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자유게시판

오랜만에 게시판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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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vero] 쪽지 캡슐

2002-05-18 ㅣ No.33465

참으로 오랜 만에 게시판에 들어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쓰신 글들이 있네요.

사심없이 글을 읽으려고 해도..

가끔은.. 너무 심하다.. 하는 푸념을 중얼거리게 됩니다.

 

하도 여러 말씀들이 많이 계셔서..

저 역시 어떤 오해를 받을지 몰라 먼저 제 소개를 해야겠군요.

전 틀림없는 신자 맞습니다.

아이디에서 짐작하시겠지만.. 본명은 베로니카이고..

이름은 실명으로 했으니 다 아시겠구요.

어렸을 때 유아세례를 받았고 성인이 돼서 견진성사를 받았으니 분명 신자 맞습니다.

굿뉴스가 발족하자마자 가입을 했고..

청소년기부터 성당의 단체 활동도 꽤 했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으니 신자의 ’탈’을 쓰고 엉뚱한 논리를 전개하는 사람으로 보시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작은 소망이 있네요.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은..

제게는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그런 이유로 제가 굿뉴스 자유게시판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진 논객은 아니랍니다.

오히려 올라온 글들을 읽고 때로는 공감하며 때로는 실망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야릇한 분노를 느끼는 아주 평범한 신자이죠.

 

어떻게 보면 새삼스럽게 뒷북을 치는 것이 되겠지만..

얼마 전의 명동성당 안 농성 텐트 철거에 관한 글을, 오늘 읽었습니다.

전 명동성당의 한 단체 안에서 봉사를 하는데요.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의 역할을 십분 이해하고서라도..

가끔은 사회정의를 위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한 종교를 믿는 신앙인으로서의 권리를 조율하는 과정이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가톨릭 안에 머물면서 가톨릭이, 특히 그 중에서도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민주화의 성지 역할에 소홀함이 없었다는 것에 무한한 자랑스러움과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성당 안에서 농성하는 분들 옆을 지나치면서 마음 속으로는 응원도 하고, 때로는 각종 서명운동에 동참하기도 하고, 그 분들의 안타까운 사정에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분명 저 역시도 사회정의를 원하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가지게 되는 책임의식이겠죠.

 

그러나 가끔은 그곳에 모이신 약자들이 어떠한 강자보다 더 힘있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분들이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단체 행동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적어도 명동을 시위장, 혹은 농성장의 의미로 보는 입장이 아니라 종교예식(그러니까 미사를 말씀드리는 겁니다.)이 거행되는 장소로 찾는 신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위대들이 있으면 시끄러워서, 천막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으니 미관상 안 좋아서, 낯선 타종교인들이 성당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

단지 이런 이유로 그 노동자 분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큰 확성기 소리 때문에 미사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고..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되면 시위대와 전경들에 떠밀려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조차 힘겨울 때도 있거든요.

물론 이 정도는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충분히 이해하고 감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정말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바로 이 때가 신자로서의 ’권리’를 생각하게 되는 때입니다.

가끔은..

농성하는 노동자 여러분들께서 명동성당을 그저 아무 때나 찾아와서, 마음대로 원하는 바에 대해 목소리를 드높이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아무 책임없이 밀물처럼 빠져나가도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거든요.

 

성당의 전력과 수도를 사전에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껏 끌어다 쓴다..

그리고 시위대가 빠져 나가고나면 성당이 각종 오물들로 더럽혀진다..

글쎄요.. 전 명동성당의 재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도 없고, 주제넘게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비용 일체를 시위대에게 청구해야 하느니 마느니 따지고 들며 주장할 자격도 물론 없을테구요.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성당의 유지 비용은 저를 비롯한 모든 신자들이 감당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이를테면 교무금이나 헌금을 냄으로써요.. (물론 제가 내는 액수는 극히 미약하지만요.)

 

그렇다면 가톨릭 신자로서, 성당에 진입하는 시위대들에게 좀더 신중하고 성의있게 행동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를 들면 농성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성당의 여러 시설들을 내 것처럼 아끼는 것.

그리고 농성이 끝나고 나면 원래대로 성당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는 것..

이런 것들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제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되바라지게 돈 이야기를 했나요?

그렇다면 이제, 신자로서 가지게 되는 ’감정’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명동에서 미사를 종종 드리는 신자로서..

이것이 약자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지독한 이기적인 발상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씀을 드리자면요..

어찌됐든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이기 이전에 가톨릭의 미사가 집전되는 성전 아닙니까..

그렇다면 최소한 그 성전을 모독하는 일들은 알아서 자제를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성당 마당의 쓰레기는 그렇다쳐도..

많은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보는 명동성당의 지하 상설 고해소 안, 제의실로 올라가는 출입문 옆에 사발면 용기 등을 비롯한 여러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졌던 모습을 제 눈으로 목격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라서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지하 고해소에 용변까지 보고 그대로 놔뒀다는 이야기도 들었구요.

 

이것은 사회정의를 논하기 이전에..

한 종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편협하고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시위와 농성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한 종교의 예식이 집전되는 경건한 성지를 대하는 데 있어서 부주의하고 무신경한 모습으로 일관했던 노동자측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종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더군다나 그 종교에서 성지라고 일컫는 곳에 머물게 됐다면..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그 성지에 대해 충분히 존중하고 경외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 아닐까요?

적어도 제가 보기에.. 그러한 상태로는..

교회와 사회가 서로 돕고 협력하는 아름다운 공생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들의 거대한 단체행동에 마주치노라면..

적어도 명동 성당 안에서만큼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저 미사를 드리는 즐거움에 명동을 찾으시는 여러 신자들이 ’약자’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너무 비약한 것인가요?

하지만 명동의 언덕을 가득 메운 노동자 여러분이 내지르는 함성과 확성기로 울려퍼지는 각종 민중가요들을 들으면..

성당에 올라가면서 적잖이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노동단체 또한 또 하나의 권력이 아닌가 생각되거든요.

 

힘없는 노동자들을 교회의 권력을 앞세워 몰아냈다..

이런 극단적인 표현은 심정적으로 찬성할 수 없습니다.

명동은 더이상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다. 이제 명동은 변절했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도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톨릭의 처사에 실망했다. 가톨릭 신자임이 부끄럽다..

이것 역시 극히 단편적인 일만 보고 조급한 마음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이제껏 묵묵히 한국 민주화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헌신했던 명동 성당이, 그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역할을 잠시나마 미루게 된 것은..

단지 명동이 돌연 이기적인 정책으로 그 방향을 선회했음도 아니요, 드디어 그 위선을 드러내고 야누스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은 어느 한 편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농성을 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떠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노동자 여러분과..

그러한 노동자들을 온화한 미소로 넉넉히 품어주는 명동 성당..

그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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