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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깍꿍! 저기서 깍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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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10 ㅣ No.1564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은 인간의 언어로 번역되어져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 그 드러남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역자 위치에 서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젖먹이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나의 언어를 내버리고 그 대신

젖먹이의 언어를 내가 택해야만 의사소통이 된다.

그처럼 인류역사를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의 뜻대로 이끌고 싶은 하느님은,

그렇다고 젖먹이와 같은 인류에게 무턱대고

당신이 지니신 어른의 언어로 강요할 수만도 없기에,

가장 현실적으로 합당한 방법으로

그 간절한 뜻을 전하기 위해

당신의 말씀에 인간의 의상을 입혀

역사 안에 보내시는 길을 취하셨다.

마치 그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포도원 소작인 비유’와 같다.

에덴 이후 단절된 인류와 하느님 사이를

다시 이어 보려 숱한 방법으로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만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그분 자체이자 ’당신의 의견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그분의 말씀을 그 외아들을,

그것도

’가시(視界)’’가청한계(可聽限界)’’촉감한도(觸感限度)’ 등등

그야말로 ’요한1서’에 언급한

’듣고 보고 만져’ 볼 수 있는

인간의 감각범위 내의 존재양식을 취하여서 파견하셨다.

그로부터 이제 인간은 소작인들처럼

외아들마저 쳐죽이지 않는 한,

다시금 에덴에서처럼

서늘한 미풍과 함께 우리 가운데 거닐며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곤경 속으로 직접 찾아와

’아담아!’하시며 에덴에서처럼 우리를 부르신다.

그것도 그날처럼 질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한 사랑으로 껴안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귀만 세워 기울이면

그분의 말씀을 언제나 그대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시나이에서의 모세에서처럼

천둥과 번개와 구름 속이 아니고,

차라리 갈멜의 전투를 끝내고

호렙으로 들어간 엘리야에서처럼

폭풍과 지진과 화염이 다 지난 뒤

조용하고 가벼운 미풍 속의 음성으로 나타나시는 그런 하느님,

그분이 바로 신약의 하느님이다.

따라서 호렙의 그 사건은 신약의 예언적 비젼이다.

"갈멜에서 호렙으로!"

그것은 신앙의 변함없는 발전적 도정양식이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너무도 확연히

하느님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기에,

그 추억 어린 기억만 지니고 있어도

하느님 발견(만남)은

어린이 숨바꼭질보다 더 유쾌하다.

그야말로

"여기서 깍꿍! 저기서 깍꿍! 여기저기서 깍꿍!"이다.

그리하여 이제 신앙구원의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언어’ 이해,

그 외는 아니다.

그분의 몸짓을 이해할 때,

더 나아가 함께 그 몸짓으로 춤출 때

그것은 또한 우리를 하느님과의 만남에로 들어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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