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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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노혜경씨의 꽃동네 단상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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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천 [simwon] 쪽지 캡슐

2003-07-10 ㅣ No.54472

성당넷 (http://www.sungdang.net) 작은이의 글 펌....

 

노혜경씨의 글을 읽고.

 

아웃사이더 12호에서 노혜경 시인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홈페이지에도 문의의 글을 올려놓았습니다만, ’지식인’이라는 꼬리표가 제 뒤에 달려있지 않은 한, 그 문의의 글이 노혜경씨에게 별로 ’문의’가 될 것 같지도 않고 진지한 답변이 의무적으로 매달려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이곳 제게 주어진 작은 게시판 한 구석에 끄적거리고 있습니다.

 

약력과 홈페이지에 따르면 노혜경씨는 ’詩人’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제가 고등학생일 때 국어선생님이 그러셨었습니다. 詩人은 시대의 아픔을 제일 먼저 느끼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늘 힘들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그분도 시인이셨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시인이 시대의 아픔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고 해서, 그 비명으로 모든 책무가 다 끝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과 무관하게 스스로 시대의 아픔으로 정의하고 혼자 비명을 꽥꽥 질러댄다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비명이 동시대인들의 삶의 현실과 전혀 무관한 괴성에 지나지 않는다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아웃사이더 12호 맨 뒷편에 노혜경씨의 글이 실려있습니다. 제목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입니다.

좋은 말이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 제 통신 닉네임도 ’작은이’인데 실제로 ’작은’이라는 꾸밈말은 어떤 단어 앞에 놓여져도 그 단어들을 모두 아름답게 들리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작은 지렁이, 작은 파리, 작은 누더기, 작은 아픔.....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바티칸 대성당을 보고 턱이 빠지도록 입을 딱 벌리거나 그 위용에 질려버리는 것에 반해서 작은 것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도 않으면서 아름다울 수 있으니 참 좋습니다. 그래서 아기옷들은 유치한 색을 써도 다 예쁘고, 작은 신발은 다 귀엽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문제는 작은 것은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작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작은 것이 아름다우니 무조건 작게 만들어라’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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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들을 위해 노혜경씨의 글 전문을 올리고 싶지만 능력이 안 되는 탓에 일부분만 인용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궁금하신 분들이 서점에서 아웃사이더 12호를 사시게 된다면 판매부수 신장에도 제가 도움을 드리는 것이니 글 중에 기분 나쁜 부분이 있더라도 조금은 너그럽게 읽어주시겠지요.

 

’사회복지의 일반적 흐름에 비추어 보아도 꽃동네는 시대착오적인 시설이다. 우선 격리된 위치가 그러하고, 시설의 규모가 그러하다’

’복지시설은 규모가 작고 시민들의 일상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

’복지에 대한 고민을 우리보다 앞서 했던 나라들의 시설규모가 점차 작아지고 심지어 가정의 수준으로 조직되고 있는 것은...(중략)... 복지개념이 모든 사람의 섬김받을 권리라는 개념으로 대체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다’

 

참 멋진 말입니다. 정말 멋진 말입니다. 황홀하더군요, 읽으면서. 그런데 그 멋진 ’이상적인 복지시설’에 대한 말을 읽으면서 문득 ’기어(綺語)’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은 너무 무례한 일일까요? 기어(綺語), 비단 같은 말. 아름답고 번지르르하고 듣기는 참 좋은데 실제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는 말을 일컫는 것입니다. 들으시면 언짢으실까요?

 

우선 꽃동네의 격리성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람들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고 한 주장을 들으니 생각나는 장소가 있습니다. 지하철 서울역과 을지로 3가 지하철역입니다. 거기에 가면 아주 가까이에서 술에 취해 하루 하루를 연명해나가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노숙자’라고 부르지요. 아마 발 앞에서 10센티미터도 안 떨어져 쓰러져 계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아주 가까이에 있지요. 원한다면 바로 옆에 살을 부비며 앉을 수도 있습니다. 꽃동네보다 훨씬 이상적이지요? 적어도 ’위치적 격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서울역 지하보도나 을지로 3가 지하상가 골목이 꽃동네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습니다.

하지만 위치가 가깝다고 사람들 사이에 가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하철 노숙자들이나 계단에 엎드려 구걸하시는 분들은 꽃동네보다 더 우리에게 물리적인 위치가 가깝지만 그렇다고 그분들을 우리가 우리 자신과 동일하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꽃동네가 더 가까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 글 중에서 ’깊은 산속에 거대하게 조성된 꽃동네는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에겐 보통 사람들의 삶으로부터의 조직적인 격리에 다름 아니’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노혜경씨는 그분들이 꽃동네에 들어가기 전에는 격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것일까요?

그러면서도 글 앞부분에 ’나환자 재활촌’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계란을 팔러 다니던 서양 신부님의 이미지와 함께 아주 아름답고 좋은 기억으로 말이지요. 그 재활촌이 동네 한복판에 위치했었다는 말씀은 없는 것으로 보니 그 역시 ’격리’되어 있었을텐데 그에 대한 비판은 안 하시더군요.

 

시설의 규모에 대해서도 비판 글 내용이 있습니다만, 혹시 엠비씨의 ’일요일 일요일밤에’에서 방송하던 ’러브하우스’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부부가 여러 노인들을 모시고 좁은 집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분들의 삶터를 넓고 아름답게 고쳐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분들이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조금 더 넓은 집에서 편하게 모시고 싶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분들께도 직접 찾아가셔서 말씀하시지 그러시냐고 묻고 싶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아니면 인도의 ’사랑의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여러 시설들 앞에 가셔서 시위라도 해야겠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말입니다.

 

복지시설은 규모가 작고 시민들의 일상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그냥 ’원칙적인 선언’이라고 이해하겠습니다. 원칙적 선언의 가장 큰 단점은 당연한 소리로 들리는데 현실성은 거의 0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은 나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외침이 무력한 것은, 지극히 원칙적이기는 한데 현실적으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방편들이 필요하고 그 방편을 통해 원칙이 슬그머니 왜곡되기가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복지시설에 대한 노혜경씨의 발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상적인 복지시설이라면 봉사자 1명에 복지대상자 3명 정도의 ’미니사이즈’의 거주시설일 겁니다. 그렇다면 전국에 그런 수용이 필요한 사람이 10만명이라고만 잡아도 봉사자는 약 3만5천명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거주할 집도 그런 숫자로 필요하겠군요. 그러니 일단은 꽃동네를 해체해 놓고 3만 5천채의 집이 구해질 때까지 그분들을 우리의 ’일상 가까운 곳’에 내보낼까요? 이런 논리가 너무 심하다면 조금 규모를 늘려서 전국 각지에서 시(市)인 곳에 각 구마다 하나씩 시설을 지어놓고 그분들을 모시면 어떨까요? 아마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시위가 벌어질 겁니다.

 

혹시 노혜경씨 댁 근처에 장애인 학교, 노숙자 보호시설, 알콜중독자와 치매노인 거주시설이 들어선다면 노혜경씨는 박수를 치며 환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지역에서 반대를 받은 그런 시설들을 자신의 집 주변에 들여오기 위해 애를 쓰고 계신 분이신지도 모르겠습니다.(적어도 저런 선언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면 그런 활동 정도는 당연히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충분히 존경해드리겠습니다만 그것을 전체로 적용시키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은 아마 그분 스스로도 잘 아실 겁니다.

 

복지시설에 대해 고민했던 서구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짚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을 따라가기 위한 조건은 왜 말씀을 안 하셨을까요?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은 국민소득과 살인적인 고율의 세금 말입니다. 제가 알기로 ’지식인’ 부류의 고소득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절반에 가까운 액수가 세금으로 징수될 정도로 높은 세금이 부과됩니다. 꽃동네를 해산시키고 50%의 세금을 감당하시면서 바로 집 아래에 알콜중독자와 치매 노인, 그리고 지체장애인들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거라고 그분도 스스로 믿지는 않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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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단체활동을 하다보면 가끔 황당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대부분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면서 비판을 하기 때문에 욕을 먹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이 비난받는 제1의 원인은 바로 ’그래서 도대체 어쩌란 말이야?’라고 물으면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노혜경씨의 글을 읽으면서도 매 행간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라고 반복해서 물어도 대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그 글이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늘 들어오던 막연한 이상주의적인 명제를 제시하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맡기고, 교회는 교회의 일을 하라’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이, 굶주린 이에게 밥을 주는 일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선언하며 ’꽃동네처럼 거대 시설에 수용되는 일 자체가 인권침해라고 하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이 어느 부류 안에서 확대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마이뉴스의 독자게시판이나 굿뉴스 자유게시판에서도 ’꽃동네 수용은 인권침해다. 그러므로 꽃동네는 거대한 인권유린지역이다’라는 논리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적어도 그런 단정을 하려면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 어떤 조사를 통해 드러났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매일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뜻’을 언급하며 사람들을 가지고 놀았던 행태를 답습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런 개인적인 감상이나 개인적 호오(好惡)를 이유로 현재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인 한 삶의 터전을 간단히 축소하라는 주장은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가가 할 일이라 종교가 손을 떼고 난 뒤 일어날, 인권 침해가 아닌 ’생존권’의 침해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은 말입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덧붙이겠습니다. 노혜경씨는 아웃사이더 12호라는 공식적인 잡지의 글을 통해 "그간의 드러난 공금유용, 정치권력과의 유착, 시설의 사유화 같은 문제 말고도 원생들에 대한 인권유린의 혐의를 지울 수 없는 여러 가지 사례들’이라는 표현과 함께 "각종 부패의 보고는, 꽃동네가 알려진 바와는 달리 안식처가 아니었다’라는 단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상식 수준을 뛰어넘는 장기기증자의 수라든가, 환자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켰다는 혐의 등등에 대한 보다 철저한 조사와 감독이 필요하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간에 드러난’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서 저나 다른 분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공금 유용이나 시설의 사유화 등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역시 진보적 지식인이신 노혜경씨는 저나 검찰보다 정보력이 확실하시군요.(글을 쓰고 있는 현재 검찰에서는 농지법과 업무방해혐의를 물고 늘어지는데 그분들은 노혜경씨의 글을 읽지 못한 것일까요? 노혜경씨의 글을 복사해서 검찰에 보내줘야 할까요?)

 

진보적 지식인답게 그런 정보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공유하시는 것은 어떨지 그분께 직접 여쭤보고 싶어집니다. 설마 그냥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들을 ’그간에 드러난’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들 중에는 멀쩡한 사람을 ’여러 명 때려죽인 살인마’로 만든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꽃동네의 인권침해에 대해, 그리고 계속 원론적인 이야기를 주장하신 분이시니 설마 법원에서 판결받기 전에는 무죄라는 지극히 원시적일 정도의 기본적인 ’원칙’을 무시하지는 않은 이야기라고 믿고 싶습니다.

 

좀 길어졌군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두 가지입니다. 원칙도 중요하지만 그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결코 대안 없이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개인적인 호오(好惡)를 근거로 해서 아무런 근거 없이 단죄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 별 것 아닌데도 지키기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특히 타인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몇몇 지식자본가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원칙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그 한편에서는 말하기보다는 그 원칙이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현실적인 대안을 만들어 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이야기할까요?

음.... 저도 말만 하지 말고, 꽃동네가 미니사이즈가 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생각해보는 데 좀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겠습니다. 아니면 상품 걸고 공모라도 해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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