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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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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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3-02-26 ㅣ No.48725

작년 봄의 일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뺑소니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소식을 듣고 가슴이 벌벌 떨리는 것을 누르며 병원으로 달려갔지요.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보니 정말 눈 앞이 깜깜하더군요.

얼굴이 온통 부어 윤곽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연세도 있으시고 심하게 다치셔서..

가족들은 행여나 큰 일을 치르게 되지는 않을까 애가 탔습니다.

저 역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하더군요.

겨우 이제 한숨 돌렸다 싶었던 가족들은..

아버지께서 정밀검사를 받고 응급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지고 나서..

또 다른 불안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정밀검사 결과 뇌손상이 있으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나서..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셨습니다.

 

그토록 경우 바르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돼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얼굴 뼈가 몹시 상해서 붙여놓은 거즈를 답답하다고 다 떼내 버리시고..

링거 바늘마저 아프다고 뽑아버리셨습니다.

밤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시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셨지요.

움직이시면 안된다고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억지로 몸을 일으키시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시기 일쑤였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겁이 많이 났습니다.

가족들의 마음 고생도 고생이지만..

같은 병실에 있던 다른 환자들의 원성도 자자했거든요.

- 이보세요, 할아버지. 여기가 할아버지만 있는 병실이예요?

- 나이도 드실만큼 드신 분이 대체..

- 하루이틀도 아니고..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네.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들을 만한 행동은 한번도 해보지 않으신 분이..

어쩌면 그렇게 막무가내이신지..

하도 크게 소리를 지르셔서..

간호사가 몇번씩 달려왔습니다.

다른 환자들도 잠을 설치기 일쑤였죠.

- 아빠. 다른 환자들 다 깨겠어요. 조금만 참고 주무시도록 해보세요.

밤새 소리 죽여 아버지를 설득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런 아버지 모습에 속이 상해서 전 그저 눈물만 흘렸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저희 엄마도 마찬가지셨지요.

왜 갑자기 아버지께서 그런 행동을 보이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코 그러실 분이 아니신데 말이죠.

 

같은 병실의 환자와 보호자들은..

저희 가족을 보고 그러더군요.

어쩜 그렇게 가족들이 하나같이 지극정성이냐고.. 누구 하나 짜증 한번 안 내고 자리를 뜰 생각을 안 한다고..

 

아마 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 봅니다.

괴팍하고 고약하고 참을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는 노인을 기특하게 보살피는 훌륭한 가족..

 

하지만..

저희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셨거든요.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무경우한 일을 보면 누구보다 먼저 이런 말씀을 하셨던 분이셨으니까요.

 

전 오히려 같은 병실의 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오해를 받는다는 것이 너무 억울했거든요.

"평소에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아세요? 댁들은 우리 아버지 상태라면 별 수 있을 것 같냐구요. 원래 이상한 분이 아니라 다치셔서 그런 거라구요."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기적이라 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셨습니다.

의사도 놀랄 정도로요.

 

이제 아버지는 많이 나아지셔서..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으십니다.

성품이나 행동도 원래의 아버지로 돌아오셨죠.

 

하지만.. 전 가끔 그 때를 생각하며 많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전혀 아버지답지 않아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던 당시를 돌이켜보면서요..

사람이 크게 다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구나..

그래도 우리 아빠임에는 분명한데..

같은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사람..

이제까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사람..

육신은 그대로되 정신이 변한 사람..

 

당시에 저희 엄마가 그러셨습니다.

- 어떻게 변한다 해도.. 어떤 모습이 된다고 해도.. 그래도 사랑하는 것이 가족이란다..

 

그렇게 아찔한 경험을 한번 하고 나서..

전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요.

 

 

................................................

 

 

대구에서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지.. 어느덧 일주일이 됐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없이 희생된 많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슬퍼합니다.

 

그 가운데는..

방화범에게 쏟아지는 저주와 악담도 있습니다..

그런 말을 보고 들으며..

저는 어쩔 수 없이..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짐을 느낍니다.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많은 사람들 뿐 아니라..

그 방화범을 위해서도 기도한다고 말한다면..

제가 너무 위험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세상의 모든 분들이 제게..

그토록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킨 그 방화범에 대해서는 용서와 자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셔도..

제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런 거창한 말을 굳이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위해..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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