사 53, 6∼7 ; 11∼12)입니다. 그 새로운 목자 ’야훼의 종’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사실 ’목자’란 민족의 영도자나 왕이나 예언자들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었고, 더구나 그러한 지도자들보다도 ’참된 목자’는 하느님이시라고 생각하던 유다인들(이스라엘 민족)에게 갈릴래아에서 올라온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를 ’목자’라고 일컬은 것은 어처구니없는 만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까닭에 그분은 죽으십니다. 그렇게 죽으시는 그분은 자신을 희생하여 흩어진 양들을 모아 의롭게 하는 ’야훼의 종’(이사 53, 6∼7 ; 11∼12)이신 그분이시기에, 그분의 말씀 가운데 양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바치신다는 요한 복음 10장18절의 말씀이야말로 당신 자신을 밝히시는 핵심입니다.

양들을 위해 스스로 당신 목숨을 실제로 바치신 그분께서 당신의 양떼를 모아 돌보도록 목자를 보내실 때에는 당신께 대한 사랑을 정말로 지니고 있는가 확인을 먼저 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 확인하시면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고 하셨습니다(요한 21, 15∼17). 양들을 돌볼 사람이 필수불가결로 지녀야할 것이 사랑이기에 그렇게 사랑을 세 번씩이나 다짐하셨던 것이지요.

저는 그래서 저 자신이 신자들을 대하며 ’목자’라는 칭호를 듣기에는 너무너무 자격 미달인 것 같습니다. 화를 내고 나면 며칠 동안 저 자신이 괴롭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더욱 저 자신에게 부끄럽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양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간다. 양들은 도둑과 강도의 말을 듣지 않는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오늘의 요한 복음 10,1-10에서 발췌)

 그렇습니다. 제가 아무리 신자들을 위해서 밤잠 안자고 일을 한다 하더라도 신자 분들이 저의 말을 알아듣지 않음은 제가 이른바 ’목자’가 아닌지도 모를(강도일지도 모를) 까닭이지 않은가 하며 오늘의 제가 해야할 반성의 핵심은 "사랑하는가?" 하는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올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괴롭습니다.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신자들을 원망할 때가 많았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화를 잘 내는 ’고약한 오빠’인가 봅니다. 이러한 반성으로 지내는 날이 오늘 [착한 목자 주일] 즉 오늘 저의 ’성소 주일’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다짐하여 이스라엘의 목자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양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창세 33, 13∼14의 참조) 연약한 양들을 안아주고(이사 40, 11 참조) 모든 양들을 자기 딸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2사무 12, 3 참조). 그리고 동시에 목자는 야수로부터 양떼를 지키는 힘을 지녀야 합니다(1사무 17, 34∼37 ; 참조 마태 10, 16 및 사도 20, 29의 내용). 이렇게 힘있는 목자의 권위, 그것은 헌신과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헌신과 사랑, 그것은 묵묵히 끌려가 죽는 양 같이 당신이 먼저 죽으심으로써 양떼를 새로이 모이게 하신 ’야훼의 종’(이사 53, 6∼7 ; 11∼12), 그분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목자’, 그런 ’야훼의 종’을 본받으라고 오늘 [착한 목자 주일] 즉 ’성소 주일’은 저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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