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을 사랑함에
지난 1월에 열흘이 넘는 성지 순례를 다녀오고 벅차오르는 가슴을 어찌할 수 없어 생전 처음으로 인터넷에 이렇게 시원찮은 글을 올리면서 교우님들이 참 너그럽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잡문도 받아주시고 더러는 격려해 주신 분도 있었으니까요. 2월 부터 시작했는데 벌써 4월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시작 할 때였지요, 녹지 않은 눈이 두어 무대기 쌓여있는 산을 오르던 주말이었어요, 예술의 전당 뒤편에 수줍게 자리한 연못에 말입니다. 오늘에서야 결판 내려는 듯 두꺼운 얼음이 덮힌 연못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봄비는 참 잔인하게도 "방~빼, 방~빼!" 하며 떠나는 계절의 뒷꼭지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눈에는 평화롭게 보이는 계절의 변화도 이렇게 치열한 애증(愛憎)이 엇갈리는데 인간사야 오죽하겠습니까?
이즈음의 저는 자꾸만 커지는 세상에 비해 나는 끝없이 작아지고, 밤에 문득 눈을 뜨면 앞으로 살아내야 할 삶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십여 년이 넘게 다니던 직장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난 뒤로 세상을 다 잃어버린 듯 참 많이도 힘 들어했습니다.
'....지금 우리 조직이 처한 위기는 과감한 구조조정의 결단이 필요한 때라는 걸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살을 베어내는 아픔을 견디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희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장님 지시로 검토해 본 결과, 우리 조직의 위기 상황이 온다면 최소한 18개월은 버틸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참으로 잔인한 분석이었어요. 그 해 4월에 소집된 최고 간부회의에서 기획실장이 보고한 "우리 회사의 위기관리 대응 방안" 이라는 심상찮은 보고를 들으면서 사실 위기를 실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명예퇴직을 시키면서 몇 개월치의 보상금을 줄까 노조와 싱갱이를 할 때 써먹으려 위기를 과장했거니 했을 뿐 우리 모두는 위기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18개월은 커녕 7개월이 지나고 보니 덜컥 부도가 난 게 아니겠습니까. 경쟁사에 비해 영업력과 재무내용이 상당히 양호하다고 경영대상까지 수상한 우리 회사가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최악의 상황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요....물론 IMF 외환위기가 찾아올 줄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변화에 대해 불감증이 걸려도 단단히 걸린 탓이지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변화를 거부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아주 명료하게 보여주는 사례이지요.
직장도 잃고 뻔하게 눈을 뜨고 소경이 된 기분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내 꿈, 좀더 보람 있는 삶을 지향했던 내 희망은 가슴에 묻어둔 채 삶의 무게를 업고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시작 했던 것이 그때였습니다. 어지러워 주저 앉고 싶은 가혹한 시절이 닥친 게지요.
그러나 어쩝니까, 세상을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요. 주섬주섬 일어서야 할 때가 아닌가요? 너무 오랫동안 주저 앉아서 다리가 풀렸다면 맨손체조라도 하면서 치열한 삶의 전쟁이 벌어지는 이 세상으로 한 발짝 걸어나가렵니다.
어쩌다 여기 왔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들고 어둠 속에서 눈물짓는 세상의 못난이들을 향해 / "지난 일은 돌아보지 마십시오 잘못은 한번으로 족합니다./ 그 아픔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가던 길 멈추고 서 있지 마십시오./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삶이고/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며/ 지고가야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손짓하며 길을 떠나야겠습니다. 박노해 시인이 일러준 대로 말입니다. 이제 자아탐색의 치열한 성찰을 끝내고 세상을, 그리고 남을 조금씩 이해하고 껴안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과거는 이미 떠나 버렸고 미래는 "그분" 손 안에 있으니 오늘은 그저 길을 떠나야 겠지요.
엘리어트가 그랬지요?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어렸을 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의 운율이 멋 있어 영문으로 암송하며 멋들어지게 읊기를 즐겨했지만 지금에서야 그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젠 암송도 못하지만 아마 이렇게 뜻을 새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겨울은 죽은 자의 세계여서 아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엎드려 있으면 되었는데, 공연히 봄이란 놈이 죽은 땅에 새 생명을 일깨우면서 귀찮게 이것 저 것 걱정거리만 만드는 게 아닌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유럽의 황패한 정신세계를 고발한 엘리어트의 반짝이는 예지가 선듯하게 들어난 작품이지요.일태면 치열한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비겁함을 고발하는 뜻이 아닐까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쎄요?
나약하기 짝이없는 신앙 생활이었드랬습니다. 타성에 빠져 미사에 왔다 갔다 할뿐 치열한 구도자의 묵상도, 때로는 냉담에 빠져 교회도 팽겨치고 떠난적도 없이 물에 물탄 듯 보잘것 없는 신자였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이번 순례는 이외였습니다. 하필 성모님 발현성지라는 게 퍽 못마땅하게 여기며 길을 떠났지요, 마음의 준비, 겸허한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 애쓰지 않은 채 훌쩍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프랑크푸르트에서 늦게 갈아탄 로마행 비행기에서 깊은 밤 칠흑같은 어둠속을 내려다 보는데, 홀연히 나타난 아름다운 꽃이, 제 전신을 훑고 지나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꽃, 르네상스의 발상지, 미켈란자로와 단테, 지옷토 등 숱한 천재들과 그들을 지원해 주어 르네상스의 꽃을 찬란히 피운 거상(巨商), 메디치의 고향인 피렌체가 아니겠습니까? 영어로는 플로랜스라고 하지요, 뜻은 꽃의 도시랍니다. 하늘에서 내려보는 피렌체는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미적 감각이 탁월한 이태리 사람들이 불빛으로 연출한 야경은 바로 꽃의 도시라고 속삭이고 있네요. "꽃의 도시 피렌체로 어서 오세요, 당신이 잃어버린 베아트리체를 보고싶지 않으세요!!" 그렇습니다. 지난 번 여행의 기억이 새로워집니다. 젊은 단테의 눈에 신비롭게 비치던 베아트리체가 살던 곳이지요. 피렌체의 두오모성당이 자리한 우피지 광장에서 베끼오 궁(메디치 가문의 거처)으로 걸어가던 베아트리체가 천 년도 더 오래된 다리 위에서 햇살이 눈부셔 이마를 상긋 찡그리던 모습을 만날 수 있을거예요.
돌아올 수 없기에 더 한층 그립고 애절한 내 순수를 만난 듯 피렌체가 높은 상공에 떠 있는 나를 저리도 고운 자태로 어서 오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때서야 답답한 내 정수리를 훑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이 나를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변해야 하는거야, 내게도 "그분"이 주신 아름다운 영혼이 있을 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 두려워서 그저 그런대로 흘러가던 태만과 습관을 버리고 진실로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는 나 자신을 맞닥뜨려야 해, 내 신앙생활도 변해야 하겠지, 어제의 내가 아닌 새롭게 태어나는 진정한 나를 만나야겠어... 세례성사의 은총을 입은 우리 그리스도인이란, 어제까지의 나를 물에 빠트려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다시 말해 변화를 받아 들인 사람이라는 깊은 뜻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르네상스라는 말은 새로 태어난다 라는 의미랍니다. 이번 순례 일정에 들어 있지도 않은 피렌체를 순례의 시작에 들어서는 첫날 비행에서 무심코 내려다본 야경에서 만났지요. 바로 이 만남에서 나는 자신의 진정한 르네상스를 떠올렸고, 또한 그렇게 하리다 라고 다짐하면서 진실로 "그분"께로 다가가는 발걸음을 조심스레 떼어 놓았습니다.
서투른 독수리 타법으로 시작한 이 일은 한 주일에 한 번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시작은 계절의 변화를 담고자 했는데, 막상 봄이 오는 소리, 꽃이 피고 지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을 정도로 자연의 생명력은 치열했습니다. 산수유부터 시작했나요, 목련으로 넘어 가다가 보면 벌써 목련이 지기 시작 했구요, 개나리는 벌써 노란 꽃이 녹색 이파리로 넘어가데요. 벚꽃은 언제 저렇게 활짝 피웠는지 막상 여의도를 오가는 데도 몰랐다니까요. 굳이 꽃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이제는 라일락 차례인 것 같아요, 아침운동을 마치고 들어 오는데 어디선가 짙은 향기에 숨이 막히는 줄 알았습니다, 살펴 보아도 찿을 수 없어 출근시간에 서둘러 들어왔지만 정원 한켠에는 라일락이 꽃을 피우며 그리도 향그런 제 향기에 자신도 취해 있으리라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어요. 봄날, 피고 지는 꽃의 향연을 '꽃들의 섹스'라고 말예요. 유한한 자기생명의 날 동안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려는 거랍니다. 그리하여 꽃씨를 멀리멀리 퍼트려 후손을 이어나가려는 치열한 종족 보존의 본능이 그 안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여인이 화장을 곱게하여 튼튼한 자식을 받으려는 본능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벌과 나비를 유혹하려는 본능이 그렇게 예쁘고 고운 색색의 꽃을 피어나게 했다는 거지요.
뭐, 순례 다녀와서 대단하게 변하기야 했겠습니까만 "그분" 을 생각하고, 언제나 제 곁에 계시겠지 생각하노라면 매사가 기분이 좋고 무엇보다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이것도 큰 변화라고 여겨집니다만 기도 중에나 묵상 중에, 아니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밤에는 성서를 읽으며 "그분"이 제게 건네시는 말씀을 새겨 들으려 애 써왔습니다.
"...마음의 침묵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느 곳에서나 /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 문이 닫혀 있는 곳에서도,/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 노래하는 새들에게서도, 꽃들과 동물들에서도-- / 경이로움과 찬미의 음성을 / 침묵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가르쳐 준 경이로운 깨우침도 이맘 때 배울 수 있었는걸요.
누가 이런 말을 하대요, 변화, 영어로 Change이지요, 그런데 g를 c로 바꿔 놓으면 변화가 Chance 찬스, 바로 기회가 된답니다. 부언한다면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말이 되겠지요.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 변화를 잊지 않고 나 스스로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한 언젠가 "그분"을 느끼고, 함께하고 있다는 가슴 벅찬 기쁨을 그대에게 전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저께 내린 봄비에 참담하게 져버린 목련을 차마 밟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봄비에 떠나 간 목련은 추억으로 곱게 묻어 두고 활짝 핀 꽃으로 오기보다는 그윽한 향기로 다가서는 오랜 친구 라일락이나 찾아 볼까봐요.
제 부끄러운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 전하면서 부활하시는 "그분"을 두손 모아 기다리렵니다.
"그분"이 불러주셔서. 막상 끝을 내려하니 저만 불러 주신 듯 호들갑을 떤게 쑥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꼭 드리고 싶은 말은, 믿음이 깊어지며는 순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신이 있는 곳이 바로 성지(聖地)이고, 자신이 있는 자리에는 늘 "그분"이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그저, 넘치는 "그분"의 사랑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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