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유게시판

재단옹호자들에게1-지현정님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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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카엘 [zu4rang] 쪽지 캡슐

2002-11-17 ㅣ No.43673

지현정 님이 지난주에 올린 43267번 글을 보았습니다.

 

지난 번에 지현정 님도 저의 세례명에 딴죽걸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지만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남의 신앙적 순수성을 들먹이는 치졸함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되어 글을 쓰기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남의 신앙적 순수성을

먼저 장황히 거들먹거리면서 제가 하지도 않은 말도 덧붙이고 자신 특유의 희한한

논리로 신앙적 양심의 눈을 멀게 하는 님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저는 이제 병원 노조분들을 옹호함과 병행해서 님같이 남을 매도하는 이들

에게 일침을 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쓴 글의 중요 핵심 내용은 모두 빠져나가고 주변적인 표현들을 편집해서는

희한한 논리로 건너뛰는 님의 글을 접하고서는 요즘 대입 논술 고사 준비하는 학생

들에게 ’다음 글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시오.’라고 하며 문제의 지문으로 제시하면

참 좋은 공부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현정 님은 저의 신앙의 순수성을 들먹이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 아직도 내면적으로 거의 완벽한 개신교인이라고 판단됩니다." 라고요.

저는 이 사람이 왜 이리 날뛰나(?) 했더니 ’Let it be.’ 라는 글과 성전에서 장사치

들을 내어쫓으신 예수님의 기사가 나오는 성서 말씀으로 노조를 몰아세우셨던 분이

더군요. 저는 님이 전에 저의 세례명을 거들먹거리는 댓글을 다셨던 일이 있었을 때

언급하려다 말았었는데 이번에야 님의 글을 대충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몇

일만에 게시판에 들어오면 엄청 많이도 게시된 글들을 대충 읽다보면 글의 내용만

얼핏 기억하고 게시자는 놓치기가 일쑤였는데 참 우연히도 제가 쓴 글의 상당 부분

이 님의 글을 논박하는 그 자체였으니 흥분하셨을 만도 합디다.

물론 님이 신앙의 수호를 바라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얼토당토 않는 논리로 불의를

덮어버리는 님 같은 분들이 우리 가톨릭 신앙을 수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오

로 남아서 가톨릭의 대적자들로부터 두고두고 발목을 잡히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숙청(?)하고자 하는 이의 신앙의 순수성을 매도하는 지현정 님의 글을 읽어 내려

가면서 재단의 잘못이 흔적도 없이 사라짐에 희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불의’가 나의 주관인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님의 희한한 논리

의 비약이 저 한 사람의 주관적 생각처럼 건너뛰는 과정을 보고 참으로 궤변이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님은 제가 노조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은 모두 덮어 버리고 그저"노조원

의 입장에서 동조하시기에 재단과 사제들을 불의하다."고 했다며 이것은 나의 주관

이고 내가 지적했던 것들은 언급을 피하고 그저 "자신이 볼 때는" 불의가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님의 그 말이야말로 "자신이 볼 때"는 불의가 아니라는 님 한

사람의 "주관"이 아닌가 말이오? 제가 지적했던 사항들이 객관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무엇하나 증명하지도 않고 모두 빠져나갔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저 말고도 많은 분

들이 보시기에도 불의가 아닐 것"이라며 님의 주장의 당위성을 불특정 다수에게 슬쩍

갖다가 삽입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분들" 이라는 부류가 누구였소? 재단과

사제의 옹호에만 눈이 몰린 주관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이곳 게시판

에서야 절대 다수가 재단 옹호에 치우쳐 있으나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바깥의 시야와

이곳의 균형적인 양심을 갖추고 계시는 분들은 지금 가톨릭 재단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분명히 파업에 있어서 노조의 책임도 있지만

지금은 그 절반의 책임이 흔적도 없이 은폐되었다고 했던 것입니다.

 

보시오. 이번 일이 가톨릭 재단 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일반 사업장이나 다른

병원에서 일어난 것이면 그 사업장의 경영자가 법에도 보장된 노동자들의 단결권과

단체 행동권을 무시하고 ’모여 있으면 대화를 할 수 없다며.’ 파업 전야에 환자를

등지고 퇴근해 버렸다면 그러한 경영자를 지금과 같이 편들었겠소? 병원장 자신이

먼저 환자를 등지고 협상을 거부하는 것이 법에서 보장한 권리였단 말입니까? 아닙

니다. 자칫하면 불성실 교섭에 의한 파업 유도 혐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파업 전야의 노동자들의 행위는 파업이 아닌 이상 법에서도 보장해주므로 절대로

금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요즘의 대학생들 집회 수준의 모임에 수선을 떠는 것은

의료원장 자신의 노조의 쟁의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지나치게 부정적인 견해 때문

이며 이러한 일의 내면에는 노조의 실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노조와의 협상에

대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자세가 은폐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적어도 그날밤 마라톤

협상을 해서라도 다른 병원들처럼 파업 2,3일 차 이내에 모든 타협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에 구본중 님도 비슷한 취지로 말씀했는데 지현정 님은 제가 "전적으로

노조의 입장에 서서 그들에게 맞춰 주며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해주는

것이 평화를 심는 일" 이라고 했다고 매도하니 기가 막혔을 따름입니다. 제가 정말

그렇게 말했소? 그러고도 님은 나에게 ’가톨릭 신자답지 않다.’는 말을 함부로 하며

남을 평가하였소? 그렇게 님은 남이 하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서 사람을 매도하고도

성체를 모셨소? 님의 눈에 노동자들이 콘크리트로 공구리를 쳐서 테러를 감행했단

말이오?

다시 보시오. 제가 언제 ’대화’를 전적으로 노조에게 맞춰주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단 말이오? 그리고 다른 분들은 이런 매도에 동조하였단 말

이오? 그런 상태에서 성체를 모셨소? 도대체 이분들의 노조와의 대화의 개념이

왜 이리 삐뚤어졌단 말입니까?  

그러니 이렇게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의 사람들과 제가 대립하면 그게 바로 작금의

CMC의 노사 대립의 축소판이 될 것입니다.

 

전에 구본중 님이 "파업을 정해 놓고 하는 것도 우습습니다."며 ’1000원 안주면

내일부터 밥을 안 먹을꺼야.’ 하는 어린애들로 비유를 하셨던데 그 글을 읽고 제가

다 웃었습니다. 그러면 파업을 느닷없이 합니까? ’오늘 사장하고 이야기했는데 이

양반이 신경질부리네. 에이, 기분 나쁘다. 점심 먹고 파업시작이다.’ 라고 합니까?

그러다 정말 환자 잡을 일 있습니까?

 

지현정 님은 말했습니다.

"분명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답변할 말을 찾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은

말솜씨, 언뜻 보면, 소신이 아주 확실하지 않은 웬만한 사람들에겐 옳다고 느껴질

만한 대단한 설득력, 글 전체에서 느껴지는 개신교인 특유의 궤변." 라고.

그러나 ’분명 그게 아니라’가 아니라 님의 생각들이 ’분명 아니었지만’ 님은 너무나

인정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우연히도 제가 쓴 글이 님의 글들을 반대로 뒤집어 버렸

으니 혼란스러웠겠죠. 그것은 저라고 안 그럴 리가 없으며 저의 주장이라고 언제나

모두 맞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의혹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진상 조사를 촉구했던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말재주를 부려도 불의가 덮어질 것 같습니까? 제가 아무리 궤변을 늘여

놓는다고 해서 의가 감추어질 것 같습니까? 재단과 사제에 대한 옹호와 맹종으로

눈이 덮여 버린 사람에게 사제의 오류를 지적하면 그 사람이 혼돈 속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터. 왜냐면 이때까지의 자신이 믿어왔던 기반이 흔들리는 정도의 충격이 되니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뒤를 이으라고 세우신 사제이니,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에 이끄시니 어련하시겠는가 하는 사고에만 젖은 이들에게는 잘못에 대한

직언이 파고드니 혼돈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저 역시도 매 한가지

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 사도께서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이 오니까 할례 받지 않은 이들을 피하다 바울로 사도

에게 면박을 받으셨오. 그러나, 베드로 사도께서는 그러한 직언을 진실로 받아들이

셨고 바로 이분이 우리 가톨릭의 수장이셨습니다.

 

어떤 분이 그럽디다. 논리적인 변론에 두려움을 느끼신다고.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사고의 틀이 깨지며 일게 되는 일시적인 과정일 뿐입니다. 오로지 교회 옹호, 사제

옹호에만 눈이 어두워져서 교회의 잘못과 사제의 잘못은 생각도 않는 이들에겐 바울로

사도님께 지적을 받았던 베드로 사도님과는 달리 바른 직언조차도 두려움으로 전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1장 18절에선 성전의 장사치들을 내쫓으시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두려움을 느낀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는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모든 군중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예수를 두려워하였던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지금 어떤 사람이

나와서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고 합시다. 그 변론자가 메시야여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바울로 사도님이나 여러분들과 같이 다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일뿐입니다.

 

저는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본 영화의 대사가 아직도 마음에 걸립니다. ’정의에 눈이

멀었다.’는. 정의에 눈이 멀어 오히려 그릇됨을 도와주는 잘못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언젠가 제가 고백했던 것처럼 아무리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신념을 휘두

르다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결코 바람직 한 것만은 아닐 때도 있다는

것을. 자칫하면 신앙인들의 대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좋은 소리는 여기서 잠시 멈추고 계속 지현정 님 같은 분들을 질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현정 님은 저의 글을 자의대로 해석해서는 멋대로 곡해해 버렸습니다. 님은 "그분

은, 가톨릭 재단 수뇌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와 대사제들

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을 비교하셨습니다.  얼핏 보기에 매우 그럴듯하군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님의 말이야말로 ’얼핏 보기에 매우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눈을 끄게 뜨고 다시 보세요. 제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와 유대의 대사제를 질책

하셨던 성서의 내용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제들을 비난하는 데에 인용했는가를.

님처럼 남의 애꿎은 세례명을 들먹이며 ’비난의 글이 아니라 듣기 좋은 글만 올리라.

며 꽃그림에 천사가 나올 것 같은 글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기에 이들의 위선에 분개

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와 대사제를 질책하셨던 것을 말하며 듣기 좋은 소리만을

바라는 그릇된 요구에 질타를 가했던 것인데 님은 제가 하지도 않은 소리를 앞질러

해석해 버리고는 남을 매도하니 그것이 님이 말한 ’가톨릭 신자다운 모습’ 이었습니까?

 

저도 남의 글을 잘못 이해하는 일도 있겠지만 님의 글은 처음부터 저의 신앙적 순수성

에 대한 시비에서 시작해서 ’가톨릭 신자답지 않다’느니 개신교인 같다느니 별의 별

매도로 일관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니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런 이들이 성체를 모시

면서 무엇을 하였단 말입니까?

님은 저로 인하여 님이 이전의 쓴 글이 모두가 반박되어 뒤집어지면서 글을 받아들이는

눈조차 뒤집어졌던 것이고 그래서 제가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서는 앞서가며 해석해

버렸단 말입니다. 님도 개신교 이단 교파 교인이요? 님 같은 극단적인 호교론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성서를 자의대로 곡해하고는 가톨릭을 매도하는 일부 개신교인들처럼

남의 글을 멋대로 곡해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남의 신앙의 순수성을 의심케 하여 그가

하는 다른 주장들도 의심하도록 매도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 동조한 다른

이들은 무엇 하는 이들입니까?

 

바리사이파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겠습니다. 이 시대의 바리사이파가 무엇인지

이해하시겠소? 이미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인들은 죽어서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없소

이다. 그러나 지금도 성서의 말씀은 남아서 바리사이파의 위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사 때에 신부님들께서도 강론에서 오늘날의 바리사이파를 이야기하시며

신앙적 교훈을 주시고 계십니다.

 

이 시대의 바리사이인 중 하나는 우리에겐 사랑, 용서, 화해, 이해, 대화 등. 우리가

잘 지켜내기 어려운 짐은 얹어 주고 정작 자신들은 그것과는 정반대로 가서 하늘나라

에 들어가고자 하는 순수한 영혼들마저 실망하고 돌아서게 하는 이들이오. 그리고

또한 바리사이파의 위선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지난 교회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숱한 유혹과 시험에 직면하였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그 오류에서 벗어나고 있는 와중이지만 아직 성교회의 숭고한 가르침은 신앙인들

깊숙이 전해지지 못한 채 다시 시험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평화를 언급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경건의 형식은 갖추고 있되 정작 자신도 평화를

위한 사태 해결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지현정 님은 "평화를 심는 방법은 결코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거라 봅니다."며 우격다짐을 하십니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에서 재단 옹호자들에게

평화의 길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 노동자들을 재단 옹호자들의 주장대로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치신 예수님처럼 공권력을 투입해 내쳤다면 평화가 오겠습니까? 물론

일단은 세상이 주는 평화는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가톨릭의 대적자들의

집요한 공격과 트집에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두고두고 이것을

가지고 발목을 잡을 대적자들 앞에서 마음이 편하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래야 하는 교회의 양심은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이야기하면서 율법 중심의 처벌 일변도가 아닌

복음의 정신에 의한 대화와 용서의 자세로 회귀하길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글로 논박을 당한 님의 눈에는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기사와 병원노조와의 관계가 연결되진 않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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