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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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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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06 ㅣ No.1558

언제나

한 시대의 참된 예언자는

뜻밖의 곳에서 출현한다.

왜냐면 참된 예언 자체가

예상 밖의 모습을 지니고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를 향한 참된 예언에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게 됨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참된 예언이란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것

곧 현실의 실상화이니,

곧 한 시대 속에 지닌

전혀 숨겨진 악에 대한 철저하고 절대적인 고발과

그것이 소멸된 후

전혀 숨겨져 있던 선(善)이 드러날

반전(反轉)된 미래현실에 대한 확신 어린 투사이니,

사슴의 스스로 자랑스런 뿔을 나쁘다 하니

화가 치밀고

못난 다리가 오히려 쓰일 것이라니

또 다시 화가 치미는 그런 상태이다.

 

인간은 자기만족감 속에서

비로소 안정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인데,

안주할 만한 현실에 자족하며 지내려는 이들에게

참된 예언은

단순한 충고 이상으로 경악스럽게 들려 온다.

사실 그것은

"너의 상황판단은 전혀 그릇되니,

새롭게 눈을 떠라!"는 식으로 자기파괴를 요구하고 있다.

 

참된 예언의 울부짖음은

항상 우리 등뒤에서 울려온다.

따라서 참된 예언을 들으려면 귓바퀴를 젖혀야 하고,

그 예언자를 보려면 두 눈을 뒷골에 박아야 한다.

아니 그를 만나려면 돌아서야 한다.

 

오늘도 우리 시대의 참된 예언자와 그 외침은

우리가 전혀 생각할 수도 없을

뜻밖의 곳에서 나타나 있을지도 모른다.

 

바벨탑처럼 높아만가는 우리 사회 현실이 낳는

그림자 그 응달진 곳에서

몹시 떨면서 울부짖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소란스런 이 시대에서

오히려 참된 예언자는

아무 소리도 지를 수 없는 벙어리로

구석진 곳에 ’응시하는 침묵’으로

가만히 서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느님께선

예언자로 보낼 자마저 구하기 어려워

차라리 온 우주를 통해

몸소 외침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제는 기어히  

생명을 낳고 키우는 모든 능력이

예언의 능력으로 나타날 지도 모른다.

그것이 종국에는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 사이의

피할 수 없는 힘겨룸으로 나타날 것이다.

 

기실 지금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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