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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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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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2-05-28 ㅣ No.34133

며칠 전에 전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저녁에 그냥 살짝 넘어진 것 뿐인데..

어떻게 발가락이 잘못 걸리는 바람에..

왼쪽 엄지 발톱이 흔들거리더군요.

 

엄청 피가 나고 정말 아팠습니다.

다음 날 끙끙거리며 병원까지 겨우 기어가...

발톱을 제거하는 어마어마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니 걸을 때마다 얼마나 욱신거리는지..

제대로 발을 딛기가 힘들 지경이었죠.

 

근데 병원에 가서 발톱을 빼버린 그 날..

전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가야했습니다.

정말 화가 나더군요.

왜 하필 오늘 이렇게 되냐구.. 걷기도 힘든데 어떻게 성당에 가라고.. 이씨..

 

하지만 별 도리가 없었죠.

전 앞이 터진 샌들을 신고 집을 나섰습니다.

햇빛은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더군요.

절뚝절뚝.. 기우뚱 기우뚱.. 낑낑..

평소면 30분이면 너끈히 가고도 남는 성당이 1시간도 넘게 걸렸습니다.

행여 발이라도 밟히면 난 그대로 졸도다 하는 생각에 일부러 사람 없는 길로만 골라 다녔습니다.

 

그렇게 성당에 들어선 순간..

성당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초등학교 복사녀석들이 저를 보더니 환호성을 내지르더군요.

와~~ 누나.. 안녕?

그러더니 예닐곱명의 녀석들이 저를 향해 막 뛰어오는 겁니다.

순간 아찔하더군요.

뭐랄까..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성난 황소 떼를 본 투우사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전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외쳤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얘들아.. 헤헤.. 잠깐만.. 지금 누나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거든.. 이거 농담 아냐.. 진짜야.. 진정해 봐..

평소의 이 녀석들의 짖궂은 장난을 생각해보면..

에이.. 발가락에 티눈 생겼어요? 이러면서 운동화발로 밟거나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고도 남을 녀석들이니까요..

 

얼굴이 하얗게 돼서 황급히 외치는 저를 보더니..

녀석들 잠시 주춤하더군요.

사태의 심각함을 파악한 듯한 녀석들..

이번엔 태도를 바꿔 "아~~ 누나 걱정 말아요."를 외치며 제게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더니 녀석들 중 둘이서 제 양 옆으로 파고들더니.. 이러더군요.

- 자! 우리한테 기대요. 부축해줄께요.

 

캬~~ 그 기특함이라니..

역시 잘 키운 복사녀석들.. 열 남자친구 안 부럽다..

생각해 보세요. 어떤 남자가 저를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부축해주며 성당까지 데려다 주겠어요? 그것도 예닐곱명이나 말이죠.

물론 그 조그만 녀석들에게(기껏해야 초등학교 6학년이니까요.) 둘러싸여 부축받는 것이 저 혼자 걷는 것보다도 불편했지만..

마음으로는 정말 든든하더군요.

 

하지만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주고 받던 농담과 장난이 있던 터라..

이 녀석들.. 곧 본색이 드러나더군요.

- 하하.. 누나.. 걷는 게 어기적어기적해요..

- 누나 걷는 거 보니까 우리 반에 XX수술 한 애 생각난다. (그 왜 있잖습니까.. 고래.. 응응 수술..)

그러면서 제 옆에서 그 응응수술 받았다는 제 반 친구 흉내를 내는 겁니다.

 

허 참.. 아무리 이 녀석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하지만..

그래도 아리따운(?) 처자 앞에서 이게 할 소리입니까..

- 야.. 아무리 그래도 누나도 여자인데.. 그런 말은.. 하기가.. 좀 그렇지 않냐..?

그러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더군요.

- 에이.. 뭐 어때요. 딴 사람도 아니고 누난데..  

이 놈의 팔자란.. 어딜 가도 여자 취급을 못 받는다니까.. 궁시렁궁시렁..

 

하지만 전 복사 녀석들을 보면.. 늘 즐겁습니다.

이 나이에 아줌마가 아니라 누나라고 불러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더러..

미사 때 보면 그 모습이 어찌나 의젓하고 점잖은지..

제대 뒤로 돌아 나오면 영낙 없는 개구장이들이지만..

빨간 복사옷을 입고 제대 앞에서 미사 전에 기도드리는 모습들을 보면..

정말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지요.

 

미사 때마다 고정적으로 만나는 터라..

지금은 누구 하나가 안 보이면 서로의 안부도 묻고 걱정도 합니다.

- 아무개는 미사 시간 옮겼니? 왜 요즘 안 보여?

- 너 왜 저번 주에 안 나왔어? 누나가 기다렸잖아..

또는 때때로..

- 누나는 이번 달 주일미사 몇시예요? 난 저녁 6시인데..

이러면서 서로의 스케줄을 조정하기도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미사 시간 중에 눈짓을 교환하면서 찡긋거리기도 하고..

옆으로 지나갈 때 알듯 모를 듯한 웃음을 주고받기도 하죠.

물론 종종 핀잔도 주곤 하지만요.

- 너 아까 딴 생각했지? 왜 종 늦게 쳤어?

- 누나. 성가연습 좀 해요. 그게 뭐야.. 에이..

 

전 녀석들에게 종종 저녁 데이트 신청을 받습니다.

제 얼굴이 떡볶이로 보이는지..

저만 보면 떡볶이 타령을 하거든요.

뭐.. 다른 단원들은 해설하고 나오면 종종 멋진 남성에게서 목소리에 감동했다며 차나 한잔 하자는 제의도 받는다는데..

그런 남자들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고..

제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남자라곤 복사 녀석들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저야말로 기쁜 마음으로 그 녀석들의 프로포즈에 응하곤 하죠.

제대 위에서 그렇게 품위있고 의젓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남자가 이 녀석들말고 또 있나요?

 

언제인가는요..

제가 한 동안 개인적인 사정으로 해설을 못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와 미사 시간이 같았던 5학년짜리 복사녀석이 하나 있었죠.

근데 그 녀석이 저를 찾더라죠.

그래서 동료 해설단원이 농담으로 말했다더군요.

- 네가 자꾸 누나한테 떡볶이 사달라고 하니까.. 누나가 너 떡볶이 사주다가 차비가 없어서 성당에 못 나오고 있잖니..

근데 이 녀석이 그 말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던가 봅니다.

제가 다시 나오니까.. 제게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 내가 누나한테 먹을 거 사달라고 너무 졸랐지..?

아이구.. 이 녀석아.. 전 웃음을 참지 못해 한참을 쿡쿡거렸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들 중에는 신부님의 꿈을 키우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4학년인 어느 녀석은 진지하게 제게 말하더군요.

- 전요.. 나중에 교황님이 될 거예요.

그런 말을 들으면 절로 웃음이 나지요.

- 그래~~? 그럼 누나 꼭 잊지 말아야 한다.. 나중에 누나가 할머니가 돼도 꼭 기억해야 해.. 알았지?

 

그리고 내친 김에 미래의 교황님께 아부도 합니다...

- 있잖아.. 그럼.. 그 때 가서 누나 해설시켜 줄래??

그러면 그 녀석은 자못 너그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 누나, 실수도 많이 하고 성가도 잘 못부르고.. 알렐루야도 이상하게 하잖아.. 그래도 돼?

그럼 이 녀석의 눈빛이 약간 흔들리죠.

그리고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대답합니다.

- 지금부터 열심히 연습하세요. (역시 호락호락하진 않습니다.)

 

중학생 녀석들은 중학생 녀석들대로 능청스러움이 귀엽고..

초등학생 녀석들은 초등학생대로 그 순진함이 사랑스럽고..

참 저는 복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은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걸 보면 말이죠.

 

전 이렇게 멋진 남자들과 만나면서 삽니다..

이렇게 점잖고, 품위있고, 대견하고, 의젓하고, 그러면서도 귀여운 남자들..

이 녀석들 말고 또 있을까요?

 

아무쪼록 이 녀석들..

언제나 그렇게 밝은 웃음과 해맑은 표정을 간직하길..

그리고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소망들이..

주님의 도우심으로 무럭무럭 자라..

듬직한 나무 되어 참으로 큰 일꾼이 되길..

두 손을 모아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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