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자유게시판

비겁한 저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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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vero] 쪽지 캡슐

2000-02-25 ㅣ No.8871

박신부님의 49제가 끝났습니다.

저는 삼각지 본당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입니다.

박신부님 계실 때 교사를 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박신부님에 관한 글들이 게시판을 가득 메울 때 저는 그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감히 뭐라고 말씀 드릴 염치도 없었거니와 제가 말을 한다는 것이 옳은 일인지 자신이 없었거든요..

박신부님께서 상처를 입으시는 그 과정을 너무나 똑똑히 옆에서 지켜 봤기에 오히려 할 말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저희 삼각지에 쏠려 있을 때에도 ’억울하다. 모든 신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할 수 없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동료 교사들의 분노와 슬픔도 말할 수 없이 큽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희는 침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구에서 주일학교 교사 실무자 회합에 가면 사람들이 의혹에 가득 찬 눈길로 쳐다 보며 묻습니다. 너무나 당혹스럽고 난감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중고등부 교감도 그러하다 하더군요. 하지만 그래도 저희는 삼각지라는 공동체에 저희가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받아 마땅한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3일 용인에 갔었습니다. 동료 교사들과 함께요..

여러분들께서 느끼시는 것과 똑같은 슬픔을 저희도 느꼈습니다.

신부님의 민무덤 앞에서 절을 하고 술을 올리고.. 그리고 울었습니다.

 

이런 소용둘이의 한가운데 제가 서있다는 것이 치욕스럽기조차 합니다. 왜 하필 내가 삼각지 본당에 다니는 신자란 말인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는 것이 구차합니다.

 

자유게시판에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신앙을 걸고 맹세합니다.. 박신부님은 절대적으로 옳으셨습니다. 신부님의 방법에 다소 문제가 있었을지 몰라도 신부님은 제가 27년간 살아오면서 봤던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용기있고 강직하고 꺠끗하고 순수한 분이셨습니다.

 

사실 저는 교사를 하면서 신부님과 이야기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저희에게 많은 정을 주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신부님과의 친분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신부님께서 저희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이신 것도 아니고 저희를 옆에 가까이 두려고 한 것도 아니셨으니까요.

교사들과 술자리를 한 것도 삼각지에 일년 동안 계시면서 단 한번 뿐이었고 평소에도 정다운 말씀 한 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그 때에는 그렇게 서운했었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부님께서 갖은 수모를 다 당하시는 것을 그저 옆에서 쳐다보는 것 밖에 없었거든요....

 

후... 정의는 그렇게 꺾입디다... 횡포와 무지와 교만과 탐욕 앞에서 그렇게 꺾입디다...

 

마음 속으로 신부님.. 저희 교사들을 그렇게 못 믿으십니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어린이 미사 떄 한 어린이가 신자들의 기도 시간에 나와 기도를 하더군요.

박신부님께서 사고로 돌아가셨대요. 하늘나라로 가실 수 있게 해 주세요...

오르간 반주를 하고 있던 저는 그 순간부터 손이 떨려 미사 시간 내내 실수만 했습니다.

 

박신부님의 죽음을 전화로 들었을 때...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아무 것도 모르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용인 성직자 묘지의 잔디도 입히지 않은 박신부님의 묘를 보았을 때...

그 느낌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삼각지를 향해 돌을 던지십시오.. 저희는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

행동하지 못했던 비겁한 자들이 기꺼이 감내해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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