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자유게시판

오후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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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2-05-20 ㅣ No.33654

뜻하지 않게 물의를 일으키며 게시판에 등단(?)하게 되어 스스로도 황망하기 그지 없는 communion 입니다.

게시판에 들어와 조용히 읽기만 하고 총총히 사라지던 제가 갑자기 잡문으로 너스레를 떤 것은..

요즘 제 생활이 예전과 180도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저 일상에서 느꼈던 작은 느낌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약 20일 전..

일흔 되신 저희 아버지께서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처음 사고 소식을 접하고 병원에 달려갔을 때는..

저희 어머니나 저나.. 큰일 치르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연세도 있으신데다가 워낙 심하게 다치셔서 아버지를 보는 순간 앞이 캄캄해지더군요.

 

하지만 너무나 놀랍게, 그리고 감사하게 아버지께서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셨습니다.

모두가 기적이다 할 정도였죠.

그래서 어저께 퇴원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거동이 불편하셔서 누군가 꼭 옆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근데 그 병간호이라는 것이..

24시간 어느 한 사람이 전담하기란 무척 힘든일이잖습니까..

 

그래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저.. 굳이 우긴다면 프리랜서지 실상은 백수나 다름없는 제가 간호를 맡기로 했습니다.

자식이라고는 저와 남동생 달랑 둘인데..

제 남동생은 하는 일이 바빠 시간을 낼 수 없던 처지였거든요.

그러니 논의의 여지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 몫은 제게 돌아오게 됐죠.

그런 이유로 하던 일을 접고, 당분간 전 집에서 아버지와 칩거하는 생활에 돌입하기로 했습니다.

 

잠깐 저희집 가족들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면..

저희 외가는 그야말로 구교집안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와 제 동생은 일찌감치 유아세례를 받았죠.

하지만 결혼하실 때 종교가 없으셨던 저희 아버지는..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과 읍소에도 줄곧 딴청피시기, 들은 척 안 하시기로 일관하시다가 갖은 압력에 못 이겨 세례받으신지 이제 수년 밖에 안되신 분입니다. (세례받으신지 몇년 됐는지 정확히 기억 안 나는군요.. 이거 자식 맞나..)

 

많은 성인 남성 신자들이 그렇듯이..

저희 아버지도 험한 표현을 빌자면.. ’그저 그렇고 그런’ 신자이십니다.

아직까지도 겨우 주일미사나 드리러 가시죠.

그것도 어떻게든 빠지려고 안간힘을 쓰십니다.

말도 안되는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으시다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어머니께 끌려 가시곤 하거든요.

그러니 당연히 평일미사는 절대로 가시는 법이 없지요.

 

아니.. 따지고 보니 아버지는 ’그렇고 그런’ 신자도 못 되시는군요.

세례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때때로 황당하신 말씀을 내뱉으셔서 저희 어머니를 경악케 하셨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들이죠.

- 근데.. 정말 동정녀가 잉태할 수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당최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 말야..

- 평일에는 헌금도 안 낸다며 왜 신부님은 미사를 하지? 그건 서비스인가..

그리고 ’당신 지난주에 미사 빠졌으면서 왜 영성체했어요?’라고 따져물으시는 저희 어머니 말씀에..

- 그럼 돈을 냈는데 받을 건 받아야지.. 어떻게 그냥 와..

이런 말씀으로 저희 어머니 속을 홀라당 뒤집어 놓으셨답니다.

 

그럼 곧이어 어머니의 일장 훈계가 이어지고..

저희 아버지는 ’아차! 잘못 건드렸다’ 싶은 표정으로 어머니 눈치를 슬슬 보시며 따분해 죽겠다는 듯 시선을 허공에 고정시키시고 그 잔소리를 다 들으십니다.

물론 저희 어머니 잔소리의 closing ment 는 ’에이그.. 쇠귀에 경읽기가 따로 없지.. 언제쯤 제대로 신앙을 가지려나..끌끌..’ 이라는 장탄식이구요.

 

그 반면에 저희 어머니와 저는 ’썩 괜찮은’ 신자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미사도 종종 드리러 가거든요.

그 뿐만 아니라 성당 단체 활동도 꽤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매일 새벽 미사를 다니시고 본당에서 반장, 레지오간부, 기도회장 등등.. 두루 요직(?)을 거치셨습니다.

저는 어떠냐구요?

저희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학생 레지오 간부, 주일학교 교감, 전례활동.. 저 역시 웬만큼 할 건 다하고 살았습니다.

 

아! 하나 밖에 없는 제 동생 녀석 이야기를 빼놓았군요.

이 녀석은 정말 별 볼일 없는, 아무 것도 아닌(?) 녀석입니다.

제대한지 얼마 안 된 동생 녀석은..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성당 문턱 닳게 드나들더니..

최근의 신앙생활이라고는..

군대 있을 때 쵸코파이 얻어먹으러(?) 성당으로 종교행사 나갔던 것이 전부입니다.

그것도 교회에서는 곰보빵 준다더라.. 하면 귀가 솔깃해서 내내 갈등하는 연약하기 그지 없는 불쌍한 죄인이죠.

 

근데 이런 저희 집에서..

종교에 대한 분쟁이 있다 하면..

그건 다른 가족들이 아닌 저와 저희 어머니가 벌이는 다툼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성령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시는데..

전 도통 그 곳의 분위기가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몇번 저도 그 기도회에 따라 간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행사가 있다고 해서 마지못해 어머니 뒤를 졸랑졸랑 좇아간 거죠.

근데 들어서서 얼마 되지 않아..

사회자가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일시에 모든 사람들이 온 건물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기도하는데..

정말 경기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심령 기도’ 있잖습니까..

왜 그,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기도하는 것 말입니다.

그게 제 귀에는 온통 ’코카콜라 코카콜라, 쓰르라미 쓰르라미, 얼레리 꼴레리..’ 이런 말로 들리는 겁니다.

힉. 이게 웬 난리굿판이냐..

마치 조금만 더 있다간 산제물로 바쳐질 것 같은 분위기더라구요.

얼이 빠져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도망 나왔죠.

 

그러니 종종 저희 어머니와 전 서로의 신앙 방법에 대해 의견을 달리 합니다.

제가 집에서 뚱띵거리며 생활성가를 부르고 있노라면..

방문을 확 열어젖히시며 어머니가 일갈을 하십니다.

- 넌 주일학교 교사였단 사람이, 그리고 전례를 본다는 사람이 삼종도 안 드리냐? 대체 기도하는 꼴을 못 본다니까.. 성당 활동 한답시고 맨날 고만고만한 녀석들끼리 몰려다니면서 술이나 퍼마시고.. 언제 다소곳이 앉아서 묵주기도라도 드려본 적 있냐.. 에그..

 

그럼 저 역시 지지 않습니다.

- 이렇게 노래하는 게 다 기도예요. 그러는 엄마는 결식아동이나 노숙자를 위해 헌금해본 적 있어요? 기도만 하는 게 신앙이 아니예요. 실천을 하면서 살아야지..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기도회는 시끄러워서 못 참겠더라구요..

 

짜그락 짜그락 이런 말다툼이 이어지면..

저희 아버지와 제 동생은..

대체 왜들 저런대.. 하는 뚱~~하고도 뜨악~한 눈초리로 저와 저희 어머니를 쳐다봅니다.

 

근데..

저희 어머니가 하필이면 요즘 같은 전시체제에서..

닷새 동안 무슨 피정 겸 세미나를 가셔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 이야기는..

닷새 동안은 그저 집에 쳐박혀 있는 제가 꼼짝없이 온갖 집안일을 다 돌봐야 한다는 소리이죠.

정말 암담하기 그지 없더군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설마 정말 가시지는 않겠지.. 안 가실 거야..

하지만 제 희망을 무참히 짓밟으시고 저희 어머니는 보란 듯이 그 세미나에 가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집에서 한가롭게 인터넷을 들춰보며 이런 저런 넋두리를 하게 된 겁니다.

 

근데 오늘은 아버지를 모시고 재활 운동을 나가던 중에..

갑자기 부아가 치미더군요..

우리 어머니는 아부지 마누라 맞나.. 아무리 신앙도 좋지만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입을 댓발 내밀고 아버지께 궁시렁대며 투덜거렸습니다.

- 너무 하는 거 아니냐구요.. 떠벌 떠벌.. 아버지가 좀 말려보세요.

 

그러자 눈을 꿈뻑거리시며 저를 쳐다보시던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

- 자기가 믿는 바가 있으면 믿는 바대로 사는 거지. 어쨌든 착하게 살자고 하는 건데.. 나도 신의 존재를 믿는다. 그리고 가정을 파괴할 정도로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아버지는 굳이 너희 엄마 믿음을 가지고 탓할 생각 없다.

그리고 춤바람 나서 캬바레 다니는 것보단 성당이 백번 낫지.. 암..낫고 말고.. 건전하기도 하고 인격에도 도움이 되고..

 

순간..

무엇에 얻어맞은 것 같더군요.

그 사람이 얼마나 성당에 자주 가고 어떤 활동을 하느냐만이 중요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어머니의 신앙 방법조차 마음 속 깊이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내심 그 방법이 무척 못마땅했었는데..

왜 저렇게 요란하게 기도할까, 꼭 저렇게 장황하게 표현을 해야 할까, 하고 많은 방법 중에 저런 기도 방법을 택해야만 하나..

이런 생각을 가졌었는데 말입니다.

 

흔히 우리들이 혼동하여 쓰는 말이 있잖습니까..

’다르다’와 ’틀리다’

자신과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님을..

머리로는 안다고 했으면서도..

제 아집과 교만은 제 방법만을 고집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다른 것이 아닌 신앙에 대해서요.

제가 노래를 부르며 주님을 찾는 것이 하나의 기도이듯..

저희 어머니가 해석하지 못할 언어로 주님을 찾는 것 역시 기도인데..

왜 나의 기도방법, 그리고 신앙의 방법이 옳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저희 아버지는 제가 요상하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신앙방법을 이해하고 계셨나 봅니다.

지금 상황에선 아버지야말로 어머니가 집을 비우시는 것이 가장 불편하시고 힘드실텐데 말입니다.

이 놈의 여편네. 나가긴 어딜 나가.. 뭐 이런 생각을 하실 법도 한데 말이죠.

 

그런 걸 보면..

저희 집에서 정말 신자는 아버지셨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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