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역설적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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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송 [hsson] 쪽지 캡슐

2009-12-11 ㅣ No.144498

 

1.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 시절에 여러 권의 대담집을 남겼습니다. 그중에서 독일의 저널리스트 페테 제발트와의 대담집에서 읽은 한 대목이 인상 깊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교황님이 가톨릭 교회 내에서 저질러진 죄와 잘못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드러내는 말씀을 하신 대목입니다.

“중세 때 교황청에 여행을 왔다가 가톨릭 신자가 되고 만 유다인 이야기를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돌아오자 교황청을 잘 알고 있던 어떤 식자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지요. '거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건가?' 그러자 그 유다인은 '그래, 물론 스캔들과 같은 일들을 모두 알고 있다네. 그 모든 것을 직접 보았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그건 완전히 정신 나간 짓일세!'라는 식자의 말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이네. 그런 상황에서도 교회가 계속해서 존속해 왔다면 그야말로 다른 누군가가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일세.'[...]

  제가 보기로 이러한 역설 속에서 무언가 매우 중요한 것이 드러난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가톨릭 교회 안에 인간적 무능함과 약점이 없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가톨릭 교회는 물론 한숨과 신음 소리가 없지는 않지만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위대한 순교자를 배출해 냈고, 위대한 신앙인, 선교사, 또 간호사, 교육자가 되어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을 배출해 냈습니다. 그런 점이 이 교회를 지탱하는 다른 어떤 존재가 정말로 있음을 말해 주지요."(요셉 라칭거,『하느님과 세상』, 성바오로출판사, 82-83쪽).

  

2. 교황님의 말씀대로 가톨릭 교회 안에는 “인간적 무능함과 약점”이 늘 있어 왔습니다. 이미 열두 사도들에게서 그런 점이 발견됩니다. 예수님이 직접 뽑으신 열두 사도들 중에서 으뜸이며 후에 교회의 수장이 된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스승을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사실은, 교회가 마지막 날까지 어둠과 죄를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황님이 지적하신 대로 교회는 자신 안에 있는 어둠과 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거룩한 인간들을 배출하면서 거듭 새로워졌고, 이런 점에서 교회를 인도하는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감지하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성 베네딕토(+550)는 당시의 시대적 방종에 대해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을 강조하는 수도 생활을 통해 교회가 새롭게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700년이 지난 다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226)는 철저한 가난의 삶으로써 세속적인 부와 권력에 묶여 있던 교회에 거룩한 기운을 불어 넣었습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556)는 이른바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혼란의 와중에 있던 교회에 쇄신의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예수회를 설립하여 교회가 구원의 도구로 재정비되는 데에 길잡이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복자 교황 요한 23세(+1964)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해서 교회가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길을 개척하였습니다. 캘커타의 복녀 데레사 수녀(+1997)는 현대의 물질문명의 질주 속에서 쓰레기처럼 버려진 이들에게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외에는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일 때 하느님은 거룩한 인물들을 통하여 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죄와 잘못을 유야무야해도 된다는 말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약점과 잘못에서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항상 정화(淨化)되어야 한다.'(교회헌장 8항)는 고백을 했습니다.

 

 

3. 교회 안에 있는 “인간적 무능함과 약점”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교회가 곧바로 쇄신되고 정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 지식이 많다는 이들, 사회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이들 중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데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비판정신이 있어야 사회든 교회든 정체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하얀 종이에 있는 점들은 누구나 쉽게 발견합니다. 삐뚤어지고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조금만 의식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에 비해서 교회는 성령을 통해 교회 안에 보이지 않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덕분에 거듭 새로워지고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것은 아무에게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이들에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교황님 말씀대로 교회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 주님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서는 성경의 말씀과 성사, 특히 성찬례를 통해 지속적으로 은총을 베풀어주시면서 우리를 성화의 길로 부르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서툰 말재주에도 불구하고, 성사를 집전하는 성직자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하자 없이 베풀어주십니다. 이렇게 전해진 은총에 힘입어 변화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교회가 “인간적인 무능함과 약점”으로 점철되어서 한숨과 탄식을 자아낸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여서 교회가 새롭게 변화되도록 이끄십니다. 교회의 거룩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쉽사리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4. 교회를 정화하고 쇄신하는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고, 인간은 단지 하느님의 주도하시는 손길에 응답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잊는다면, 교회의 쇄신과 정화를 인간의 손으로 완수할 수 있는 양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쇄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모습을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조급증에 걸리거나 낙담과 절망에 빠져 냉소적이며 공격적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뜻하는 대로 교회가 쇄신되고 정화되었다고 해도 그 공을 주님께 돌리지 못하고 자신의 업적인 양 우쭐하여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인간은 거룩함의 원천이신 주님께 의지하면서 그분의 성화 소명에 성실하게 응답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새롭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데에는 누구나 하느님의 도구로 쓰여 질 수 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 교회 쇄신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되는 길은 그분 뜻을 깨닫고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진정한 ‘개혁’이란 새로운 모양새를 갖추려고 애쓰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개혁’이란 (많은 교회론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의 것이 되도록 없어지고, 그리하여 그분 것,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이때 이정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성인들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구조를 계획함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를 개혁함으로써 교회를 개혁한 성인들입니다. 어느 시대건 인간의 필요에 답하기 위해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거룩함이지 경영수완이 아닙니다.”(요셉 라칭거,『그래도 로마가 중요하다』67쪽).

더러워진 샘의 한 구석에서라도 맑은 물이 솟아나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그 샘은 다시 깨끗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거룩하고 새롭게 되는 데에 정말 중요한 것은 비판이 아니라 성화를 위한 실천입니다. 남에게 성화되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우선 내 자신부터 거룩해지고 새롭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자신이 교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미약하더라도 나의 성화와 쇄신을 통해 교회의 일부가 성화되고 쇄신되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탓하는 데에 머물기 보다는 작은 촛불 하나라도 켜서 어둠을 밝히는 노력이 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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