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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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호신부님의현언론사태에관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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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열 [gapyul] 쪽지 캡슐

2001-07-20 ㅣ No.22699

정화의식/ 박기호

 

 언론사의 불법 탈세에 대한 조사 고발로 세간이 뜨겁다. 추징액을 우선 독자에게 공표하고 사과하면서 반론 절차를 제기하는 언론사도 있고, 반면 `길들이기 탄압’이라고 저항하는 언론사들도 있다. 여야 정당도 대립적 진영으로 공방한다. 혼돈일 뿐이다.

 

중세기 그리스도 교회는 개혁을 요구하는 당대의 흐름에 스스로 쇄신하지 못했고, 마침내 이른바 종교 개혁의 강을 만나게 된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자신이 성서학 교수로 있던 독일 위텐베르그 대학 교회에 쇄신을 주장하는 95개 조문의 대자보를 붙임으로서 논쟁의 불을 지폈다. 2년 동안의 공방으로 독일 전역의 전폭적인 세력을 얻게 되는데 지방 제후들의 정치적 지원도 있었지만, 토론의 진행 상황과 내용을 유인물로 만들어 길거리에서 뿌리며 논쟁을 주도했다고 교회사에 기록되어 있다. 거대한 로마 교회에 맞서 대중들에게 직접 나서 열렬한 지지를 모았던 것이다. 이것도 세계 언론사에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상 최초의 전단지’라고 한다.

 

우리에게도 신문·방송보다 대학과 재야에서 만들어 낸 한두 장짜리 유인물이 소중하게 읽혀지던 시절이 있었다. 루터의 전단지도, 반독재 저항의 유인물도 모두 `언론이란 무엇인가’ 를 정의해 준다. 언론은 진실을 알려내는 사도이다. 진실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신뢰와 도덕성이 생명이다. 언론의 능력과 도덕성은 `가난’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잃을 것 없어 위협받을 것도 없는 것이 청빈의 무기이고 거기에 정의와 민중성이 있다. 부유한 언론은 정세마다 강자의 편에 서고 공존보다는 힘의 대결을 선호하고 때에 따라 사보로 전락한다.

 

정치적 암흑기에는 저항이 나타나게 마련인데 희생에도 일련의 순서가 있다. 외치는 자가 먼저 죽고 행동하는 자가 뒤이어 수난 당하는데, 끝까지 관망하는 자는 열매를 먹게 된다. 언론은 분명 외치는 자다. 그래서 일제 때 많은 선각들이 투옥되고 신문들은 폐간되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언론은 어찌 `외치던 양심’들을 내쫓고도 이제 민주화에 이르자 그 열매를 차지하고서 `언론의 자유’를 방패삼으려 하는가.

 

결사항전 태세로 저항하는 족벌 언론들은 한없이 억울한 모양이다. 하지만 무엇이 억울하고 어떻게 재갈 물리기가 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탈세도, 편법 상속도 장사하는 재벌 기업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자신들이 휘둘러 왔던 정의의 채찍은 어디로 간 것일까? 국가 기관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묵인되어 왔을 뿐일 것이다. 상식으로 볼 때 언론사 부정의 은폐 내용 자체가 바로 정부에 대한 약점이요 간섭에 대한 빌미 요소 아니겠는가.

 

독존과 관행의 언론에게 이번 조사는 분명 한번은 반드시 넘어야 할 정화 의식임이 분명하다. 그 다음에 오는 도덕적 정결로 권력의 간섭 요소는 사라질 것이다. 정화에는 상처도 있게 마련인데 상처받는 권위가 두려워 거부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혼돈의 본질이다. 하느님의 창조 이전도 혼돈이었다. 창조의 방법은 갈라내는 것이었다. 오늘의 혼돈은 옳고 바른 것과 그른 것, 본질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창간 정신과 타성적 현실, 경영과 편집의 갈라냄을 통해서 새 질서가 나타날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도록 질책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다.

 

박기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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