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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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수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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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14 ㅣ No.1566

참된 가난은 능동적으로 무엇을 버리는 게 아니라,

그렇게 버릴 것조차 없는 상태를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도자는 바로 그런 가난에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대에게

먹여 주고

적셔 주고

맞아 주고

입혀 주고

돌봐 주고

풀어 주는 것과 같은

그 모든 것을 주는 자는 오직 하느님뿐이 되니,

그런 지극한 수용성 속에서 그대는

절대적 존재 곧 하느님나라의 사람이 된다.

거기에다 수도자가 가난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가난한 자가 있기 때문에

가난해져야 하는 것이다.

곧 수도자의 가난은

그 어떤 신심적이고 수덕적 열매라 할 수 있는

가난이 지닌 은총적 자유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正義)에 입각해

그야말로 오직 남을 위해서 그것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이 땅 가장 가난한 자가 금덩이를 지니고 있다면,

수도자도 비로소 금덩이를 지닐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런 사랑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가난을 품을 때,

이기심의 함정에서 결코 빠지지 않게 된다.

왜냐면 그것은 가난한 이웃의 아픔을 내 것으로 하는,

결국 함께 나누는 마음이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러할 때

가난을 머리 속으로 미화하는 짓과 같은

가난에 대한 낭만적인 감정에 빠지지 않게 된다.

물질적인 가난은 분명 생명의 악이다.

보다 확실히 표현한다면

생명에다가 악의 가능성을 심을 확률이 높다.

참으로 가난은,

특히 비인간적인 요인이 되는 가난은

결코 좋은 게 아니고 분명 악(惡)이다.

특히 부익부빈익빈이 낳은 구조적인 가난은

반드시 극복하고 개선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수도자는 왜 스스로 가난을 취해야 하는가.

수덕적 의미는 제처두고 말한다면,

첫째는

가장 단순한 이유이지만 앞에서도 얘기했듯

이 세상에 가난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자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수도자가

그걸 외면하고

홀로 기름진 배를 지닐 순 없는 것이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수도생활의 목표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사회구성원의 80%를 차지하는 일반대중

곧 민중들이 처해 있는 삶인 그런 가난 속에

영생의 길이 있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하느님은 어느 곳에도 계심을,

따라서 그 어떤 어둠도 빛을 이길 순 없음을,

곧 구원자 예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가난이 만든 굴레에서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참되게 옳게

그야말로 사람답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직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가난을 취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럴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그 순간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우리가 위로를 받고 고난 극복의 힘을 얻게 되듯,

가난 속에 영생의 길이 있음을

몸소 실천적으로 증거하는 교회를 분명히 ’보고’

그들도 교회가 제시하는 인간화의 과정

곧 구원의 길을 긍정하면서

그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곧 수도자는 이웃사랑 때문에 가난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 때문에 기꺼이 참는 마음,

그 마음에서 또한 참사랑이 솟구치게 된다.

그럴 때

가난이 지닌 악성은 제거되고, 관계는 풍요로와 진다.

사실 가난이 지닌 악성은 궁극적으로

차별에서 비롯되는

이른바 상대성 가난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자 때문에,

힘센 자 때문에,

더 많이 지닌 자 때문에,

더 잘 사는 자 때문에,

가난한 자의 가슴에는

한(恨)과 같은 악(惡)이 심어지게 된다.

즉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가난한 자의 자기현실 인식에서

가난의 악성(惡性)은 비롯된다.

교회만큼은

이 땅의 가난이 내뿜는 악성

그 한(恨)을 해독(解毒)시키는 존재가 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오직 먼저 스스로

가장 가난한 자가 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와 똑 같게 낮추시어

강생육화하심으로 해서 구원을 이루셨듯,

남을 구원하려면 우리도

그와 똑같은 위치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한다면

그런 위치로 하느님을 모셔 가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느님을 모셔 가 그들의 손을 잡고서

함께 구원에로 다시 올라오는 것이다.

그것이 케노시스의 진정한 의미요

하느님의 선교(미씨오 데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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