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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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너머의 의미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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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4-06-03 ㅣ No.231681

창조의 뒤안길

하느님이 한처음에 창조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 자신이 보기에도 좋은 것이었다고 한다
좋다라는 말은 형용사이다
뭔가를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뭔가를 그렇게 안다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그런 말이다
만약 안다라는 동사를 쓰려면 나는 그게 좋다라고 알고 있다 라기 보다 나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알고 있다라고 해야 좀 더 자연스럽다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일들과 만나고 함께 하게 되는 모든 것들을 경험하며 느끼게 되는 감정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감정들은 다 일정한 무게와 부피로 통일된 단일 규격처럼 와 닿는 것이 아니라 각기 그 무게도, 부피도 다르게 때론 대상에 따라, 때론 상황에 따라, 때론 성격에 따라서, 때론 상태에 따라서도 다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분명히 감정이란 것을 느낀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인상과 표정과 몸짓을 통해 어느 정도는 그 감정이 표출되고 자신의 됨됨이와 의식화의 정도에 따라 그에 따른 행위도 나타난다
신학대전이란 카톨릭의 신학에 관련된 권위있는 책에서도 어째서 인간은, 그리고 신은 분노하는가에 대해 기술되어 있을 정도로 감정이란 묵인될 수도, 묵과될 수도 없는 인간에게 있는 실체적 상태와 그에 따른 현상의 면면들이다
사람은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로부터도, 사물들로부터도, 그 상태와 현상들로부터도 많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감정들을 많이 느끼며 산다
사람의 육신은 불멸도, 불사도 없는 연약한 한 개체에 불과하다
생물학적으로도, 물리학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그렇다
지구 위에 창조된 모든 것들은 물리와 화학과 생물학적 범주에서 살아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 범위 속에서만 생존이 가능하고 그 범위 속에서만 활동이 가능하다
사람이라고 해서 그 예외는 아닌 것이다
이 세상,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많은 이들이 자살을 한다
때론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투신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땅바닥에 떨어진 시체의 모습을 보면 물리라는 이치가 얼마만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지구상에 핵폭탄이 터진 적이 있었는데, 일본의 두 도시에 미군이 투하한 것이다
그때 많은 이들이 바람같이 사라졌다
건물들조차 그 뼈대도 없이, 그 흔적도 없는 잔해로 부서졌다
그렇게 화학이란 이치가 얼마만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생명체란 그 틈바구니에서 그 터전을 일구고 사는 것이다
거대하고 위력적인 자연의 이치는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작동하지만 인간에게 느껴지는 평상시의 자연은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의 전형이고 어머니의 품 같은 대지이다
마블 영화에서처럼 자연을 손바닥 안에서 주무를 수 있는 캐릭터는 인간에게도,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있을 수 없다
자연과 대등한 입장으로 설 수 있는 것이 이 지구상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데, 인간은 그렇 수 있다고 굳게 착각이라도 한 듯, 상상에서 시작해 이제는 현실로 진입하려 들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영원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때가 되면 제 멋대로 허공을 날아 다니는 무협지 같은 것은 보지 않게 되듯이 말이다
마블 영화들의 비정상적 캐릭터들의 출발은 만화이다
만화라는 쟝르는 한계도 없고, 바닥도 없다
그래서 슈퍼맨, 베트맨, 저스티스 리그의 온갖 캐릭터들이 이 지구상에서 마구 설쳐대는 것이다
지금 기후변화가 폭풍처럼 번지는 현상을 보고 때론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는 인간들 따위는 그 캐릭터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
비행기 한 대를 만들 때, 사람들은 유체역학이니 공기저항이니 하는 관련사항들을 면멸히 검토한다
그만큼 비행기 한 대를 저 하늘에, 창공에 띄우는 일도 쉽지 않고, 가볍지 않다
동력장치에 대한 연구도 항상 앞에 있어야 한다
그런 이 지구상에서 영화판의 피조물들은 아주 신나게 돌아다니고 제 멋대로 힘을 쓰고 하고 싶은 일들을 실컷 다한다
그래도 부러움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으니 왠 일일까
그게 내가 사는 현실에서는 되도 안한 것들임을 뻔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가능한 것들에만 부러움이란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다
나에게 아예 불가능한 것들은 쳐다볼 필요도 없이 말이다
그래서 웃고 떠들며 재미있게 보는 오락물이나 볼거리 정도로 보고 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 만하게 만들었다
내가 사람인 나로 살다보니 느껴지는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고 참으로 많다
감각들로부터 느껴지는 것들도 좋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고, 나쁘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건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왜 그렇게 느낄까를 굳이 따지거나 곰곰히 생각하지 않아도, 나를 바탕으로 해서, 나를 기준으로 해서 그런 감정들은 거의 대부분 즉각적이다
때론 감정의 왜곡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는데 보통은 인간이 억압되거나 폭력에 심하게 노출되면 두려움이나 공포라는 주된 감정이 바람직하게 드러나야 할 감정들을 지배적으로 짓누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감정을 억제하는 차원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억압과 폭력에 짓눌린 이들에게 괴로움이란 감정도 없어 보이고, 저항의식 같은 게 사라지는 건, 아마도 그 두려움과 공포심이 모든 감정기제들을 억누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한다
눈물 흘리며 웃는 일은 그만큼 기쁜 일이 아니면 잘 나타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 것처럼, 웃어도 웃는 게 아닌, 웃는 시늉을 한다는 것을 사람은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거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하기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안좋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 자명하겠지만 말이다
어린 아이들이 감정에 서툴고 때론 비정상적이다 싶을 만큼 아이 때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어른들은 알아 차리고 알아 차려야 하는 것이다
무슨 일들이 벌어졌거나, 무슨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들의 반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낯가림이나 쭈볏쭈뼛하는 모습을 못 알아볼까
대부분 이런 아이들은 엄마 치마폭을 두손으로 꼭 쥐고서 엄마 뒤로 가서 선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모습은 가까이 붙어 서는 것조차 꺼리고 우두커니 동떨어져 있으려 한다
그러면 그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아이들은 관계라는 말과 관계성이라는 의미를 모른다) 아이에게 어떤 데미지나 악영향이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이다
감정만큼 솔직한 것도 인간에게는 없을 것이다
감정적 차원은 대부분 인간저변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왜곡되고 왜곡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그 저변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인간의 상태는 인간의 많은 가능성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현상 속에서 가능할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인간성의 면면들로 악화되거나 흑화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결코 반응형이 아닌, 내재형으로 말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존재에 대한 죄를 묻는다는 것은 이단이나 사이비들 같은 것들이 저지를 수 있는 만행에 불과한 것이다
분명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에 대한 죄를 물었고, 이 세상의 모든 법시스템도 행위에 대한 죄만 묻는다
조두순 사태를 보며 인간들이 그런 류의 인간에 대해 갖는 감정적 현상들을 보게 되었다
법정의 판사가 사형수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릴 때 하는 말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너는 수용과 포용이 불가능한 인간이다라고 하는 말을 한다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자신의 사명과 직무의 범위 속에서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이다
죄의 끔찍함과 더러움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나 인간들의 감정을 격앙시키는 천인공노할 범죄라고 여기는 죄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조두순의 범죄는 다 늙어서도 그 가능성이 그 인간에게서 사라지지 않고 재범의 우려가 있다고 보는 인간들의 판단과 이해에 따라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그런 위험성의 인식은 감정을 더욱 불붙게 만들고 그 끔찍함과 더러움이 더는 공존하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 막아서는 인간들의 감정적 모습에서 느껴지는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과 동시에 미완과 제한이 역력한 사회의 현실 속에서 죄의 위력은 그 악화의 도가니를 직접 연출할 만큼 크나큰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알 정도로 살만큼 말이다
세상 모든 현상들 속에 그런 인간들의 상태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부끄러움과 염치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굳이 인간들의 반감을 앞세워 말하는 것은 분명 인간들 서로가 지켜야 될 선을 더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인간 스스로의 정체성을 바람직하게 하고 싶었던 모든 교훈들에는 인간들을 만들어 보려는 의지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숱한 삶의 경험 속에서, 세상살이의 경험 속에서 뭐가 인간이 궁극적으로 살 수 있는 삶인가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과 고민들로부터 다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감정을 사람에게 만들어 둔 데에는 하느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이고, 하느님에게도 있는 본질적 성격에서부터 인간에게도 부여된 감정은 인간상태와 인간삶의 현실에서 언제나 그 모든 것의 바로미터일 것이다
정치인들에 대한 반감과 테러가 날로 심각해져 가는 이때에 정치가 과연 사람들이 감당할 만한 임무인가를 보다 깊이 생각해 보고 오랜 역사동안 많은 인간들이 사회형성의 정도와 조직구축, 그 제도와 체제의 실현 속에서 갖은 양태와 행태로 담당해 왔던만큼, 언제나 그 우와 해는 죄와 함께 계속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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