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자유게시판

보수(保守)라는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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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정 [annateresa] 쪽지 캡슐

2003-03-19 ㅣ No.49955

 

대학 시절, 활동하던 동아리에서

제가 주관하여 회지를 만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회원들의 의식구조를 파악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문항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앙케이트 조사를 했는데

한 개의 문항에서는 그 조사 결과가

예전의 방식을 지키는 것이 옳다는 의견들로 집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의견들을 간추려 그래프로 작성한 뒤

그 항목 원고의 마무리를 이렇게 적어 넣었습니다.

"이 분야에 있어서 우리 **회원들의 경향은,

 아직은 보수적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랬더니 같이 편집일을 하고 있던 한 명의 후배가 흠칫 하며

"에이, 선배! 보수적이라는 말은 좀 그렇지 않아요?"

하고 즉시 반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왜?" 하고 저는 물었습니다.

"보수적이라는 말은 우선 느낌부터 안 좋잖아요."

저는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건 선입견이지. 보수는 옛 것을 지킨다는 뜻인데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 그런가요???"

"그러엄. 원래 나쁜 말이 아닌데 나쁘게 인식되어 있는 것 뿐이지."

 

제가 대학을 다닐 무렵은 그야말로

학생운동의 마지막 절정기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무렵이니만큼 "보수"라고 하면 우선 치를 떨고 보는 학생들이

꽤나 많았던 거겠지요.

 

 

 

보수(保守)라는 단어를 새삼스레 사전에서 찾아 보니 이렇게 정의되어 있군요.

① 옛 것을 보존하고 지킴 [conservation]

② 급격한 혁신에 반대하고 전통적인 상태를 중히 여김 [conservatism]

 

그리고 진보(進步)라는 단어의 정의는

간단히 "차차 발전하여 나감"이라고 되어 있는데, 글자 그대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편의상이지만 그 동안 완연한 반의어로 사용되어 왔던 "보수"와 "진보"라는 말들이

결코 반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보수는 급격한 혁신에 반대하고, 전통을 중히 여기는 것일 뿐

결코 모든 혁신에 반대하거나

변화나 발전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보수"라는 말 속에는 얼마든지 "진보"의 의미가 포함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보"라는 말 또한 걸음을 앞으로 옮긴다는 것이니

전통이나 옛 것을 버리자는 뜻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옛 것을 귀히 여기고 보전하면서도 한 걸음씩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가 있는 법이니

진보라는 말 또한 보수의 의미를 내포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스스로 저 자신을 다소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뜻이 부정적이지 않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송동헌님의 "나는 보수인가?" 라는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하는 와중에

어쩌면 보수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이나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적잖이 계실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타인들의 눈에 보수주의자로 보이는 것 자체가 불안하고 꺼림칙하고,

누군가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는.......

그런 분들이 계실 것도 같다는 생각에 그냥 이러한 정리를 한 번 해 보았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부(富)의 분배에 관한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제도 및 모든 분야에서 존재하는 보수와 진보는

상호 비방과 질시가 아니라 긍정적인 성찰로서

상호 보완적인 작용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실은, 이론상으로는 다들 잘 알고 있으면서

실천이 잘 안 되는 것이지만요...^^;;

 

 

 

 

 

덧붙이는 이야기 하나...

(저의 개인적이고 별 것 아닌 체험담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지루하신 분들은 여기에서 접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 운동권 친구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기는 학생운동이 너무나도 극렬한 때였지요.  

그 무섭고도 극단적인 경향이 너무 심각해지다보니,

급기야는 김지하 시인 같은 분까지도

"죽음의 굿판을 멈추어라" 하고 외치셨던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여기 저기서 아까운 목숨을 스스로 허공에 날려버리는 젊은이들이 늘어 갔고,

그에 따라 대학가의 분위기는 점점 더 격앙되어 갔지요.

 

제가 대학 2학년 때는, 거의 제대로 강의를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몇 개월씩 계속되는 단체 휴강은 도대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수업에 참가하고 싶어하는 극소수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운동권에 속하는 대다수의 친구들이 하도 따가운 눈총을 주었기 때문에

어지간히 담대하고 독하지 않으면 수업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한 과목은 모두가 한꺼번에 D와 F로 처리되어 단체 재수강을 듣기도 했습니다.

 

운동권 친구들의 주장이나 방식에

심정적으로나 행동으로나 거의 동조하지 않았던 저였지만

꼭 한 번은 적극적으로 동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안이었습니다.

 

급성 백혈병 선고를 받은 졸업반 선배가 있었습니다.

어느 과의 몇 학번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직접 아는 선배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배의 경제적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살아 보기 위해 수술 한 번조차 받을만한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술 비용이 대략 8천만원 정도라고 했는데,

그 때, 저희 학교의 전체 학생 수가 대략 8천명이었습니다.

그에 착안하여 총학생회에서 이러한 제안을 내어 놓았습니다.

 

전교생 8천명이 1인당 1만원씩만 기부한다면,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다!!!

우리 모두 1만원씩의 정성을 모아, 선배를 살려 보도록 하자!!!

 

늘상 휴강을 외치고 다니던 과대표를 비롯한 운동권 친구들이 중심이 되어

"전교생 1만원씩 모으기"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저도 기꺼이 동참하리라 결심했습니다.

대학생 입장에서 1만원이라는 액수는 솔직히 부담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한 동문 선배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돈의 효용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드디어 일주일 전부터 미리 예고했던 그 날이 왔습니다.

전공 강의가 끝나 한 강의실에 모여 있던 같은 과 학우들 사이를

과대표가 모금함을 들고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씩의 돈을 내고 있는 것인지는

제 눈에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모금함이 제 앞으로 왔을 때, 제가 만원짜리 한 장을 집어넣자

과대표를 비롯해서 옆의 친구들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너 이거 정말 내는거야?"

"히야... 대단하다..."

"카메라 갖고 오지 그랬어. 이거 사진이라도 찍어 둬야 하는 거 아냐!!!"

 

순간 제 마음이 몹시 어두워졌습니다.

선배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만원씩 모금을 하기로 했기에

그래서 저는 당연히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렇게 하자고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아무도

자기 주머니에서 돈 만원을 꺼내어 실천에 옮긴 사람은 없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모두가 실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솔선수범, 앞에 나서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당연한 실천을 하고 있는 친구를 향해

무척이나 희한하다는 듯한 시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선배를 돕는 일에 성의를 다하고 최선을 다했기에

그 기부행위 자체에 대한 후회는 나중에도 없었습니다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깃발 들고 목청 높여 옳은 일을 하자고 외치던 친구들...

그러나 정작 자기 주머니를 뒤져 돈 꺼낼 생각은 없던 친구들...

그들에 대한 새삼스러운 배신감이 오랫동안 제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 했더니 그 친구가 말하기를

"내고 싶어도 돈이 없었던 게 아니겠느냐?" 하더군요.

그러나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들인데,

정말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발벗고 나서서 외쳤다면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단돈 만원을 마련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이러한 기타 등등의 기억들로 인해 저는 솔직히

앞에 나서서 목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아직도 약간은 회의적입니다.

우선적으로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얼마나 스스로의 말들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소리 높여 외치기는 쉽되, 자신의 뼈와 살을 깎으면서 스스로 실천하기는

정말이지 너무나 어렵다는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도 진정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으나마 존재하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과연 누구인가를 모두가 알아보는 데에는

아직도 시간이 퍽이나 많이 걸릴 듯 합니다.

 

 

 

제 머리 속에 각인된 기억들 또한 일종의 선입견이니

되도록이면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노력은 합니다만,

워낙 부족한 사람이다보니 그것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작은 창문 하나라도 자신의 의지로 열어 놓는다면

지금 당장은 안될지라도 언젠가는 보다 넓은 가슴이 되어

나와 다른 수많은 입장들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일을 결국에는 선(善)으로 이끌어 가시는

내 사랑하는 주님께 대한 믿음의 한 조각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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