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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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복음말씀 중,"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루카17,17)"묵상-양남하 시몬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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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남하 [simonyang] 쪽지 캡슐

2019-10-05 ㅣ No.218822

2019.10.13.복음말씀 중,"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루카17,17)"묵상-양남하 시몬 41


 

◆복음말씀전문;<"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복음말씀 전문 중 마음에 와 닿는 성구 >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루카17,17)


■< 묵상과 다짐 >

 <묵상 >

본문은 나병환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나병은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무서운 병이었으므로, 이 병에 걸리면 평생 가족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동구 밖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치료([治療)를 받았다는 것은 동시에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사회로 돌아가서 옛날처럼 살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치 받은 10명중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돌아와 예수께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가난해서 율법교육도 받지 못한 야만인들이라는 등의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그렇게도 무시와 경멸을 당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어려서부터 하느님께 감사하라는 내용의 율법교육을 받는 엘리트 지위를 유지하며 유식한 행세를 좋아하는, 유대인들 9명은 그냥 돌아갔다는 점입니다. 

 

문맹률이 세계에서 최저이고 부모 교육열도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는, 우리나라 경우는 어떨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국민도 감사를 잃어버린 유대인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결론에 이를 듯싶습니다. 1997년 대천 해수욕장에서 초등학교 학생들 여름 캠프가 있었습니다. 그 때 초등학생 몇 명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 때 고등학생 몇 명이 반사적으로 생각할 틈도 없이 뛰어 들었습니다. 모조리 초등학교 학생들을 건져 냈습니다. 그런데 구하려던 고등학생 3명이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고귀하게 죽은 3명 합동 장례식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학교 관계자와 지역 유지등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살아난 초등학생들과 그 부모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때문에 죽었는 데 자기들은 살아 났다고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도 "파렴치한 놈들" 등등의 적당한 용어로 돌팔매질을 하는 것이 참도리일까요?  물론 3가족 모두 생명의 은인을 잊지 않았어야 할 것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먼저 저를 포함한 우리 신앙인들인 자신들에게 그 용어를 그대로 적용해봐야 할 듯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십자가의 주님 사랑을 나는 곧잘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정구사나 도덕적 윤리적으로 최상위층이라 자부하는 목사를 비롯한 성직자들은 신자들 돈으로 봉급을 받으면서 강론(또는 설교)내용이 성도들의 추구하고 있는 영성을 충족시켜주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신앙의 뿌리인 본성각(本性覺)에 대한 깨우침은 뒤로 하고, 세상적인 소기의 목적을 교묘하게 달성하는 방향에서 만든 교리 등으로 세뇌에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나요? 성령을 떠난 듯한 언행 등에 실망한 나머지 그 교회를 떠난 분들에 대한 귀책과 반성은 잊고 있다가도, 건물증개축할 때가 되면 남아있는 청순가련한(?) 신자들에게만 몽땅 부담시키는 총명함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나요?

 

 

<다짐>

작금의 기네스북에 기록될 것으로 추정되는 '조로남불'의 대가나 이 분을 법무장관으로 임명을 강행한 대통령에 대한 반대 또는 하야서명한 대다수 지식인들은 물론 서울역에서 부터 광화문에 이르는 3~4백만명의 개천절 시위에 참여한 국민들의 느낌이 그렇듯, 조문 마음에 진정한 감사를 잃고 있다는 점은 오늘 복음 속의 유대인들과 초록이 동색일 듯 싶습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세상입니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다른 의미로도 다가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자살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살”, 그것을 생각하면 갑자기 어둡고 침울하고 소름이 끼치지만 생각을 바꾸면 ”살자“가 됩니다. 죽으려면 차라리 그 죽을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부터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감사는 생각만 바꾸면 얼마든지 솟아나옵니다. 감사의 생활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테살로니카 1서 5장 18절)

(2019.10.4일 퇴고)

 

**출처주소: http://m.cafe.daum.net/kfb67/NPRR/566?svc=cafeapp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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