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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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신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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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일수 [paulk] 쪽지 캡슐

2000-08-26 ㅣ No.13474

한국천주교회에서 "참된 세상,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자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정성과 노력으로 개통된 굿뉴스사이트의 최근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며 잠시 아래 기사를 인용합니다.

 

어제 mbc의 "다큐멘타리극장"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합니다. 문정현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시간나시면 읽어보심을 권해드립니다.못보신 분들은 mbc인터넷을 통해서 재방송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아래의 글은 "인터넷 말"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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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승천축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님께서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해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신 것을 축원하는 날입니다.”

6월 4일 오전 7시 20분. 전북 익산시 월성동 한적한 농촌마을에 위치한 ‘작은 자매의 집’ 성당 안. 검게 그을린 얼굴에 은빛수염이 인상적인 노신부가 강론중이다. 성당 안에는 20여 명의 아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보모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 신부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다.

 

“진정 주님의 삶을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올라가신 빈 하늘만 보고 있어선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 억울하고 힘없는 이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세우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삶이야말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강론이 끝나고 영성체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이내 와글와글 했다. 잔뜩 기대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노신부는 일일이 사탕 하나씩을 입에 물려주었다. 의사표현조차 서툰 정신지체아들의 입 속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넣어주는 그는 바로 문정현 신부(61, SOFA 개정 국민행동 상임대표)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새삼 그가 신부임을 실감했다.

 

“매향리 투쟁은 민족자주의 가늠자”

 

애초 문정현 신부와의 인터뷰는 6월 3일 오후 3시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6월 2일 매향리 미군폭격장 주민대책위원장인 전만규씨(45)가 시위도중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은 문 신부가 3일 새벽 급히 경기도 화성경찰서로 달려가는 바람에 기자는 익산에서 하루 밤을 보내며 그를 기다려야 했다.

다음 날 아침 6시 30분. 차를 몰아 ‘작은 자매의 집’을 찾으니 제일 먼저 반겨준 이는 아이들이었다.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을 느낄 법도 하건만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기자의 가슴에 안기고 팔다리를 붙잡으며 정신없을 만치 환영인사를 건네 왔다. 모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이중삼중의 지체아동들이었다. 그중 얼마전 가출을 했다가 거지꼴로 되돌아왔다는 영훈(15)이는 “아저씨, 신부님 만나러 왔어? 우리 신부님 요새 미국놈들 하고 싸우느라 바뻐. 근데 신부님이랑 미국놈이랑 싸우면 누가 이겨?”하며 물어오기도 했다.

 

미사가 끝나고 아침식사 시간이 되었다. 왁자지껄한 아이들이 온통 음식을 흘리며 밥을 먹는 동안 문 신부는 아이들을 어루만지며 아픈 곳은 없는지 보살폈다. 전날 밤 12시가 넘어서야 화성에서 돌아온 데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와 대책회의로 피로한 몸이지만 그는 아이들을 통해 새 힘을 얻는 듯했다. 자연스레 인터뷰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시작됐다.

 

전만규 위원장은 만나셨습니까.

“경찰서장이 죽어도 나하곤 면회를 못 시켜 준다더만. 뙤약볕에 경찰서 앞에서 주민들과 함께 다섯 시간 동안 실랑이를 벌였는데도 요지부동이야. 구속영장을 신청한 경찰도 문제지만 영장을 발부한 판사가 더 큰 문제야. 도대체 민족의식이 뭔지 생각이나 해봤는지…. 6일에 대규모 규탄집회가 다시 열리니 올라가야지. 요번 매향리 싸움이 미군기지 철폐운동의 분수령이란 각오로 전국에서 다들 달라붙어야 돼.”

최근 미대사관 앞과 매향리 사격장 등에서 SOFA 개정 국민행동 상임대표로 숱한 집회를 이끌고 계신데 건강은 괜찮으신 겁니까.

 

“다 하느님이 주신 목숨인데 별일이야 있을라고. 작년에 협심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서 걱정들 하는데, 염려 마. 아직 괜찮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지금 문 신부의 건강은 말이 아니다. 올해 예순 하나. 고령의 나이다. 게다가 민중들의 투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쫓아가는 천성 덕택에 30년 가까이 막 굴려온(?) 몸이었다. 특히 1975년 4월 9일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이 사형집행을 당한 날, 문 신부는 시신마저 탈취하려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온몸으로 맞서다 차량에 깔리는 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 후유증으로 내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야만 했다.

 

또 지난해 여름 군산 기아특수강 해고노동자 2명이 경찰에 구속되었을 때, 문 신부는 혼자 군산시청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노천 단식농성에 돌입한 일이 있었다. 결국 구속방침은 철회시켰지만 문 신부는 8일간의 단식 후유증으로 병원에 실려가야만 했다. 협심증이었다. 20여 일 간의 입원 끝에 퇴원은 했으나 과로하면 절대 안 되는 상태다.

요새도 대책위원장직을 많이 맡고 계십니까. 신부님더러 ‘대책위원장 신부’란 말도 합니다.

 

“(웃음) 글쎄, 나도 다 셀 수 없어. 하여튼 찾아와서 요청하면 다 승낙하니까 많긴 많을 거야.”

 

문 신부는 얼마 전까지 기아특수강, 만도기계, 카케리어 등 지역 노동분규 현장의 대책위원장을 맡았고, 최근에는 군산개정병원 대책위원장과 민주노총 전북본부 고문을 맡고 있다. 또 미군기지우리땅찾기 시민모임, 새만금 간척공사 반대운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인혁당사건 희생자 추모사업, 대인지뢰, SOFA 개정 등 문 신부가 대표 혹은 위원장으로 참여하는 단체는 다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젊은 사람도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활동력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사제의 직이란 게 뭐겠어. 결국 주님의 가르침 따라 역사의 사건에 현존하고 연대하고 동참하는 것 아니겠어? 특히 가난하고 억울하고 소외받는 이들의 삶의 현장에 함께 서 있는 것이야말로 사제의 역할이지. 난 그 역할에 충실할 뿐이야. 그것이 나의 신앙인 셈이고.”

 

“이놈들아, 화염병 더 가져와!”

 

그랬다. 그의 철학은 오직 한가지였다. 사제는 민중의 삶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 해고노동자들이 텐트농성을 하면 그곳으로 달려가 그들과 함께 먹고 잤으며, 노동자들이 구속되면 혼자서라도 경찰서 앞에서 진을 치고 농성을 벌였다. 이런 문 신부를 지역의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아버지’로 부르며 진정으로 따랐다. 그가 주임신부로 있는 성당은 항상 노동자들의 안식처이자 근거지가 됐다. 그렇게 30년을 보낸 문 신부였기에 지난 5월 20일 그의 회갑날에는 몰려든 노동자들로 ‘작은 자매의 집’이 온통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신부님에 대한 노동자들의 마음이 특히 각별하더군요.

“내가 70년대부터 제법 명망가로 인정받고 있잖아. 근데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은 지금 모두 다른 길을 걷고 있어. 새천년민주당에도 가 있고, 청와대, 심지어 관변단체에도 들어가 있더군. 물론 나도 대표적인 친디제이 인사라고 할 수 있지. 지금도 디제이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으니까. 하지만 디제이 정부 출범 후 적어도 노동문제만큼은 유신시절로 되돌아갔어.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백안시하는 것도 여전하거든. 그 투쟁을 지지하고 함께 했을 따름이야.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노동자들이야. 나의 눈을 틔운 것도 노동운동 덕택이고, 이 나이에 여전히 현장을 지키도록 만든 것도 다 노동자들의 힘이야.”

 

노동자들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한가지.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 전북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문 신부는 익산 창현성당 주임신부로 일했는데 그 지하에 노동자의 집 사무실이 있었다. 한 날은 시위도중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만신창이가 된 노동자들이 성당 지하 사무실에서 화염병을 제작하다 문 신부에게 들킨 일이 있었다.

“밤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내려가보니 ‘그 짓거리’를 하고 있더군. 버럭 소리지르며 못하게 제지했지.”

 

하지만 노동자들은 문 신부가 잠든 새벽 2시부터 몰래 작업을 계속 했다. 다음 날 문 신부는 노동자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했다. 이날도 경찰의 폭력진압이 자행됐고, 노동자들은 준비된 화염병을 던지며 맞섰다. 경찰의 폭력진압을 직접 겪어본 문 신부는 화가 나서 “이놈들아! 화염병 더 가져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밤새 제작한 화염병은 이미 바닥난 상태. 문 신부는 “밤새 만들면서 겨우 그것밖에 못 만들었냐”고 구박해 노동자들은 몸둘 바를 몰랐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문 신부와 노동자들이 일체감을 이루게 되었음은 당연한 일. 그후 노동자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문 신부를 찾았고, 문 신부는 그들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주었고, 잠자리가 필요하다면 잠자리를 주었다. 피신처가 필요하다면 그들을 숨겨주었고, 끌려가면 경찰서로 쫓아가 기어이 풀어놓게 만들었다.

 

악명(?) 높은 ‘깡패신부’

 

문득 지난 5월 16일 미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SOFA 개정 촉구시위가 떠올랐다. 집회를 마친 시위대가 미대사관을 향하자 경찰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시위대와의 몸싸움이 시작되면서 문 신부가 대열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경찰대열에서 누군가 “야, 조심해 ‘깡패신부’다”라고 말했다. 제일선의 전경들은 급히 모자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 모자며, 카메라며, 무전기며 닥치는 대로 강탈하는(?) 문 신부의 ‘악명’이 서울까지 파다했던 것이다.

“이놈들아 썩 비켜라.” 지팡이를 휘두르며 나타난 문 신부는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왕좌왕 하며 흔들리던 전경들은 문 신부에게 지팡이 세례를 톡톡히 받고 말았다.

 

집회 때마다 과격하기로 유명한데 혹시 ‘신부가 너무 심하다’는 소린 안 듣습니까.

“싸우기로 작정한 이상 몸을 던져야지. 그 각오가 없이는 이길 수 없어. 분노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주님의 가르침이야.”

 

이런 문 신부의 과격성에 대해 SOFA 개정 국민행동 김종섭 사무국장(32, 군산 미군기지우리땅찾기 시민모임 사무국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부님은 자신이 앞장서 싸워야만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또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지내시다 보니 민중적 정서가 몸에 배어 있어요. 술 한 잔 마시고 노래도 하고, 욕도 하면서 늘 민중들과 일체감을 이루시지요.”

그 때문인지 문 신부는 연행 경력이 화려하다. 지난 1998년 9월 만도기계 전면파업 당시 익산공장에서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경찰이 강제진압하자 맨몸으로 저항하다 사지가 들린 채 끌려가기도 했다. 또 1999년 8월 군산 미군기지―미 제8전투비행단 울프 팩(Wolf Pack) 앞 집회에서는 미군헌병들에게 끌려가 뒤로 수갑이 채워지는 수모를 겪은 일도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모인 노동자들의 시위로 그날 도로가 마비되고 시가지가 온통 떠들썩했다고 한다. 특히 이 사건은 지역 노동자들의 반미의식을 크게 고양시켰다. 그뒤 군산지역의 미군기지 반대투쟁에는 항상 노동자들이 앞장서고 있다. 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 권태홍 사무처장(37)의 말이다.

 

“노동자들의 문제에 발벗고 나서는 신부님께 고마움을 느낀 노동자들이 미군기지 싸움에 적극 참여하다보니 어느새 노동운동과 반미운동이 자연스레 결합하게 됐습니다. 군산, 익산지역은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단결력이 상당히 높은데 여기에는 신부님의 역할이 컸습니다.”

 

최근 국민들의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전개해 온 신부님으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네요.

 

“첫걸음을 뗀 셈이지. 아직 가야할 길이 멀어. 미국놈들의 가슴이 뜨끔해졌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식민지 종주국의 자세에서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군산에서 미군부대로 항의서한을 보내면 항상 ‘수취인불명’으로 되돌아와. 그래서 직접 찾아가면 대문 걸어잠근 채 ‘울타리 사이로 건네라’고 하거든. 그래서 내가 ‘직접 사람이 오면 정중히 맞을 줄도 모르냐’고 호통쳤지. 미대사관도 마찬가지야. 저번 집회 때 항의서한 들고가니까 가건물 골방에서 한국사람인 3등 서기관이 나와 문틈으로 받아가더군. 이게 그놈들 생각이야. 한마디로 한국사람은 인간취급도 안 한다는 거지. 이처럼 주권국가로서 대등한 관계를 맺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야.”

그래도 얼마 전 주한 미 부대사가 직접 만나자는 연락을 하기도 했단다. “급해지긴 급해졌던 모양이지. SOFA 개정 국민행동의 논의를 거쳐 만나겠다고 모처럼 배짱 퉁겼지.” 껄껄 웃는 문 신부의 표정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사제인 우리가 임수경을 지키자”

 

1998년부터 군산에서 17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미군기지우리땅찾기 시민모임을 만들어 매주 금요일이면 미군부대 앞 집회를 주도해온 문 신부는 “미군기지 공여지 문제와 SOFA 개정, 미군범죄가 군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역차원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작년부터 전국적 싸움을 구상했다. 그리고 군산지역의 간부를 서울로 보내 ‘SOFA 개정 국민행동’ 결성을 적극 제안해나갔다. 사무실도 없이 시민단체를 전전하며 한 달에 한 번씩 미국대사관 항의투쟁을 지속한 결과 마침내 작년 10월 범국민적 연대조직을 결성해냈다.

 

특히 미대사관 옆 공원인 ‘열린마당’에서 집회를 개최할 때 경찰 측은 “외국공관 건물 1백m 내에서는 집회가 불가능하다”는 법조항을 내세워 집회를 막고 나섰다. 문 신부는 “직접 재 보자, 1백m가 넘는다”며 그대로 밀어붙였고, 그의 고집 덕택에 지금도 이 ‘불법집회’는 계속되고 있다.

일전에 집회장에서 기자들에게 호통치신 일이 있었죠.

 

“호통쳤지. 매향리사태 후 언론보도가 이어지고, 나한테도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더군. 그래서 ‘이것들이 미쳤나, 평소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싶어 집회 때마다 한소리씩 하지. 50년간 숱하게 겪었던 미군의 범죄적 만행을 의도적으로 외면해 온 언론이 지금처럼 관심 갖는다는 건 국민의식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겠지. 『조선일보』조차 ‘반미감정 일어나지 않게 확실히 개정하라’고 촉구하잖아. 내가 기자들을 호통친 이유는 기자들이 깨어있어야 하기 때문이야. 기자야말로 누구보다도 민족정신이 투철해야 돼. 부나방처럼 굴어선 절대 안 돼지.”

한편 문 신부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1989년 당시 전대협 대표로 방북한 임수경씨를 보호하기 위해 동생인 문규현 신부를 파견한 일이다. 이 때문에 그도 상당히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7월 말 사제단 회의 때 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지. ‘가톨릭 신자인 임수경을 저대로 놓아둘 수 없다. 이미 그 집안은 쑥대밭이 됐는데 그들을 우리가 지켜줘야 하지 않는가. 신부를 보내 임수경과 함께 오도록 하자’고 제안했지.”

문 신부의 제안은 8월 5일 사제단 상임위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문제는 ‘누구를 보내느냐’였다.

 

“적임자는 미국에서 공부중인 문규현 신부라고 생각했어. 당시 동생은 미국공부를 마치고 필리핀으로 발령 날 예정이었지. 마침 전주교구에서 미국 교포사회를 방문하는 신부가 있길래 사제단의 결정사항을 문규현 신부에게 전했어. 동생은 크게 고민하고 갈등했다고 하더군. 결국 그 결정을 문규현 신부가 수용했어.”

 

비밀리에 방북을 준비하면서도 부담이 많이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교단 내에서 쏟아질 비난이 마음에 걸렸다. 궁리 끝에 찾은 묘안은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하마오 주교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승낙을 받는 일이었다. 과거 일본 적군파에 의해 비행기 납치를 당했다가 평양에서 풀려난 일이 있는 하마오 주교는 남북관계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던 터라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이것이 후에 교단 내의 비난여론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장애아동 키우는 노신부의 소망

 

“이 과정을 거치면서 통일문제에 눈을 떴지. 통일논의를 활성화하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싸움에 사제단이 앞장 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문규현 신부의 방북결정 덕택이지. 더구나 우리민족의 통일은 성서적 견지에서도 마땅히 실천해야할 일이야.”

문규현 신부의 방북을 결정했을 때, 아마도 그는 조성만 열사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1988년 5월 카톨릭회관 옥상에서 ‘조국통일’을 외치며 할복 투신한 조성만 열사(요셉)는 바로 문 신부가 전주 중앙성당에서 직접 영세했던 잊지 못할 제자였다.

식사를 마친 뒤 서재로 옮겨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문 신부와 함께 ‘작은 자매의 집’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아이들이 몰려나와 문 신부의 품에 안겨 재롱을 부렸다.

자매의 집은 언제부터 운영하셨습니까.

 

“아이들은 1986년부터 돌보기 시작했어. 그러다 1988년부터 전주교구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다 건물을 하나둘씩 짓기 시작했지. 2년 전부터는 아예 이곳으로 이사왔어.”

1986년 문 신부는 전북 장수군 장개성당에서 주임신부로 근무했다. 당시 새마을운동본부장으로 있던 전경환씨(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가 병든 수입소를 들여오는 바람에 일어났던 ‘소파동’의 여파는 장수군에도 불어닥쳤다. 격렬하게 전개된 농민들의 소싸움에 뛰어든 문 신부는 연일 단식과 항의농성으로 바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자연부락을 돌던 중 한 집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부모가 들일 나가면서 아이를 마당 감나무에 묶어 놓은 것이었다.

 

“아이 옆에는 음식 그릇이 놓여 있더군. 완전히 개를 키우는 꼴이었어. 순간 눈물이 왈칵 치솟았어. 이 아이를 두고 내가 무슨 목회며, 농민운동인가 싶더군.”

성당 옆 묵은 창고를 개조해 방을 들여놓고 낮으로는 그 아이를 데려다 돌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늘다보니 어느새 10여 명이 되었다. 그후 1988년 현재의 ‘작은 자매의 집’ 자리에 있던 집을 인수해 아이들을 본격적으로 돌보기 시작했다. 주로 시청이나 경찰서를 통해 소개받은 버려진 정신지체, 중복장애아동들이었다. 현재 돌보는 아이들은 38명. 그 아이들에게 문 신부는 바로 아버지인 셈이다. 아이들에 대한 문 신부의 정은 각별했다. 쉴새없이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들을 일일이 안으며 그가 한마디했다.

 

“젊고 생각 바른 신부가 몇 명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 사회운동은 젊은 신부들에게 물려주고 자매의 집에만 몰두하시려고요?

“이 사람, 정 반대로 생각하네. 그게 아냐. 나같이 바쁜 사람보다 더 많이 아이들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지.”

아이들이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평등세상, 통일세상을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하겠다는 노신부의 다짐이 새삼 긴 울림으로 남았다.

 

 

글 안영민 기자 ymahn@digitalm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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