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반영억 신부님_「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스크랩 인쇄

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5-26 ㅣ No.172723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빚어 만드셨고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이 시간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으로 계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태양 자체를 성부로, 지구까지 오는 빛을 성자로 그 빛이 따뜻하게 하고 자라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성령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 다 부족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앞에 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고 목표이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외 아드님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받고 소외 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하나이신 하느님을 사랑 안에서 만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히 믿을 교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되는 삶의 방식을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성부는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성자 역시 아버지가 없으면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항상 아버지의 아들로 존재합니다. 성령은 성부의 영이시며 성자의 영이십니다. 이렇듯 삼위일체는 하나가 타자 없이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런 다음 성부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15). 성령께서도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선포하시고 성부를 드러내십니다. 성부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시고 온전히 성자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서로에게 열려 있는 관대함을, 타자에게 열려 있음을 봅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십니다. 우리도 나와 너, 우리라는 사랑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매일 긋고 있는 십자성호를 통해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십자성호를 그으며 목숨을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감싸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고 이웃사랑의 소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더욱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으로서 함께 계신다니 가슴 벅찬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미야1,6)하며 예언자 직무를 거절할 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미야1,8)고 하셨고, 모세도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4,10)하고 직무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내가 너희를 도와 주겠다”(탈출4,15)고 하셨습니다. 에제키엘서 2-3장에 보면 에제키엘이 소명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도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하셨고 에제키엘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는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는 할 일을 주시고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한 사람은 믿음의 눈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사도행전이 바로 그것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을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더욱 다져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커지길 원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살아내야 합니다. 큰 믿음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하십시오.

 

서로 간의 관계에 이해타산이 끼어들면 힘들어집니다. 나도 피곤하고 상대도 피곤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이듯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많이 행하게 될 것이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아직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분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결단을 내리는데 있습니다”(소화 데레사).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기 코드를 빼어 놓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총을 주시고자 해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코드를 빼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먼저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힘들고 지쳤을 때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75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