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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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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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2-07-26 ㅣ No.36571

전 며칠 전에 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였습니다.

토요일 성당에서 만난 친한 선배언니가 봉숭아물을 들였더군요.

문득 바알간 그 손가락이 너무나 예쁘게 보였습니다.

 

탄성을 지르며 제가 말했습니다.

- 아.. 언니. 너무 예뻐요.

언니는 흐뭇하게 웃더군요.

- 집 앞에 봉숭아가 피었어. 예쁘니?

전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 오랜만에 보니 정말 예쁘다. 언니, 봉숭아 남은 것 있어요?

그러자 그 언니가 대답하더군요.

- 너도 들일래? 가져다 줄까?

저는 별 생각 없이 그러마 대답했습니다.

 

다음 주..

전 그 봉숭아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합 마칠 즈음 언니가 빙긋 웃으며 제게 무언가를 건네 주더군요.

- 베로야.. 이거.. 봉숭아야.

 

전..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정작 저 자신은 봉숭아물을 들일 각오(?)가 채 돼있지 않았거든요.

꽉 찬 서른의 나이에 봉숭아물이라니..

요즘 봉숭아물 들이는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한가요?

 

워낙 건조하기 짝이 없는 친구들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하더군요.

- 너 왜 그래? 약 먹었냐?

- 주책이다, 주책.. 그 나이에 봉숭아물 들이고 싶냐?

- 투명 메니큐어 한번 안 바르는 애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래?

그런 말을 들을 것이 뻔한 터인지라..

전 봉숭아물을 들이는 것을 상상만 해도 민망함이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언니가 준 비닐을 들춰보고..

전 다시금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봉숭아를 곱게 빻아 백반을 넣고, 새지 않도록 단단히 묶고 그리고도 안심이 안 됐던지 휴지로 몇 겹을 싼 후에 제게 건네 준 겁니다.

마음 속으로는 울며 겨자먹기 식이었지만.. 언니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이..

봉숭아물이 마치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라도 된 듯 느껴졌습니다.

 

전 집으로 돌아와 비장한 마음으로 봉숭아물을 들였습니다.

랩으로 친친 묶고 반창고로 감싸고..

자면서 하얀 이불에 물들까봐 비닐 장갑까지 손에 꼈습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바람에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잤지요.

손이 저리고 답답해서 새벽녘에 몇번을 뒤척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손가락을 감싼 랩을 벗겨보고..

전 혼자 앉아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헤죽거렸습니다.

그래도 이것이..  제법 예뻐보였거든요.

 

봉숭아를 빻아준 언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 봉숭아물이 환상적이예요.

언니가 곧 답문자를 보내주더군요.

- 봉숭아물을 들이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낸다는 옛말이 있단다.

 

물론 봉숭아물 때문에 종종 놀림을 당합니다.

친구들이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죠.

- 참.. 가지가지 한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

그럴 때마다 전 웃으며 말합니다.

- 봉숭아물을 들이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대.

 

그 언니는 아마..

봉숭아를 빻으며 저를 한번 더 생각해줬을 겁니다.

분명 그랬을 겁니다.

그냥 꽃잎과 이파리만 따다 줘도 되는 것을..

정성스럽게 빻아 딱 알맞은 분량을 맞춰 가져다 줬으니까요.

 

 

..............................

 

 

제가 아는 부제님 한분은 올 여름 부제 실습을 나가셨습니다.

제가 보내드린 안부 메일에 이런 답메일을 보내주셨더군요.

 

무더운 여름, 잘 지내고 계시겠죠?

그저께 인터넷 연결이 됐는데 이제서야 연락을 드리네요.

메일을 읽을 시간은 있어도 보낼 시간은 없는 것이 저의 하루 일과입니다.

엄청나게 폭주하는 사목 과제들로 정말 김대건 신부님에 버금가는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방문들과 연일 계속되는 술자리로 저는 팬더곰처럼 둥그래져 버렸습니다. 정말 이러다 죽지 싶을 정도로 먹고 있습니다.

우리끼리는 이를 사육된다고 하는데 정말 신자분들이 고마우면서도 힘든 건 사실이네요.

 

부제님께서는 섬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섬에 청년이 흔치 않아 아줌마(?) 신자들의 사랑을 담뿍 받고 계시다 하더군요.

그런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뭍에서 오신, 이제 서품을 얼마 남기지 않으신 부제님..

그 섬의 신자분들이 얼마나 환영하셨을 것이며, 또 얼마나 신경을 써주셨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었습니다.

아마 부제님께서도 그것을 아시기에..

’사육’당하는 공포와 고통 속에서도 죽기 직전까지 그 음식을 모두 드시고 계실테구요.

 

아마..

전 봉숭아물이 지워질 때까지 종종 핀잔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 부제님께서도 섬에서 돌아오시는 대로 다이어트에 돌입하셔야 할지 모르죠.

하지만 괴롭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습니다.

아마 그 부제님께서도..

말로는 푸념하시는 듯 하시지만 행복한 비명(?)을 짐짓 지르시는 걸 겁니다.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하신다는 것이 메일에 담뿍 배어있었거든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온정..

이런 온정이 강요로, 때로는 구속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지나친 구속이라도.. 무관심보단 훨씬 나은 것이 분명합니다.

 

’아름다운 구속’..

이 진부한 표현이 오늘만큼은 싱그럽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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