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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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선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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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2-07-15 ㅣ No.36182

얼마 전이었던가..

제가 거금(? 나름대로는 거금이었습니다.)을 들여 CD라이터를 장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CD라이터..

각종 CD를 복사할 수 있는 컴퓨터 장치이죠...

이걸 사놓고 흐뭇한 마음에 허구헌날 쓸어보고 돌려보고..

제가 가지고 있는 음악 CD들을 편집해서 애창곡 메들리 앨범을 만들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연락한지 오래된 2명의 성당 후배녀석들이 떠올랐습니다.

오랫동안 연락이 뜸했는데.. 옳지.. 근사한 선물이나 하나씩 안겨야겠다..

저는 이 녀석들의 구미에 맞을 만한 음악을 편집해서 복사한 다음 곧바로 메일을 날렸습니다.

"내 너희들에게 긴한 용무가 있다. 이 메일 받은 즉시 연락하거라"

 

그러자 바로 다음 날 답메일이 왔더군요.

오랜만에 연락됐다며 반색하는 이 녀석들..

그러나 둘 다 무슨 용건인지 무척 궁금해 하는 기색이 완연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문득 생각나면 술이나 한잔 하자며 연락을 때렸지, 긴한 용무 운운하며 거창하게 떠들어댄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 메일을 받고.. 전 역시 예의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답메일을 보냈죠.

"다름이 아니라.. 요즘 부쩍 가세가 기울어 내 직업전선에 투신하게 되었다. 일명 다단계 판매조직! 옥돌침대, 정수기, 자석 목걸이... 안 파는 것 없으니 속히 연락하기 바란다."

그러자 곧장 연락이 오더군요. 한가한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면서요.

 

그래서 저는 약속한 날..

복사한 CD들을 가방에 고이 넣어 약속 장소로 나갔습니다.

녀석들..

다소 경직된 표정을 지으며 기다리고 있더군요.

 

저는 녀석들을 이끌고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시침을 뚝 떼고 계속 엉뚱한 이야기들만 했죠.

그러자.. 녀석들 조금씩 초조해하는 기색이었습니다.

- 누나.. 할 말 있다며? 빨리 해봐요.

- 뭘... 천천히 하지, 뭐.. 시간도 많은데..

- 그래도 먼저 해요..

- 아참.. 말도 많네. 이따가 한다니까..

 

전 그 녀석들의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무시한 채. 또 다시 천연덕스럽게 다른 이야기들만 한가롭게 떠들었습니다..

뭐라고 말하고 싶어서 죽곘어 하는 녀석들을 표정을 훔쳐보며 속으로 킬킬거렸지요.

그리 오래지 않아..

그 중 한 녀석이 못참겠다는 듯이 정색을 하고 비장하게 말하더군요.

- 누나! 일단 카탈로그부터 내놔봐. 뭔데..? 대체 뭐뭐 있는데?

 

순간.. 전 와락 웃음부터 터뜨렸습니다.

- 와하하.. 너희 진짜 순진하다.. 대체 나이가 몇살이냐.. 내가 아무렴, 연락 뜸하다가 뜬금없이 너희한테 물건 팔아보겠다고 전화했겠냐.

그리고 곧바로 가방에서 CD를 꺼내서 녀석들에게 던져줬습니다.

- 옛다! 선물이나 받아라. 나 CD라이터 장만했어. 그거 자랑하려고 불러냈다.

 

그제서야 녀석들 표정이 환하게 풀리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

- 아으... 뭐야.. 우리 둘이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아? 누나 성격에 그런 일을 할 정도면 집안형편이 어려워져도 단단히 어려워졌다는 건데.. 이거 대체 뭘 사줘야 하나.. 정말 옥돌침대같은 거면 어떡하나 했다고.. 우리 수입도 뻔한데 말야..

 

한바탕 웃고 이 소동은 일단락됐지만..

전 참으로 마음이 넉넉해짐을 느꼈습니다.

이 녀석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을 했죠.

아마 저 같으면.. 약속 장소에 아예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바쁘다거나 일이 생겼다거나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요..

 

 

....................

 

제 또 다른 고등학교 동창과 전화를 하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친구가 그러더군요.. (이 친구는 직장인이랍니다.)

- 고등학교 때 만난 사람들을 빼놓고는.. 그 후에 만난 사람들은 늘 나를 이용하려고만 들어. 잘 지내다가도 결국은 나한테 바라는 것이 있더라고.

그러면서 제게 묻더군요.

- 넌 안 그러니?

 

제가 대답했습니다.

 - 글쎄.. 내가 별 이용가치가 없어서 그런가... 난 별로 그런 사람 못 만났는데.. 아마 내가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에 속해보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난 직장생활을 해 본적이 없으니까..

그러자 친구가 하는 말..

- 아니.. 꼭 직장이 아니더라도 성인이 된 다음에 만난 사람들은 다 그렇더라구.. 너도 성당에서 만난 사람들 있잖아. 그 사람들도 안 그래?

 

동의를 구하는 듯한 친구의 목소리였지만 전 주저없이 말했습니다.

저도 놀랄 정도였지요.

- 아니! 나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가진 적은 한번도 없었어. 뭐.. 감정적인 문제로 트러블이 있었을 때는 간혹 있었지만..

 

근데..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제 성당 후배 두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고맙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저없이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라고 말할 수 있다니..

그리고 제가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들이 존재한다니..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주위 사람을 이용해 먹으면 먹었지(?) 제 주위의 사람들이 절 이용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그 뿐이 아닙니다.

종종 어려운 일을 겪어 내고 나면..

나중에 친한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그래.. 잘 이겨냈구나.. 너를 생각하면서 그 동안 많이 기도했어. 미사도 드리고.. 묵주기도도 하고..

 

이럴 때마다 정말 눈물이 핑 돕니다.

날 위해 기도해주는 숨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를 떠올리면 세상이 참 좋은 곳이구나.. 새삼 느끼게 되지요.

 

전 이토록 좋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잘나서 고통을 이겨낸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기도 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요.

변변치 않은 제가 올리는 기도가 하늘에 닿지 않더라도..

저를 생각하며 기도해주는 주위 사람들을 봐서라도 주님께선 늘 저를 돌보십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그 기도를 들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람 없이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모자란 제게.. 도저히 혼자서는 제대로 살아갈 것 같지 않은 미숙한 제게..

주님은 꽉 차고 영글은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덕에.. 그 덕에 저는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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