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자유게시판

가톨릭 신학대학 축제에 다녀오던 날

스크랩 인쇄

이옥 [maria3731] 쪽지 캡슐

2002-05-27 ㅣ No.34061

신부님이 미래의 꿈인 둘째아이를 데리고 신학교 축제에 다녀 왔다.

큰 아이는 동생이 갈 학교를 봐야겠다며 따라나섰다.

 

둘째아이의 꿈은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군인신부님’이다.

당시 성당의 베네딕도신부님이 아이의 이상형이었다.

하루에도 골백번 변하는 게 미래의 꿈인지라 처음에는

그래, 이틀 쯤 후엔 막국수집 주인으로 변하겠지? -막국수를 거의 숭배할만큼 좋아하니까

라고 귓가로 흘려들었다.

그런데 해를 넘길수록 아이는 더 심오하게 사제의 꿈을 키우는 것이었다.

4학년이 되던 해 우연히 아이의 일기를 봤는데

백 한번째 여자친구를 사귄다고 했다.

너무 놀란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학교에서 돌아오는 녀석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너, 너. 꿈이 신부님이래며, 왠 여자친구냐? 것도 배, 백 한 명?’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까지 더듬는 나를 올려다 보았다.

’신부님이 되면 결혼을 못하니까 미리 여자를 겪어봐야죠’

세 살 위인 형아는 옆에서 아주 동조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맞아. 여자는 정말 피곤한 존재거든. 엄마를 봐라.’

 

신학교로 올라가는 길은 수도원 가는 길 같았다.

자연스럽게 자라는 나무와 풀들로 길 옆이 울창했다.

’여기가 제가 올 학교네요?’

며칠 전 마지막 백 세번째 여자아이에게 이별을 선언당한 둘째가 감동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점이 마음에 들어요.’

형아도 흐뭇해했다.

앞장서서 걷던 둘째가 형에게 물었다.

’형, 근데 나는 내 유전자가 나한테서 끝나잖아. 어쩌지?’

형아가 대답했다.

’걱정 마. 너랑 나는 유전자가 같으니까 내가 대신 이으면 돼.’

평소에 대를 잇기 위해 반드시 결혼을 하겠다고 굳게 다짐하던 형아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형아가 아들 둘을 낳아서 나한테 양자로 주면 되겠다. 그치?’

기가 막혀서 둘째 녀석 엉덩이를 걷어차며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정말 신학생들의 재주들이 아름다웠다.

예쁜 사진들이며, 그림들. 손으로 만든 작품들.

우리는 연신 감탄했다.

 

차를 마시러 지하광장으로 내려갔는데

지독한 음치학사님 한 분이 기타를 치며 생음악 서비스 중이었다.

차를 다 마셨지만 우리가 빠지면 박수 쳐줄 사람이 없을까봐 한참을 앉아서

노래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쳐 드렸다.

그런데

정말

그 학사님은 진지하게 계속 앙콜송을 부르시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하셨다.^^

끝내 자리에서 일어난 둘째가 가져간 비비탄 총을 가지고

바텐더 학사님들과 사격시합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크림통 세 개를 엎어놓고 쏘는데

왕년에 한 사격 했다는 학사님을 비롯해 모두 총알이 빗나갔는데

아이가 한 방에 맞췄다.

노래 도중 와아! 함성과 박수가 일어나자 노래 부르시던 학사님이 흐뭇하게 웃으셨다.

인사까지 하시며.

 

다섯 시.

삼종기도와 성무일도를 하시는 신학생들을 따라 들어가서

길게 늘어지는 음절의 기도를 드리는데

둘째가 꾸벅꾸벅 졸았다.

기도 소리가 너무 길어서 자장가같이 느껴졌단다.

끝나자 깨어난 아이가 눈을 비비며 강평했다.’엄마, 학사님들 기도가 쫌 이상해요.’

 

안면이 있는 신학생 한 분이 걸어오시더니 둘째를 보시고,

야, 이개구장이 왔네. 하셨다.

신부님이 아이의 꿈이라고 내가 말하자

너, 중학교 가서 맘 변하지 마라. 하셨다.

아이가 심각하게 대꾸했다.

’사 년이나 준비해왔는데요. 절대 변하지 않을거예요.’

부디 그래주길

유난히 하얗고 예쁘시던 신학교 교정의 성모님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장미도 너무 에쁘고

젊은 신학생들의 고귀한 모습도 너무 사랑스럽고

산들 바람과 햇살이 정말 아름다운

신학교 축제날이었다.

 



817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