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자유게시판

41362를 읽고.

스크랩 인쇄

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2-10-24 ㅣ No.41371

5시 30분...

미사를 준비하러 명동성당에 이르니 병원노조의 시위가 여전하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각종 구호와 노동가요들의 진동이 몸으로 전해져 온다.

 

명동성당 미사해설단에 들어온지 2년..

성당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들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시위대가 없으면 허전할 정도이니까..

 

요즈음의 병원노조는 예전 한통노조에 비하면 조용하다 못해 얌전할 정도이다.

한통 노조는 어떠했던가..

어느날 아침에는 성당을 겹겹이 에워싼 전경들 때문에 성당으로 올라가는데만 15분이 넘게 걸렸던 적도 있었다.

 

삼엄하게 경계를 서던 전경들은 나의 앞을 막아서며 제지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급기야 난 전경에게 왈칵 성을 냈다.

“내 집에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누가 막는다는 거예요!”

 

어리둥절해하는 전경을 밀치고 대성당에 이르러..

나는 숨을 고르며 걸음을 늦췄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아무 잘못도 없는 전경에게 왜 화를 냈을까.

난 내 신앙의 편리만 내세우며 세상의 아픔을 외면한 것이 아닐까..

어떤 것이 진정한 신앙인 것일까..

 

성수를 찍어 성호를 그은 다음 성당 문을 연다.

대성당의 육중한 출입문이 등 뒤로 닫히고 나니..

세상의 모든 소요로부터 벗어난 그 곳에 주님이 계시다.

아니, 세상 한 가운데에도 그 분은 계시다.

하지만 나는 이 고요한 성당의 감실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분을 만난다.

 

놀랍도록 신기한 일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지르는 어지러운 세상과, 고요하고 평안한 그 분의 세상이 나뉘어져 있다니..

 

삼종의 종소리가 울린다.

밖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요란한 구호소리와 음악소리를 애써 밀어내며..

삼종기도를 바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함께 하는 모든 신자분들의 우렁우렁하는 기도 소리가 성전을 메운다.

나직하나 힘이 있으며 온유하나 굳센 소리이다.

더 이상 이 곳에는 갈등도, 투쟁도, 증오도, 원한도 없다.

그저 세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온전히 그 분께 맡기고 그 분을 바라볼 뿐이다.

 

이런 모습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며 말로만 평화와 사랑을 외치는 것 아니냐고..

엄숙한 미사의식의 형식만을 추구하는 거대한 교회의 위선이 싫다고..

 

하지만 난 화려한 실내장식, 고풍스런 성당 건물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혼란과 갈등에서 벗어난 곳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 뿐이다.

나에게는 그 곳이 바로 노동자들의 눈에 위선으로밖에 비치지 않는 이 곳, 성전이다.

 

일상에서 잠시 나와 지친 발걸음으로 찾아온 이곳.

주님을 만나는 이곳은 내가 각박한 삶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이다.

그들은 호화롭다 할지 모르나 나에게는 그저 소박한 기쁨일 따름이다.

 

미사를 마치고 나는 다시 성당 밖으로 나온다.

성당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다시 온갖 구호와 노동가요 소리가 밀려 들어온다.

‘나’라는 존재가 다시 세상에 내던져졌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의 마음을 온전히 정화하고 그 분 안에서 쉬기에 40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다시 그들의 외침을 들어야 하고 그들의 모습을 바라봐야 한다.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것. 그것 또한 신앙일테니까.

 

눈을 돌리니 함께 미사를 드린 신자들이 조용히 걸음을 재촉하고 계신다.

난 나의 평화에 불편을 끼친 그들을 불만에 찬 눈길로 바라보는데..

그들을 탓하기는커녕 모두가 그리스도를 가슴에 안은 평안한 얼굴이다.

 

세상에게서 상처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울분을 가슴에 안고..

신자분들이라고 그들과 다를 것이 있겠냐만..

가톨릭의 사랑과 자비를 의심하며 손가락질하는 그들에게 왜 할 말이 없겠냐만..

미사를 마치신 신자분들은 그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나는 또 한번 부끄러워진다.

 

 



548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