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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주의 단상에 대한 짧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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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경 [kreuz] 쪽지 캡슐

2001-11-16 ㅣ No.26410

[성직주의 단상에 대한 조그마한 감상문^^;]

 

1. 主義

 

①어떤 사물에 대한 일정한 견해나 입장. ¶ 학자들의 ~ 주장이 대립하다 / 검소하게 살자는 게 내 ~이다.

②《주로 한자어 명사 뒤에 붙어》 그 명사가 나타내는 내용을 중시하거나, 또는 그런 내용을 주된 특성으로 가진, 학설이나 사조(思潮)나 운동이나 신념이나 태도나 경향임을 나타내는 말. 이즘(ism). ¶ 고전~ / 민주~ / 자본~ / 형식~.

 

저는 최문화씨의 ’성직주의’라는 이름에 붙는 ’주의’를 ①번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워서 ②번과 같이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단독적인 모습에 ’주의’라는 이름이 붙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만큼의 숫자가 모여서 비슷하게까지는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대로 살아나가려고 움직일 때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某某主義’라는 이름이 붙을 때에는 그 이름을 내걸고 이야기를 하는 대상이 그 성향을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지평을 확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바로 아래에서 말씀드리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직주의라는 것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전공이 법학이었는데, 교수님의 말씀 중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LEGAL MIND’라는 것입니다. 4년이 짧아 보여도 그 시간이 지나면 법학을 공부한 사람은 법학식 사고방식을 은연중에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4년도 아닌, 7년이 넘는 시간을 한 학교에서 똑같이 공부하고 나온 분들의 머릿속에 공통되는 사고방식이 들어있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해 보일 것 같습니다.(물론 이것은 창조성이나 상상력의 말살과는 다른 측면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성직주의 단상이라는 글에 나온, 그분의 시각으로 바라본 성직주의는 근본적 사고방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몇몇 사제의 일상생활의 삶 안에서의 잘못이나 사제 개인의 성격, 혹은 생활방식의 모순들을 한꺼번에 묶어서 ’主義’라는 이름을 붙이신 듯합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7년이 넘게 가톨릭 교회 안에, 그것도 수많은 신부님들이 오시고 가시는 명동성당에서 활동했고, 또 통신동호회와 기타 가톨릭동호회 활동을 통해 적지 않은 신부님들을 알고 있습니다만 최문화씨가 말씀하시는 그런 신부님들을 죄송스럽게도 단 한 번도 뵌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 제가 만난 신부님들이 전체적으로 가지고 계시는 생각의 방식이 있고, 그게 좀 이상해 보이고 비성서적으로 보이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아마 차후에 저도 그런 점을 끄집어내서 ’성직주의 몰아내자’  식으로 최문화씨보다 100배는 과격하게 쓸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적어도 ’내가 만난 몇 분의 신부님이 이상했다’라는 것을 ’주의’라는 이름으로 전체 신부님을 한꺼번에 비난하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2. 성급한 일반화와 단순과격함

 

언젠가 어느 통신동호회에서 한 분이 사제들의 자동차 소유에 대해 비판을 하셨습니다. 그때 그분은 사제의 자동차 소유 = 죄악이라는 도식을 사용하면서 일체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문제는 제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신부님을 몇 분 알고 있고(면허도 없으십니다), 또 어느 신부님들의 경우 담당한 본당의 구역이 너무 거대해서(시골입니다) 걸어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또한 자동차 소유에 관해 현대 사회에서 시간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은 사제 역시 마찬가지기에(병자성사에 늦게 나타난 신부님이 죽일 놈이 되는 것을 아래에서 이미 읽으셨지요?) 정말 비난해야 하는 것은 사제 소유 자동차의 고급화와 직무용이 아닌 레저용으로 사용되면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지적하는 것이 차라리 더 현실적이었을텐데, 그분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이상주의적으로만 비판을 하셨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언젠가 글을 올리면서 ’왜라고 묻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은 그런 의미였습니다. ’사흘 굶으면 도둑질할 권리가 생긴다’라는 말에 대해 저도 동의하는 바인데, 중요한 건 도둑질한 사람에게 사흘 굶었느냐고 물어보는 배려 아니겠습니까.

 

3. 머리, 손, 발

 

저는 서양의학보다 동양의학을 더 좋아합니다. 이건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서양의학의 ’수술’이라는 개념이 제겐 좀 끔찍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수술은 병든 장기를 잘라내버리는 것입니다. 장기와 신체의 각 부분이 전체를 이루는 요소인데, 그 중에서 병이 들어 제 구실을 못하거나 다른 장기들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면 가차없이 잘라내버리는 모습이 현대사회를 보는 것 같아서입니다.

예전에 시골에 산 적이 있었습니다. 70년대 초기의 일이니까 산업사회가 고도로 발전한 요즘과 많은 모습이 달랐었는데 그중 하나가 동네마다 꼭 하나나 둘씩은 있었던 바보와 미친x입니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하고, 혹은 놀래게 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던 그들은 그러나 분명 마을의 한 일원으로 살아갔습니다. 물론 직업도 없고 제대로 된 가정도 없었지만 그들은 분명 굶어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안 그렇죠. 다 몰아서 어느 수용소 같은 곳에 집어넣고 먹이고 재우는 ’사육’을 하는 모습들이 가끔 보입니다.

이야기가 딴데로 빠져나갔군요. 하여간 서양 수술 중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손가락을 몇 개 잃어버린 어느 의학지망생이 발가락을 이식해서 손가락 대신 쓰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실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발가락이 손가락을 100%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종교적으로 사고하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종교라는 자체가 이미 합리성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순명’이나 ’부르심’이라는 말에 대해 100%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각자 다르게 불렀다는 것만큼은 ’느끼고’ 있다고 착각(?^^) 비슷한 걸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여러 지체라는 것을 성서에서 읽으셨을 겁니다. 그 한 지체가 병들었다면 그 지체를 잘 고쳐서 원래의 그 자리에서 잘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정상일 겁니다. 그 지체를 가차없이 잘라내 버리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과연 건강에 얼마나 이익을 줄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손가락 10개 중 하나가 병들었으면 그 하나를 고치면 되는 것이지 나머지 9개 모두를 고쳐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정작 심각한 것은 계속 병들게 하는 전체의 삶의 잘못된 모습(예를 들면 담배, 술, 과식 등등.....)이지, 신체 일부분의 병을 전체로 확대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신체 전체가 모두 발가락으로만 이루어지거나 입으로만, 혹은 귀로만 이루어지는 괴물이 될 필요도 없을 겁니다.

 

4.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

 

평신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중부양하고 오상 받고 동시이처의 초능력을 소유한 분이 아니라 피와 살이 있고 이성과 감성이 있는 현실적 성직자, 수도자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현실적인 사제를 선택할 경우 최소한 받아들여야 하는 점은 그분들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보다 못한 인간이라면 문제는 있겠지만, 적어도 만약 그분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왜 ’저런 인간’을 부르셨을까 하는 질문 정도는 던져볼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성인전을 읽으면서 가끔 생각하는 것은 이분들이 우리 본당 신부님들이 아니셔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입니다. 가끔 그야말로 투명한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제가 못 봐서 그렇지 혼자 계실 땐 공중부양도 하실 것 같더군요) 이분들은 양들에게 보호를 받고 사십니다....원래 잡스러운 게 하나도 안 섞인 100% 순수한 H2O에서는 생물이 살 수 없는 법이지요.

 

5. 요한님께

 

이 말씀은 드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적어도 이 게시판에서 어느 누구보다 냉철하시려는 분이시니만큼 곡해는 적게, 이해는 넓게 받아들여 주시리라 믿고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최문화씨의 성직주의 단상에 대한 님의 동의 역시 전체의 성직주의라기보다는 일부 성직자의 모습에 대한 비난으로 한정되어 있음에 실망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실망스러웠던 점은 님이 그 안에 계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최문화씨는 본인이 접한 몇 분의 사제의 잘못을 전체 사제의 삶의 비난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님의 옛 글로 미루어볼 때 님 역시 가깝게건 멀게건 그 삶 안에 들어가 계시거나 들어가시려는 분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님은 익명으로 게시판에 등장하시면서 드러나면 당할 불이익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 안에 머물며 받는 보호와 이익은 포기할 수 없으되, 적어도 자신의 삶이 최문화씨가 ’성직주의’라고 비난하는 사제들의 삶과는 결코 단 1%의 공통분모도 없을 것이라는 교묘한 확신을 가지고 계신 듯한 느낌을 제게 주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익명의 비판자를 높여보지 않습니다. 한스 큉, 레오나르도 보프, 이제민, 서공석, 진중권 등의 이름이 제게 주는 느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익명의 비판자의 한계는 ’동의’까지가 끝입니다. 그 이상의 실천적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때, 우리는 그 익명의 비판자를 공동체 안에 함께 품어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체가 없는, 그래서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언제든 비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하나만 덧붙이겠습니다.

 

어느 신부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동네에서 한 여자가 마귀가 들렸답니다. 혀가 댓자로 빠진 체 천장에 붙어서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부어댔는데, 용감하신 보좌신부님께서 제의를 걸치고 성수를 든 체 주임신부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귀를 쫓겠다며 가시더랍니다. 그런데 이 마귀가 보좌신부님의 인간적 약점을 몽조리 떠들어대는 바람에 그만 기가 꺾여 돌아오셨다지요. 그러자 주임신부님께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시면서 연령회 할머니들을 초빙하시더랍니다. 그리고는 먼저 가서 기도하고 계시라고 그 집으로 보냈습니다. 물론 할머니들은 그 집에 가셔서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치셨지요. 마귀가 아무리 떠들어도 연령회 할머니들의 단순하고 절대적인 신앙심을 무너뜨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뒤에 주임신부님이 나타나셔서 짜잔~ 한 칼에~

 

명동성당에선 그런 분들을 별로 많이 못 보았는데, 아마 동네본당에는 할머니 신자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특히, 교우집안에서 나고 자라신 할머니 신자분들의 경우, 최문화씨가 성직주의 단상에서 비난하시는 신부님에 대해 하늘 같은 존경심을 갖고 순명하며 살아가십니다. 물론 우리 시각으로 보면 ’못 배우고 무식해서’ 잘못을 잘못이라고 판단할 능력이 없으신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뒤집어 생각할 때 우리는 ’많이 배우고 유식해서’ 잘못을 잘못이라고 판단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제가 아무리 이리저리 뒤집어봐도 그분들의 신앙심보다 우리가 더 나은 것 같은 점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들은 사제가 반말을 하건, 술을 먹고 땡깡을 부리건 하느님께로 향한 마음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즉,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이지요. 그런데 많이 배우고 똑똑한 우리들은 왜 그리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이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처럼 말입니다.

못 배우고 무식해서 사제의 잘못된 삶조차 순명하며 받아들이는 분들이 1이라는 달란트를 받아 2로 만들어놓으셨다면, 배우고 유식한 사람들은 100이라는 달란트를 받아 200까지는 만들어놓아야 그나마 공평할텐데 제가 보기엔 현상유지를 하는 분들도 별로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제대로 못 살면 비평도 못하느냐라구요. 그럼 예수님이 그러시겠지요.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의 티끌을 말하지 말라고....

 

이것도 그냥 제 생각입니다. 반론은 환영하지만, 메일 반론은 거절합니다.

그럼. 이만.

휘리릭~

 

작은이 앞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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