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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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5-25 ㅣ No.172706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린이와 같은 사람」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상을 차지하는 사람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 순수함을 지니고,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탁하는 마음을 회복하여 거듭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유다 사회에서는 12세 이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취사선택 없이 받아들입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뿌리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아직 잔머리를 굴리고 손익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잠시, 딴짓하다가도 부모가 안 보이면 놀라고 겁을 내어 다시 부모의 품을 찾게 됩니다. 또한 정직합니다. 잘못을 꾸짖으면 금방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순진무구, 천진난만! 전적인 의존성”

 

 

 

어느 날 가정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글을 알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기도하자 했더니 ‘식사 전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후딱 외워 내려갔습니다. 내용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늘 부모와 함께 기도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어린이들이 성 시간에 참석하였는데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던지요! 놀라웠습니다. 어떤 아이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꼭 안아주셨다고 하더라고요.

 

 

 

반 모임에 갔는데 18개월이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기도를 하는 중에는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기도를 마치며 참석한 교우들에게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해 드렸는데 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자기 할머니에게 가서 두 손을 펴서 머리에 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그래서 제가 그를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칭찬하고 왔습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되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눈이 맑아지고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계산하면 하느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분명히 얻게 됩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어린이들의 축복을 가로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은 자유”라는 이론을 내세워 ‘유아세례’, ‘첫영성체’에 무관심한 분이 계십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무지한 부모입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종교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의 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교육 문제를 놓고 “나중에 커서 스스로 공부하게 될 때까지 신나게 놀아라.” 하십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보여주고 가르치며 신앙의 근본을 전수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커서 신앙의 가치와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는” 신앙인이 되고, 또 전해야 하겠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협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공부할 때, 학교 갈 때, 입시나 먼 길을 떠날 때, 군대 갈 때, 결혼할 때....늘 하느님의 축복을 청해주는 부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욱현 신부님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놓고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조건은 아무것도 없다. 단순히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15절). 어린이들이 부모를 바라보듯이 제자들도 하느님을 그렇게 바라보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받아들이고 행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스승이 제자나 어린이를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아이들이 축복을 받도록 예수님께 데려왔던 것 같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나무랐을 것이다. 어린아이들 때문에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짢아하시면서 어린이들을 맞아주시고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14절) 그 어린이는 하느님을 거슬러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일 수도 있고, 갓 태어난 아이나,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수도 있다. 이 모든 사람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로 누구든지 믿음을 갖고 세례를 받는 은총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온 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어린이는 벌어먹지 않고 부모가 주는 대로 받는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든지 또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벌어들인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과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자세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에 걸려 넘어진다.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 역시 세상의 지혜와 명예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에 있음을 알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이 가신 길이 어떠한 길이었는지 묵상하며 순간순간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송영근 신부님

 

『‘어린 아이들’이 아니라 ‘힘없는 이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3-16).”

 

 

 

1)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라는 말은

 

‘안수’를 해 달라고 청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는데,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중이었다면 가르침을

 

방해하지 말라고 그랬을 것이고, 쉬시는 중이었다면

 

예수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언짢아하시며’는 뜻으로는 ‘화를 내시며’입니다.

 

제자들이 한 일은 크게 잘못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되어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상징하는데, 교회 공동체에서 발언권이

 

약하거나 없는 ‘종교적 약자들’도 포함됩니다.

 

<어린이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문 단어의 뜻은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원문 단어를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2)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바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에는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표현만 보면, “그냥 내버려두어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의 뜻은 ‘모든 사람’이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신앙인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특히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렇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냥 놓아두어라.”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할 때, 그 만남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은 큰 죄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소외당하거나 차별당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공동체는 예수님의 교회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3)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4.8-9).”

 

코린토 1서에 바오로 사도가 부자들을 꾸짖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17.20-22).”

 

<당시 코린토 교회의 부자들이 ‘아가페 만찬’을 거행한다는

 

명목으로 자기들끼리만 어울려서 먹고 마셨고,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소외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상황을 전해 듣고 대단히 노해서

 

그 부자들을 매우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4)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는,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의 나라다.” 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차별도 역차별도 없는 나라입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고,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고,

 

유식한 사람도 없고 무식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없으니, 소외당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그런 나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지금 자기가

 

유식하다고 해서, 지금 고위직에 있다고 해서, 지금 상류층에

 

있다고 해서, 지상에서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서도 특별대우를 받기를 바란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김찬선 신부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 김찬선 신부님 ~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오늘 야고보서는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지 않고 무엇을 할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 고통을 겪을 때 의외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신론자들이지요.

 

이들은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니 고통은 물론

 

어떤 경우든 무엇을 하든 하느님과 관련 없이 생각하고 행위를 합니다.

 

 

 

하느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 가운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를 부정하지 않을 뿐 실제의 삶은 하느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실제 삶에 깊이 들어와 있지 않은 것입니다.

 

강론을 들을 때나 누가 하느님 얘기를 하면 그때 잠깐 그의 귀에

 

하느님께서 머물다가는 이내 자취를 감추시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 무엇을 합니까?

 

 

 

껌을 계속해서 씹듯 고통을 씹고 또 씹습니다.

 

고통에 대해 분노하고 고통과 싸웁니다.

 

고통 때문에 이웃과 싸웁니다.

 

그래서 고통 때문에 불행해지고 맙니다.

 

 

 

그런가 하면 고통을 남에게 토로합니다.

 

고통을 가지고 상담을 합니다.

 

 

 

이것은 혼자 고통과 씨름하고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낫고

 

점쟁이한테 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사제에게 가지 않고

 

하느님께 달려가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면에서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야고보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신자라면 고통이 있을 때

 

고통을 곱씹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과 싸우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으로 남과 싸우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 때문에 불행해지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원망하지 말고 하느님을 원망하라고

 

어제 말씀드린 바 있는데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병 주고 약 주냐고 화를 내기도 하는데

 

하느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병을 주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렸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설혹 내 잘못과 내 죄로 병이 나고 고통이 왔을지라도

 

그것들이 하느님과 전혀 무관치 않다고 믿는 자들이고

 

그것들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무엇보다 치유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많이 먹어 간이 나빠졌을 경우,

 

내 잘못으로 간이 나빠진 것이 분명하지만

 

벌로 주셨건 사랑의 매로 주셨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벌로 하느님을 만나건 사랑으로 하느님을 만나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 기도이고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고 신앙이어야 한다고 오늘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즐거울 때는 하느님 찬양 기도가 나오는 것이 다를 뿐이겠지요.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즐거울 때 혼자 싱글벙글하거나 히죽거리지 말고

 

찬양 노래합시다. 오늘 우리.

 

 

 

오상선 신부님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야고 5,13)

 

여러분의 삶은

즐겁고 행복합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때로는 삶이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을 겁니다.

 

 

 

즐겁고 기쁠 때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지요?

그 흥얼거림이 단순히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라면

더욱 좋겠지요.

기쁜 일이 있다면

내 안에만 감춰두지 말고

하느님께 찬양 노래를 드리라네요.

 

그건 어느 정도 할 수 있겠는데

반대로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을 원망하거나

힘들다고 짜증을 내거나

술을 퍼 마시면 되나요?

사도는 말하네요.

그럴 땐 기도하라고요.

훨 나은 방법이 아닐까요?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즐거울 때는 찬양 기도 드리고

괴로울 때는 청원 기도 드리고...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축제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이야말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복된 분이라 믿습니다.

오늘 그 축복을 충만히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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