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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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profound understanding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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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3-12-30 ㅣ No.230282

새로운 차원의 이해 I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이집트를 바꾸는 일 같은 일은 하시지 않는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우선적인 일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과 법에 따라 살며 스스로의 성화와 의화를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본질과 전능에 의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 가르침과 계명을 통해 이스라엘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어떤 악도 선에 의해 선으로의 강요를 받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악에 의한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사람들이 죽지 않고, 죽음을 맞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느닝의 외아들인 예수도 이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살며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부활에 이르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사람들에게 주고 간 것이다
그런 길을 하느님이 예수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 준것이다
안 그랬다면 사람들에겐 영원히 희망이란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악한 사람들과 죄가 많은 이들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러면 하느님은 어째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머무르며 성화되는 길, 하느님의 뜻과 법에 따라 사는 길을 가도록 하시지 않았을까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도 그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잘 이해할 것이다
이 땅에서도 식민지 35년의 치욕스런 시기를 보냈으니 보다 더 깊은 이해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일제 강점기 때 이 땅에는 학부가 딱 3개인 대학이 하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제가 식민지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대학 설립 자체를 막았다고 한다
이런 저런 역사적 사실들을 볼 때, 피지배민들에 대한 지배 권력의 입장은 대체로 다루고 부리기 쉬운 짐승들로 길들이는 게 정책적 방향에서 항상 우선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의지와 능력이 있는 신 존재는 그런 인간들과 그런 인간들이 손아귀에 쥐고 있는 권력과의 투쟁이 불가피하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유혈 투쟁도 불사하면서 말이다
파라오의 거부?, 거역 10번은 아마도 약과이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군대를 투입해 끝까지 자신의 의지로 아까운 노예들이, 무상의 도구들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일을 저지하려 했던 것도 말이다
탈출기에는 세상 속에서의 투쟁이 아닌, 아주 젠틀하고 카인드하게 좋은 말로 파라오에게 요청하고 부탁 아닌 부탁 식으로 그 시작이 시작된다
엄연히 말해 이집트 내에서의 투쟁은 하느님의 계획에는 없는 것이다
분명히도 말이다
카톨릭의 오랜 역사에도 성경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이 그런 여러 견해와 의견들을 밝히기 마련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이집트의 고된 종살이와 인간 이하의 삶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의 이주는 이집트에서의 탈출, 하느님 방식의 이끔이 전제되고 조건화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습성과 상태로는 가나안에서의 평화와 선, 참된 행복은 쉽게 보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탈출기 여정 내내 이스라엘이 보여준 갖은 악습과 병폐로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집트의 고된 삶에서 빠져 나왔다고 해서 눈 앞에 당장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가나안의 복된 땅에 이르기 전에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과 법에 맞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모든 일과 사건에서 표징처럼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복된 땅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스스로들이, 서로 함께 평화와 선을 이루고, 참된 행복을 살려면 스스로의 인격들이, 공동체의 성격이 하느님의 뜻과 법에 맞게 성화되고 의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모든 이와 모든 공동체의 지상과제와 과업임이 언제나 간과될 수 없으며 소홀히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집트를 바꾸는 일 같은 일에 대해 사람들은 그 어떤 성공도 장담할 수 없고, 많은 실패의 후폭풍을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죄악이라는 것의 시작되었음을 깊이 이해한다면 그것은 존재 차원의 일이지, 환경 차원의, 많은 상황 속의 일만은 아닌 것이다
가장 완벽한 환경에서 벌어진 일이 그보다 덜하고 혹독한 환경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덜하거나 작거나 하지는 않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죽음과 가시덤불 더미를 본다면 말이다
선악과의 현존은 인간 의지와 상관없이 있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있으므로 해서 인간 욕망의 선택과 그것이 불가분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인간 의지와 상관 없이 있게 된 것이고 현재해 있는데.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마음대로 또한 그것을 없애거나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카톨릭의 거의 모든 학자들이 말하는대로 인간에게는 자신의 욕망과 선택이 언제나 삶의 몫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첫 인간들처럼 그 선택의 굴레는 불가피하고 모든 것은 정의대로 이루어질 뿐이다
모든 장례식장에서 보듯이 죽음을 구체적으로 보고 겪으며 그렇게 사람에게 내려진, 닥친 삶의 진실을 하느님이 말씀하신대로 알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렇게 있는 그대로 사람들의 삶에 함께 하게 된다
지금 시대의 기후 변화와 관련해 세상 사람들은 환경 재앙이라는 말은 쓰는데 그것은 올바른 말이 아닌 것 같다
자연처럼 E=mc2와 같이 자신의 원리에 철저한 것은 없다
모든 귀엽고 예쁜 아기들의 출생을 보면 뚜렷이 느끼고 알 수 있는 일이다
삶의 아주 가까이에서 말이다
그런 자연의 오차가 거의 없는 완벽한 질서의 유지는 지금까지 지상의 모든 것이 살아오게 만든 하느님의 본질과 전능이 투사되는 실제를 드러내고 그 실제는 E=mc2와 같은 원리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제 알아야 한다
무엇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지 말이다
자연 현상이란 바로 그런 원리의 반영이자 투사이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구원의 역사란 엄밀히 말해 시대적인 것은 아니다
시대적인 영향으로 구원이 좌우될 수도 있고 증진될 수도 있다는 것은 환경이 존재를 바꾸고 얼마든지 환경만 바꾸면 된다는 식의 논리를 가중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구원은 언제나 인간 본질의 성화와 의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누가 그 모든 것을 재단할 수 있겠는가
사랑에 가장 최적화된 상황을 말이다
카톨릭 성화의 역사를 가장 잘 증거하고 반영하는 성인들의 삶을 보아도 성인들 각자가 하느님 사랑과 자비에 합할 수 있는 자신들의 삶을 찾고, 그렇게 구원의 완전한 표지인 복음적 삶의 양식을 살다간 삶들을 보면 그것은 결코 스스로들의 죄악이나 공동체의 악화를 의식화하거나 입장화하거나 그런 좌표를 상태로, 상황으로 가지고 사는 일이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표본인 복음에 합해야 할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삶의 양식에 목표와 주안점을 두고 간 것이다
스스로의 좋은 변화나 공동체의 개선과 쇄신은 시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없는 복음적인 것에 진실이 두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의 에너지는 삶의 속도에 비례되는 원리로부터의 힘이 아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그것이 가장 적정하고 최선의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은 거의 진실이다
미숙아. 칠삭동이, 팔삭동이는 기형아와는 다른 의미이다
철마다 제철 과일이 있는 것처럼, 그것은 때에 관련된 일이며 환경에 좌우되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때와 환경을 말할 경우, 언제나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것이 보다 확실한 의견 표명이 될 수 있다
기후 변화는 지구 전체의 상태와 상황을 전제하는 단어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자연이 스스로를 이 지구에서 보전하는 원리와 이에 따른 현상으로 나타내 보이며 그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로 아주 기본적인 이해이다
거기에는 산소나, 질소나, 이산화탄소와 같은 대기의 구성요소들이 무엇 하나 과다하거나 부족하다거나 하다는 식의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완벽한 균형과 조화가 있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먼저 알아야 한다
그 균형과 조화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그것에 대한 악화를 꾸미고 해를 끼치는 불균형과 부조와의 이데아도, 아이콘도 되지 않는다
100km로 마주 보고 달리는 자동차들이 충돌하면 E=mc2의 상대성 원리에 따라 그 차들은 그 에너지만큼 박살이 난다
에어백도, 강화유리도 그 사실만큼은 충분히 알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시대는 조화와 균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시대이다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고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회 현상들에도 선악과의 진실이 사실로 끝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과 같은 그 심각한 위화도 결코 말 몇 마디만으로는 양화시킬 수 없고 그에 따른 모든 후폭풍도 결코 피할 수 없다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대부분이 삶 속에서 그게 무슨 소리인지 조차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실제로 잔인한 현실이며 구체적 사실인 것이 이 세상의 이야기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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