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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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너머의 의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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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4-06-02 ㅣ No.231668

'서로'라는 말을 놓고

사람이 자라나 성숙해지면 '서로'라는 말을 놓고 모든 것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 삶의 숙명이 공동체성이라면 서로라는 말이 더더욱 중요해진다
인격의 성숙정도도 아마 서로라는 입장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서로에게 좋게나 즐겁게, 서로에게 이롭게나 유익하게, 서로에게 충분하게나 만족스럽게 삶을 함께 하고 일을 같이 하는지를 보아 알아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행복하게, 평화롭게, 정의롭게 삶을 함께 살아나가는 일은 인생길의 핵심에 있는 것일 것이다
보통은 삶의 문제들이 그렇게 서로가 안좋게나, 나쁘게, 서로가 불충분하다거나 불만족스럽게 같이 할 때 생겨난다
남녀가 만나면 둘은 상호간의 가치를 교환하는 형태의 삶을 이루지 않고 서로가 한 가지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삶의 양식을 띤다
그리고 그 결정체는 둘을 닮은 생명의 출산으로 맺어진다
그렇게 인간삶의 기초적인 양식인 가정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서의 생산자와 소비자, 공급자와 수요자로 양분되는 시장 경제의 두 축의 입장에서도 상호간의 가치가 교환되는 양태로 보여지지만 큰 틀에서는 서로가 생존이라는 동일한 가치에 매여 있음을 알게 되고 그렇게 그 가치를 같이 만들어내는 입장에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은 삶을 향유할 줄 아는 유일한 존재이고 많은 경우 유희로 시간을 보낼 줄도 안다
그런 성격들도 예외 없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서 산업적인 측면들로 편입되어 그런 양태들을 촉진하게 된다
마냥 놀이터에서 애들 노는 것 마냥, 스스로들이 향유할 모든 자산과 유희의 수단들을 만들어 내어 자족자급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틀에서 경제성을 띠는 산업의 구축으로 그런 향유도, 유희도 가능한 것이다
세상이 이런 형식으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육체의 생존에 대한 공동의 완벽한 시스템이란, 그리고 공동체 생활에 대한 서로의 완전한 공존이란 아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스템이 내포하고 야기하는 소유의 문제라든가, 분배의 문제, 각자가 필요한 만큼 가지는 문제, 모든 재화나 가치를 나누는 문제, 그런 정도,정도 만큼의 설정과 책정, 실현은 실제생활만큼, 현실만큼 대단히 어렵고 복잡하다
결코 인간성들에 비추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카톨릭 교회의 출현은, 그 공동체성의 발현은 인류사와 세계성에 있어서도 중대한 국면을 가지는 일이다
카톨릭 교회의 창시자인 예수의 요청대로 예수의 길에서 이루는 공동체성은, 공동체의 삶은 단지 제자단의 성립과 실현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등 예수의 본질에 살아있을 것을 요쳥하는 가르침의 면면들에서 실제로 기존 세계, 예수 때까지 계속 지속된 인간 삶의 양식이 지고 온 삶의 많은 문제들을 뿌리부터 해결하고 쇄신하는 원천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 예수의 길에 들어서려면 '니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라'하는 그 길에 맞는 인간 삶의 성격을 먼저 이루어야 했고 그런 삶의 양식은 예수의 길이 이룰 모든 것을 이룰 때까지 살아가야 할 삶이었다
그런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살아있는 이들로서 예수의 길이 이루는 그 특별한 성화의 도상에서, 예수의 사명을 계속하는 삶을 명 받은 것이다
그런 이들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들이 보이는 인간성이나 각자의 성격 면면들에 대한 판단과 호불호 이전에 카톨릭 교회의 특별한 공동체성에 부합해 살아있고 살아가는 예수의 길에 합한 이들의 성격으로 보아 그들을 대하고 그들에 대한 상호관계, '서로'에 대한 입장을 보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예전처럼 카톨릭 교회가 권력과 권위가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카톨릭 교회의 그런 권위도, 성격도 많이 약화되고 쇠퇴해, 그들 자신에게도 생존의 문제가 닥쳐오고 있는 즈음, 무엇이 문제인지는 아마도 그들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본다
카톨릭 교회 또한 세상에 대해, 세상의 모든 이들과 집단들애 대해 보편적이거나 일정 정도, 필요한 만큼 상호성을 이루고 그런 '서로'에 대한 입장 속에서 지속가능해야 하고 생존가능해야 하는데, 원래 종교라는 것이 신앙심을 기반하고, 그런 본성의 차원에서 구현되고 구축된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인간 삶을 수용하고 인간성격들을 포용해야 하는 현실적인 실제가 있는 만큼 그런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상호성의 접점에서 그 현실기반의 지점을 확립하고 구축하는 것은 세상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쉽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교계라는 제도적 차원은 소속된 이들에 대해 기반하고 있기에 다들 따르고 지킬 것에 대한 통솔이 가능하다고 해도 역시나 그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에 대한 공동체성에 살아있을 것과 살아나갈 것이 약속되어 있기에 단지 어떤 목적을 가진 일방성이 강제되고 편달된다고 하는 것은 그런 삶의 양식에 대한 이해가 다소 많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삶이란 함께 살아나가는 일이다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나 다르지 않고 마찬가지인 일인 것이다
케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의 삶을 보면 무인도에 홀로 고립된 인간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볼 수가 있다
톰 행크스는 어쨌든 이전에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던 세상으로 그렇게 돌아가려고 애를 쓴다
삶이 단지 그 목적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입장과 형편을 이해하게 되면 거기에 맞는 삶을 살 거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시나 다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다
언제나 보다 더 좋은, 보다 더 나은 삶을 바라고, 그게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일은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의 삶에 희망이나 지향성, 방향성이라고는 없는 현실주의만이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이다
단지 이게 다야
지금 살고 있는 이게 다야라고 모두가 똑같이 여기고 살아왔다면 신석기든, 구석기든, 청동기든, 철기든 도구 하나라도 더 낫게 만들려는 의지 따위는 필요없었을 것이고 부족장, 영주제, 군주제, 봉건제, 왕정, 민주주의 등의 정치체제의 변화 또한 없었을 것이고 노예제 폐지나 여성 참정권 부여 같은 사회적 평등이나 동등한 인권 정립 같은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것이 때론 호불호가 갈리는 판단과 평가가 있을 지라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혁명이나 개혁, 쿠데타나 데모와 시위 같은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 또한 위기의식 또한 지금 이게 다야,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하는 한계선에 갇혀 더 이상의 바램도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저 앉아 버린다면 그에 맞는 단어들이 당연히 뒤따를 것이다
바로 그게 다인 세상인 것처럼 말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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