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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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本性)을 깨닫는 신앙인과 본능에 더 충실하는 종교인(무신론자 포함) 묵상 -양남하 시몬 편-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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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남하 [simonyang] 쪽지 캡슐

2019-05-26 ㅣ No.217990


본성(本性)을 깨닫는 신앙인과 본능에 더 충실하는 종교인(무신론자 포함) 묵상-36

-副題;부활신앙의 뿌리, 본성각(本性覺)에 대한 고찰-

 양남하 시몬

 

Ⅰ.들어가는 말: 병아리와 독수리 우화 


인디언들은 성인식날 용맹성을 증명하기 위해 독수리 둥지에서 독수리 알을 꺼내 와야 했답니다. 독수리 둥지에서 꺼내 온 알을 누군가가 닭장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독수리알도 다른 알과 같이 부화하여 세상에 나왔답니다. 큰 부리와 발, 커다란 날개를 가진 독수리 새끼는 같이 나온 병아리들과 생김새부터 달랐습니다. ‘내가 낳았지만 너무 못 생겼다. 불쌍한 녀석’ 어미닭은 늘 놀림 받으며 살아갈 새끼가 안쓰러웠습니다. 어미닭이 앞장서서 걸으면 병아리들이 한 줄로 서서 삐약거리며 따라갑니다. 그 속에 크고 못생긴 새끼 독수리도 물 한모금 먹고 하늘 쳐다보고. 흙 속의 지렁이를 파먹으며 병아리처럼 생활했습니다. 독수리의 큰 부리는 흙 속의 지렁이를 파먹기에 불편했습니다. 어미닭은 흙 속의 지렁이를 파서 새끼 독수리에게 먹여주곤 하였습니다.

 

A 새끼 독수리는 부리를 갈아 병아리 부리처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친구들의 놀림이 싫어 자신의 멋진 깃털을 자기의 입으로 뽑습니다. 깃털이 뽑히는 아픔을 견디며 뽑고 또 뽑았습니다어느 날, 새끼 독수리는 물 한모금 먹고 하늘 쳐다보다 하늘 위를 멋지게 날고 있는 새를 보았습니다옆에 있는 병아리에게 물었습니다. “하늘 위를 멋지게 날고 있는 저 새를 아니?” 병아리가 말했습니다. “저 새는 새들의 왕 독수리야. 너 같은 것은 꿈도 꿀 수도 쳐다볼 수도 없는 새지.” A새끼 독수리는 병아리로 이럭저럭 그냥 살다가 죽었습니다.

하지만어느날 자기가 병아리라고 생각하며 병아리와 똑같이 행동을 해오던 B 새끼 독수리  큰 독수리 하나가 닭장 상봉을 날아 멋지게 맴돌다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보고 있던 이 독수리 새끼는 '나하고 정말 닮았다. 왜 병아리들이 나하고 다른 모습이었나 했는데, 저 어마어마한 새는 나하고 닮았네!'    B새끼 독수리는 자기도 본래 독수리였음을 깨닫고는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갔습니다.

 

Ⅱ.신앙의 문제는 시선(視線)의 문제

 

 예수를 믿는 신앙인들은 자기 본래의 본성(註1)을 깨달은 독수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냥 본능에만 충실한 병아리가 아닙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우선 시선(視線)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시선이란 우리 눈이 주목(注目)하는 것, 즉 우리 눈길이 가는 방향입니다. 우리 인생은 무엇을 보며, 누구를 보며,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차원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 마음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 생각을 자극하고, 우리 감정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시선은 집착을 낳습니다. 집착이란 하느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갈망하고 쟁취하는 것이 곧 성공이요 행복의 길이라는 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신앙인의 시선은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갑니다.   

 

Ⅲ.신앙인은 창조주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본성을 깨닫는 것(=本性覺)


 그러므로 시선 관리가 신앙 관리입니다. 시선 관리가 인생 관리입니다. 이런 삶을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아버지를 느낄 수 있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요한17, 24) 아버지 하느님의 참모습을 선교 하시다가 하느님으로 복귀(요한16,28)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은 삶을 살도록, 성령님께서  도와 주십니다[(욥33:4) (로마 8:14)].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시선을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돌리셨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을 최상의 기쁨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이 갈고 닦아야할 본성각(本性覺)은 무엇일까요?  대부분  "사랑 또는 자비"라고 말씀하시겠지요. 하지만 이는 가르침의 결과이지 "본성각"과는 차원이 다른 생각입니다.  

  

     본성각이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기에(창세1,27), 우리 인간의 본성은 원래부터 하느님의 얼굴과 심성을 지니고 있는 무한한 잠재능력의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요한 10;35)"이라 하신 것입니다. 더 부언하면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당신 대화의 상대자로 삼은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깨달아 있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이 말씀은, 성경이나 이 지구상에 있는 다른 경전(經典)의 (이 '本性覺'을 뺀) 나머지 모든 성구를 모은 것보다 더 중요할 만큼, 그 뜻이 대단하기에 이것을 깨달은 분을 '현인(賢人) 또는 붓다' 라 높여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분리되기 전부터 존재하신(요한17, 24)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셨다가 본향으로 부활하기 전에 베드로의 믿음에 천국열쇠를 맡기시게한 반석(盤石)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님 마음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본성은 신성이며나의 하느님 아버지의 집이며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본성은 대우주의 생명과 일체입니다

   

Ⅳ.깨달음을 방해하는 것들과 깨달음의 지성소(至聖所)

  

그렇다면, 깨달음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요?  바로 깨달음의 정도에서 온다는 것이 정설일 듯 싶습니다왜냐하면, 깨달음의 정도는 지금까지 받아온 교육이나 환경· 가족관계· 종교· 그간 현실체험을 토대로 인식된 신념 등에 따라 다양한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다음과 같은 사실을 진지하게 성찰해야만 장애해소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우리의 생각은 불안정하고 왜곡되어 있지만 지금까지 그것을 진실인양 믿어 왔다.그리고 그 생각은 행동을 통제해왔다.

우리는 겉으로는 변화를 원한다면서도 실상은 싫어한다. 그래서 핑계거리를 찾으며 끊임없이 변명을 일삼아온 편이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담을 높게 쌓는다. 만약 이와 배치되는 것일 때는 애써 피하거나 저항하며 필요하다면 강제추방도 서슴치 않았다.  

우리는 무의식과 중추신경계에 잘못된 반응을 축척해 두고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기존에 습득했던 양식대로 행동하도록 부추긴다. , 어떤 특정한 느낌과 행동에 따라 반응하도록 조건화가 된 편이다.

 

깊이 있는 신앙인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내면을 가꿉니다. 진정한 실력은 내면을 가꾸는 힘입니다. 우리는 이런 힘을 내공(內功)이라고 말합니다내공을 쌓은 사람은 역경의 순간에,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련의 때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꿀 줄 압니다. 나무의 생명은 뿌리에 있습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뿌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뿌리의 깊이와 넓이가 나무의 높이와 넓이를 결정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분은 스스로 깨달음의 지성소(註2)를 갈고 닦고 기름치고 조이는 정성을 다하는 건강한 신앙인입니다. 본성의 깨달음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본성각 묵상(註3) 건강한 기도(註4)를 간절하게 드리는 비상(飛上)하는 신앙인이십니다.

 

 

Ⅴ, 맺음말: 나는 신앙인인가? 종교인인가?

 

인간은 모두 하느님(=창조주=조물주) 안에 삽니다(창세1,27). 신앙인은 그 사실을 자각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느님보다 더 사랑 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 대상은 내가 될 수도 있고, 물질· 권력 또는 모양(模樣)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대부분 하느님의 모상을 잃어 버렸을 때 발생될 것입니이런 관점에서 "신앙인은 신앙의 구심점이 하느님께 있는 사람이고, 종교인은 신앙의 구심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사람이다."라고 귀결할 수 있을 것이므로, 다음과 같이 신앙인과 종교인의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AW 토저박사(註5)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1.신앙인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지만, 종교인은 예배를 방청만 할 뿐입니다.

2.신앙인은 자신을 회개하지만, 종교인은 다른 사람을 항상 비판합니다.

3.신앙인은 시간과 더불어 신앙 인격이 깊어지지만, 종교인은 자기의 성질이 더욱 깊어질 뿐입니다.

4.신앙인은 주님의 뜻을 추구하지만, 종교인은 자신의 뜻을 추구합니다.

5.신앙인은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만, 종교인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6.신앙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지만, 종교인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합니다.

7.신앙인은 예수님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지만, 종교인은 얘수님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8.신앙인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종교인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9.신앙인은 사람을 치유하지만, 종교인은 사람을 정죄합니다.

10.신앙인은 영적인 설렘이 있지만, 종교인은 영적인 메마름이 있을 뿐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갑니까포장된 자신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기에, "왜 스님이 쓴 베스트셀러는 여러 권이 나왔는데, 목사나 신부는 베스트셀러 하나 못 내는가?" 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함게 고민해 봅니다.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생을 가르치셨지 교리를 가르치신 적이 없는데도, 목사나 신부가 책을(특히 인문학 책) 많이 읽지도 깊이 소화하지 못 한채 교리와 성경문구에 매달린 설교·강론을 해서 그렇다"고 갈파해주신 김형석 교수의 TV 강연내용이 스멀거리는 주일아침입니다. 주님은총 충만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아멘.

(2019.5.26 퇴고. 忍冬)

 


1)미국 의사 맥두걸은 폐병환자 5명의 사전 동의하에 실험결과 유체이탈후 공통된 무개는 21g줄었으나, 동물을 대표한 개는 무게에 변동이 없었음.


註2)우리는 저마다 세상적인 것에 대한 탐욕과 집착 불안과 후회 등등으로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갑니다. 이처럼 저마다 근심걱정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지성소를 갖지 못하며, 혹 갖고 있다 해도 기둥도 뽑히고 축대도 무너진 만신창이의 모습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지성소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도피성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살인자라도 이곳에 들어가면 잡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거기 들어가면 못 잡는다.'는 말은 인간이 다 지배할 수 없는 곳이 있어야 이 세상이 돌아간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도, 핵무기도 뚫을 수 없는 지성소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늘 주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신성한 말씀을 읽고 제대로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註3)자신의 고민과 어두움 및 부조화는 자신의 본성 속에 살아서 역사 하시는 절대적인 창조주이신 아버지께 맡기고 이 중심자각(中心自覺)만 알아차리면 육체적인 의식은 삶을 조금도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마치 구름 밑에 비, 눈보라, 서리, 천둥, 번개, 태풍, 쓰나미 등이 있을지라도 어두운 마음인 부정적인 생각의 판단, 비판, 불안함, 우울, 슬픔 등이 있을지라도 그 위에는 밝은 태양이 있으면서 언제나 온 우주에 밝은 사랑의 ''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註4)기도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 계시는 하느님은 사람들이 물질을 기도의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 계시는 하느님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는 욕심과 집착을 제물로 바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남을 공격하는 마음,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 화내고 괴로워하는 마음, 비리나 단점과 같은 허물을 비판하려는 마음, 의심, 두려움, 빈곤과 실패, 자신감 부족 등 조화롭지 못한 마음을 기도의 제물로 바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따라서 자신의 의지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하라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처럼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註5)A.W.토저(1897~1963)는정규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성령님께 배운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듣는 사람입니다그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서만 심령을 부흥시키는 설교자였으며,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깊숙이 들여다 보고 인긴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 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했었습니다. 그는 합리적 이성만을 앞세워 입술만의 개혁을 주장한 자가 아니라, 깊이 있는 말씀이해와 박식한 신학이해를 눈물의 기도로 반죽하여 개혁의 메시지를 전할 때에 크리스천들의 가슴을 치게 만들었던 비상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원본 주소: http://cafe.daum.net/kfb67/NPRR/40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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