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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로스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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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1-20 ㅣ No.1543

텔레파시·마인드 컨츄럴·염력(念力)·독심술(讀心術), 또는 기 수련 등등 한마디로 신앙의 세계인 영적(靈的)인 것에다 정신적(精神的)인 것으로 옷을 입히려는 뉴에이지 운동과 같은 짓들이 얼마나 참된 신앙심을 손상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사실 현대 우리 종교에서 박멸시켜야 할 것은 무신론도 과학만능주의도 아니라 사이비과학의 옷을 입은 미신이라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것들이다.

내가 초능력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파라사이콜러지 같은 것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그런 짓들이 결코 초능력도 더욱이 영적 현상도 아님이 과학적으로 보다 분명히 밝혀져, 우리의 신앙에서 이런 미신적 요소가 아예 퇴치되어 버렸으면 싶어서이다.

언젠가 ’마인들 컨츄럴’이란 책을 선물로 받아 정독했다. 내겐 종교에 대한 얄팍한 지식에다 상술이 야합해 빚어낸 사이비 인생지도서로만 여겨졌다. 그들은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시키고 오병이어나 풍랑을 잠재우는 등 예수 그리스도께서 숱한 기적을 일으키시며 놀라운 능력을 펼치신 것은 무슨 초능력을 지녔기 때문인 양 떠든다. 하지만 예수를 비롯하여 수많은 능력 있다는(?) 성자(聖者)들과 참된 신앙인에게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복음사업을 펼치거나 참된 신앙생활을 위한 수단이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그것은 부차적 수단일 뿐이었다. 예수께서 썩어 없어질 기적의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줄 믿음의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시며 본말을 전도하여 청하는 "호기심 어린 기적행위"를 엄하게 거부하신 까닭이 거기에 있다. 진실로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 그분 자체이시다.

또한 아주 단순하게 표현해 본다면 이른바 그런 능력조차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필요할 때 순간순간마다 그분으로부터 직접 받아쓰는 것이 유익하지 굳이 스스로 지니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을 지닐 때 하느님과의 참된 만남의 길에 방해될 때가 많다. 그러기에 인간적인 힘만으로 신적(神的)인 것을 이루려는 자는 결국 ’이카로스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참으로 인간이 태양(太陽)인 하느님께 날아가려면 스스로 만든 날개 만으론 결국 좌절을 겪고 말 것이다. 인간적인 것으론 어느 정도까지만 그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단테의 ’신곡(神曲)’에 있어 베르길리우스처럼 천국으로 가는 길은 혹 가르쳐 줄진 몰라도 천국까지 실어다 주진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무슨 능력을 많이 가진 자처럼 어깨 세우지 말고 순진하게 약함을 자각하는 겸손으로 하느님께 눈을 돌려 나아감이 훨씬 나으리라. 그럴 때 하느님은 언제나 그대를 꼬옥 껴안아 주신다.

유혹자는 두더지 같은 놈이라, 그대가 자신의 둘레에 능력이란 성벽(城壁)을 겹겹 쌓아 튼튼히 치고서 "이제야 괜찮으리" 하며 호사스런 성채(城砦)를 세우며 잔치를 펼치고 편안히 지내려 할 때, 오히려 성벽밑 땅을 파고 밑으로부터 솟아 나와 그대를 안으로부터 파멸케 하고 성채에다 불을 지른다. 그리고 그대와의 만남을 가질 수 없어 이미 나그네 되신 하느님 역시 튼튼히 잠겨 있는 성문 앞에서 헤매다 끝내는 돌아가신다.

그러니 차라리 들판에 살라. 그러면 그대는 광야의 소리인 그분과 함께 항시 살리라. 사실 그런 것들에다 세속적인 것은 물론이고 신앙적 가치마저 주었기에, 터무니없는 개인숭배·성자숭배·우상숭배 같은 무지몽매한 짓들이 2천년 교회 역사, 아니 동서고금의 숱한 종교들의 역사에서 저질러져 왔고 저질러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처럼 받들어야 무슨 성자(聖者)인양, 또한 그것이 선성(善性)의 척도가 되고, 숭배받는 자 역시 그걸 당연시 여겼다.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개인적인 능력으로 은근히 내세우는, 불린 일을 개인적인 잘남으로 아는, 속된 표현이지만 마치 "곰과 왕서방"처럼 재주는 하느님이 부렸는데 돈은 그대가 꼴깍하려 드는, 그래 어리석은 추종자의 환호에 취해 뽐내는! 결코 그런 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니다. 니체의 말처럼 제발 모든 위대하다는 자들에게는 이제 그만 속고 그대 스스로 하느님을 찾아가라. 그야말로 주님의 말씀대로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뿐!"인 것이다. 사실 하느님은 그 누구일지라도 "그대와 함께" 계신다.

얼마전 "성직자에게는 무료로 강습한다"는 기 수련이나 마인드컨추럴 강습회 광고 같은 것을 보고 놀라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그런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종교가 마르크스가 말했듯 "아편중독자"의 모임으로 변질되고나 있지는 않은지 염려된다. 아편중독자란 바로 살아 있는 현실과 망상을 뒤바꿔 생각하는 본말전도의 존재이다. 그러기에 그는 현실 속에서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하지 않고 망상 속으로 도피하며 감각적 위로만 찾는다.

참으로 우리는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신앙은 분명 현실 속의 것이지 몽환적 세계의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 ’지금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든 것이다. 그러기에 내면을 성찰하는 길인 명상조차도 진리의 빛에 인도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해로움만을 줄 따름이다. 설사 자기내면화나 심층적 안정감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잡귀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 성행하는 마인드컨트럴, 기 수련회, 속화된 선(禪)행위, 또는 온갖 수련회에서 하듯 단순히 심리적 안정만을 얻기 위해 하는 명상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 하느님 안에서 진리를 보기 위해, 하느님 안에서 진리와 함께 하기 위해, 하느님 안에서 진리를 듣기 위해 하느님과 함께 명상을 해야 한다. 그럴 때 명상은 진리의 길에로의 한 도구가 되고, 하느님의 눈으로 자기를 비춰 보는 시간이 된다. 그야말로 자기의 가난 위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은총을 깊이 느끼며 현존화하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대개의 정신적·영적으로 고질적인 악순환을 거듭하는 신앙적 질병들은 보다 결정적인 존재적 회개 곧 하느님을 비롯하여 이웃 형제들과의 인격적인 화해에 의해서만 완치될 수가 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서 대증요법적인 심리적 치료를 한답시고 그 어떤 환각제적인 미봉책에만 매달린다면 근본적인 완치는커녕 필히 사태만 악화시키면서 반드시 실패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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