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자유게시판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스크랩 인쇄

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3-03-22 ㅣ No.50083

사순시기가 되면..

전 늘 막중한 심적 부담감에 시달리곤 합니다.

바로 사순 시기 동안 고해성사를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죠.

 

때가 되면 집중 판공이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냐고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판공’이란 말만 들어도 온 몸을 부르르 떨게 되는 악몽과 같은 기억이 있답니다. (정확히 7.5배 과장했음.)

 

예전에 제가 다니던 본당은 아주 작은 본당이었습니다.

듣자하니 서울에서 가장 작은 본당이라고 하더군요.

이런 지경이니.. 척하면 척이라고..

누구와 누가 말다툼을 했다더라.. 이런 조그만 일만 있어도 성당에 파다하게 소문이 날 정도였죠.

 

그러니 본당에서 활동 꽤나 한다는 사람들은 거의 가족처럼 지내야만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연히 목소리만 들어도 누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맞출 수 있을 정도였답니다.

 

한창 본당에서 활동을 하며 단체장을 할 때..

그러니까 사순 판공 기간이었습니다.

저 역시 명랑쾌활한 마음으로 부활을 맞기 위해 판공성사를 볼 요량이었죠.

 

근데 문제는..

그 당시 제가 성당일을 하면서 주임신부님 때문에 적잖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는 거였습니다.

신부님 앞에서는 감히 뭐라 말씀드릴 수 없었지만... 뒤로 돌아서서 궁시렁대기를 몇 달..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엄청 받고 있었습니다.

보좌신부님이 안 계신 까닭에 주임신부님은 어렵기만 했거든요.

 

하지만 별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판공성사는 봐야 했고 남김없이 죄를 다 고해해야 하는 한 적당히 가감해서 고해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고민고민하다가 전 가장 신자들이 많이 몰릴 시간을 택했습니다.

그 절호의 기회는 집중 판공 마지막 날!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누가 누군지 알아보실 경황이 있으시겠어?’

길게 죽 늘어서 있는 신자분들 뒤에 슬그머니 줄을 섰죠.

그리고 고해소로 쓱~ 들어갔습니다.

 

뭐 얼굴이야 신부님께서 보실 수 없으실테니 변장을 할 필요는 없을테고..

나름대로 목소리를 최대한 깔고 말투와 억양을 달리 해서 다른 사람인 척 가장함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주절주절 고해를 했죠.

물론 ’신부님 때문에 반쯤 돌아버릴 지경입니다.’라는 말씀은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우회적으로 표현을 했죠.

- 성당 일을 하다보니.. 때로는 격하게 화를 내기도 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안 보이는 곳에서 다른 사람 험담도 했습니다.. 어쩌고 저쩌고.. (물론 그 ’누군가’와 ’다른 사람’에 신부님도 해당되시노라는 말씀은 차마 못 드리고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신부님께서 아무 말씀을 안 하시는 겁니다.

고해소에는 침묵만이 흐르고..

하.. 큰일났다.. 너무 솔직히(?) 고해했나 보다.. 그래도 설마 알아채신 건 아니겠지..?

등에서 식은 땀이 났습니다..

몇 초의 순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신부님의 한 마디에 전 졸도하는 줄 알았습니다.

- 그래, 베로니카야..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 !!?? (딱.. 걸.. 렸...다..)

 

어떻게 고해소를 나왔는지 기억도 잘 안 납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몇 달간 신부님만 뵈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슬그머니 피해다니기에 바빴죠.

그 다음부터 신부님 앞에서 바로 꼬랑지 팍 내렸음은 물론입니다.

 

 

...........................................

 

 

그 다음 해 사순을 맞이했을 때는..

전 해에 된서리를 한번 호되게 맞은 터라..

또 다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전 다른 본당으로 ’원정’ 고해성사를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마침 그 때가 중간고사 기간이라 정신이 없을 때였죠.

아무래도 멀리까지 찾아가기는 무리이고.. 어떡 한다..

혼자 머리를 또르르 굴리다가.. 반짝!!

전 학교 오는 길에 성당 표지판을 본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 OO성당 50m ]

흐흐흐.. 집에 가는 길에 가뿐하게 고해성사를 보고 가면 되겠다..

전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학교 앞에서 버스를 잡아 탔습니다.

 

근데 웬걸..

무심코 잡아 탄 버스가 바로 다음 교차로에서 엉뚱한 곳으로 우회전을 하더군요.

어어어.. 이게 뭐냐.. 이게 왜 이리로 가지??

어리둥절해 하다가 일어나 노선표를 살펴 보니..

제가 그만 버스를 잘못 탄 거였습니다.

우씨.. 이런 낭패가 있나..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한다냐..?

뜻하지 않았던 돌발상황에 멍해 있는 와중에도 버스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고만 있었습니다.

 

사정이 이쯤 되면..

그저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리에 털퍽 주저앉아 멍하니 버스 창 밖을 바라보며..

’재수도 지지리도 없지’를 한탄하던 저..

그렇게 몇 정거장을 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창 밖 너머 전봇대에 ’천주교’라는 표지판이 얼핏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잠깐만요.. 세워주세요~~~~

막 정류장을 떠나려는 버스를 급히 세워서 허겁지겁 내렸죠.

그럼 그렇지.. 동네마다 꼭 하나씩 있는 게 성당 아니겠어? 오호홍..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니까..

 

그리고 저는 헐레벌떡 그 표지판 앞으로 다가섰습니다.

씩씩거리며 전봇대 앞에 서서 전봇대를 올려본 다음 순간..

전 전봇대를 붙잡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습니다..

으아아아.. 말도 안 돼..

 

그 전봇대에 붙어 있던 글씨는..

다름 아닌.

.

.

.

.

.

.

.

.

.

척.추.교.정.

 

워낙 눈이 나쁜 탓에 ’척추교정’을 ’천주교’로 잘못 본 거였습니다.

게다가 ’척추교정’의 ’정’자는 각종 먼지로 뒤덮여 흐릿하게 가려져 있었구요..

 

발끝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이쯤 되니.. 은근히 오기가 치밀었습니다.

이렇게 물러날 수야 없지. 오늘 시험공부를 파하고라도 고해성사를 보고야 말테다.

 

그리고 전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세히 노선표를 살펴보니 혜화동으로 가는 버스가 있더군요.

한참을 걸려.. 전 혜화동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소기의 목적대로 고해성사를 보고야 마는 위업을 달성했죠.

 

본당을 피해 최소한의 시간을 들여 판공을 보겠노라는 얄팍한 계산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학교에서 40분 동안 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그 만큼의 시간을 들여 집으로 돌아왔으니..

아마 제가 살아오면서 본 고해성사 중 가장 힘들고 고되게 본 고해성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다음부터 전 다짐한 바가 있습니다.

우왕좌왕하면서 판공성사를 다급히 해치울(?)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준비하는 마음으로 봐두자.

 

올해 사순만큼은..

3월이 가기 전에 판공 꼭 볼랍니다.

고해소 안에 음성변조기가 설치되지 않는 이상..

아마 올해도 다른 본당을 찾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칫 줄 잘못 서서 지도 신부님께서 계신 고해소에 들어갔다간..

베로야. 죄도 지지리 많이 짓고 사는구나.. 하시는 신부님의 천둥과 같은 목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513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