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2022년 제9회 가톨릭평화신문 신앙체험수기 대상 수상 作 / 유동훈(미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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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칠등 [kcd159] 쪽지 캡슐

2022-07-02 ㅣ No.225433

 





저의 세례명은 미카엘입니다. 어릴 적 집에 걸린 그림에서 미카엘 대천사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칼을 들고 있었는데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용과 싸워 승리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인생은 세례명과 어울리지 않게 패배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음악을 좋아했고, 음악인의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음악을 많이 들으며 자라 왔던 환경에서 인지 음악을 좋아해 다양한 음악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실직과 이어진 IMF는 저의 꿈을 펼칠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가톨릭 학생회에도 들어가곤 했으나 아버지의 실직과 고등학교 당시의 IMF 사태는 저를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철저히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배운 것도 기술도 없던 저는 21살 때부터 식당, 공사장 등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신앙도, 영혼도 없는 육체적인 삶만을 살았습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저를 원하는 곳은 공사 현장같이 힘든 곳이었고 저를 원하는 사람들은 용역 깡패나 폭력 조직뿐이었습니다. 힘이 세고 눈에 악이 서려 있는 게 맘에 든다는 이유였습니다. 뭔가 돌아갈 고향이 없는 실향민 같은 공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는 그 공허함의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렇게 의미 없이 살아가던 중, 중노동으로 인하여 몸이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고, 병원에서 일하면 저의 치료비를 감면받을 수 있다 하여 우연히 병원에서 아르바이트하게 됐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픈 사람을 돕는 일에서 살아생전 처음으로 일에서 보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잊지 못한 채 야간에 간호학원을 등록하고 낮에는 한강성심병원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일하며 종일 환자를 들었다 놨다 옮기며 사는 삶은 힘들었지만, 힘들면서도 왠지 모르게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열심히 일과 공부를 하였습니다.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시험에 합격하여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여의도성모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였습니다. 바쁘게 병동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힘들었지만 수녀님들이 종종 보이는 풍경의 병원에서 일한다는 것이 저에겐 마음의 안정이 되었습니다. 수술실에 수술하기 위해 들어가는 환자를 위해 하나하나 기도해주시는 수녀님을 볼 때면 자애로우신 성모 마리아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어 나의 영혼까지 회복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진 미사에 다시 참여하진 못했습니다. 근무하는 병원에서도 미사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직은 마음이 열리지 않았던 듯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저의 마음은 변하였고 2008년도부터 다시 성당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성가대에서도 활동하게 되었으며 행사 때는 바이올린으로 미사곡도 연주하고, 형편이 나아지며 어릴 시절 음악의 꿈을 다시 실현하기 위해 병원 일과 학업을 병행했습니다. 음악대학과 대학원에서 비올라와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논문도 쓰며 졸업을 하였습니다.

그동안은 오랫동안 병원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제는 간호조무사가 아닌 전문적인 연주자로 살며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주고 싶었습니다. 간호는 환자만을 위한 것이지만 음악은 더 많은 사람, 특히 불특정 다수의 마음의 상처까지도 위로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주자가 된 후 음악치료 자격증도 따서 마음이 아픈 이를 위한 음악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연주자로 살기 위해서는 시립 혹은 도립 교향악단 같은 안정된 단체에 들어가야 생업으로 삼고 생활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열심히 준비하여 전국을 돌며 각 지역의 교향악단을 다 시험 보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몇 년간의 도전은 실패였습니다. 전부 탈락하였습니다. 저보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 합격하는 모습을 보며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다시 요양병원에 취업하여 간호조무사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병원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했습니다. 나름 처음에는 환자들에게 마음을 쏟고 정성을 다하며 함께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고령의 환자분들이다 보니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면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젊은 날의 빛나던 모습이 사라지며 나이를 먹어가고, 또 점점 우울해지고 몸과 마음이 지치고 다시 성당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한때 폭력조직의 제의도 거절하고 열심히 공사장에서 중노동을 하며 살았고, 오랜 시간 병원에서 아픈 사람을 돕고 살았지만 나의 삶은 공허한 마음으로 더 불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저의 우울함은 저를 부정적인 생각으로 지배하게 하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점점 삶이 무감각해지고 있었습니다. 밤낮으로 일하며 살다 보니 인간관계도 없어지고 가까운 사람도,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저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힘든 삶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세상이 즐겁지 않고 저 역시 세상에 미련이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결국 저는 삶을 정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전에 열심히 돈 모아서 샀던 악기, 전공 책, 악보 등 돈이 되는 건 다 팔아 정리해서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팔 수 없는 옷 같은 것들은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고, 한두 달 정도만 살 수 있을 만큼의 옷과 물건만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평소 가고 싶었던 곳들을 가보고 마음의 정리가 잘 되어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자살을 준비한다는 것에 대해 신자로서 죄책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상을 떠나면 내가 그리워하는 이들도 만나고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또한 존재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은 다 정리되었고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구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하여 병상이 부족하여 대기하던 환자가 집에서 사망하였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대구는 혼란에 빠져있는 모습이었습니다. TV에선 속보로 보건복지부는 전국의 보건 의료 인력에게 대구로 와줄 것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처음 겪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성으로 다들 꺼리는 분위기였고 그곳에 있는 간호인력마저도 이탈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간호인력으로 지원하여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대구1생활치료센터에서 대규모의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병상이 부족하여 교육부 건물을 통째로 코로나 치료센터로 세팅한 곳이었습니다. 처음 있는 코로나 사태라 주변에서는 다 말렸고 다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자살을 생각하고 있던 저에겐 전혀 두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환자를 돌보다 감염되어 사망한다면 자살보단 죄책감 없는 죽음을 맞이할 기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코로나 환자들에게 다가가서 혈압을 재고 약을 챙겨주고 불편 사항을 하나하나 자세히 경청했습니다. 삶에 미련없는 마음 덕분에 환자들을 더 꼼꼼히 가까이서 돌볼 수 있었습니다. 방호복도 무더웠지만 자살하고 나서 떨어질 지옥 속의 불보다 뜨겁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 때문에 힘들지 않았습니다. 방호복을 입을 때마다 “하느님! 이 전염병의 난리 끝에 저들을 살려주시고 저를 거두어 주소서, 제발 저를 데려가 주소서” 하고 기도하며 방호복을 입고 환자들에게 다가갔습니다.


 



3월에 대구에 내려왔지만 계속하여 완치자들을 배출해 냈고 결국 5월이 다 되어 이 센터는 해산되었습니다. 대구의 위험 사태는 어느덧 진정이 되었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던 곳에서는 아무도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방호복이 찢어지는 등의 몇 차례 위험한 상황에서도 불가사의하게도 저는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느님의 보호를 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다시 돌아오고 혼자 지내며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적십자사에서 뭔가를 보내왔습니다. 알고 보니 죽음을 대비해 일부러 헌혈을 많이 했는데 헌혈횟수가 50회가 넘어 헌혈유공장 금장 수상 대상자가 되었다고 연락이 온 것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결국, 다시 미사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매일 같이 새벽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여름철이라 새벽 미사가 시작되는 시간마다 성당 안으로 강한 햇빛이 들어와 비추던 그 모습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미사에 형식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대구에서 전염병의 난리를 겪고 돌아와서는 나도 모르게 매 미사를 온몸과 마음으로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당 안에 비추던 햇빛만큼이나 매 시간 시간이 저에게 소중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수도권에서 코로나 3차 대유행이 시작되었고 미사도 제한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겨울이었기에 감염에 취약한 시기였고 부천의 요양병원에서 집단 감염이 되어 시작부터 사망자가 발생한 사태라 대구 때보다 상황은 비관적이었습니다. 보건의료인 들도 이번에는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습니다. 대부분 중환자이거나 거동이 힘든 환자들이었습니다. 중앙사고수습본부에서는 또다시 전국의 간호인력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렇게 저는 당연하게 떠나갔습니다. 경기도 의료원의 이천병원으로 가라는 지시에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배낭 하나 멘 채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 코로나19 파견 간호조무사로 활동한 유동훈씨(오른쪽).



1차 유행과 달리 방호복은 더 무더워졌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일하는 일의 강도는 더욱더 높아져 있었습니다. 대부분 거동이 불가능한 요양병원에 입원했던 환자들이 감염되어 도착해 왔기에 방호복을 입고 들어가서 식사도 시켜드려야 했고 대소변도 처리해드리고 기저귀 관리부터 폐기물 처리, 식사량과 혈압 체크, 투약 업무를 하다 보면 방호복을 입은 채로 몇 시간 동안 밖으로 나오질 못했습니다. 허리도 너무 아팠습니다. 어느 날은 근무 시작부터 사망환자를 정리해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곤란했던 것이, 그곳은 숙소가 제공되지 않아 여관이나 모텔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막말로 여름이면 아무 데서나 누워서 자도 되겠지만 추운 겨울이었고, 코로나 환자를 돌보러 왔다는 걸 알게 되면 방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방이 없기도 하여 병원 화장실에서 자고 출근한 적도 있었습니다. 서럽거나 슬픈 마음은 하나도 들지 않았습니다. 코로나로 생사를 오가고 있는 저 환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어떠셨을까 하고 중학교 시절 가톨릭 학생회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방이 없어요”라는 말만 수차례 듣고 결국 마구간으로 가신 그때. 어릴 때는 전혀 와 닿지도 않았던 그 옛날이야기는 저보고 반성하라는 듯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저는 정말 나은 편이라서 불평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크리스마스에도 계속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코로나 병동에서 보냈습니다.

첫날부터 엄청난 양의 땀을 쏟고 한 시간 내내 구토를 하였고 이틀간 밥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간호사는 혼자 급하게 도시락을 먹다가 울고 있었습니다. 같이 일하지만 왜 내가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더해 의료인 감염까지 생겨나 불안과 공포에 갑자기 떠나는 간호인력도 생겨났습니다. 남아서 일하는 간호인력들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병동에 들어가 몇 시간 내내 나오지 못하고 환자를 돌보다 보니 같이 투입된 간호사분들은 고통스러워했고 지옥의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죽고 싶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순간 저는 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눈앞의 환자분들을 지키고 싶어졌습니다. “하느님 저를 이곳에 보내주시어 감사합니다. 저를 이곳에 보내주시어 감사합니다.”

때론 어떤 환자들은 답답한 자신의 처지에 불평하고 화내고 욕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괜찮았습니다. 예수님이 옛날 유다인들에게 당했던 모욕보다 심할까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방호복을 입고 병동에 들어가서 덥고 온몸이 무거워도 괜찮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옛날 골고타 언덕에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실 때처럼 몸이 무거웠겠습니까, 아니면 그 땡볕만큼 살이 뜨거웠을까요. 그저 감사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버티며 하느님에 대한 감사로 일을 이어갔습니다.

새로 파견 온 간호조무사 중 저를 빼고 모두 떠났고 기존에 파견 온 간호사 인력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떠나며 저에게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너도 떠나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남은 사람들끼리 열심히 더 노력했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봄이 되자 결국 3차 대유행의 불길도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저 또한 건강하게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의 간호사분들과 헤어지는 날 슬펐습니다. 나오기가 싫었습니다.

나의 인생이 불행하고 괴롭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하느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코로나의 한복판에서 저는 하느님이 존재하심을 느꼈고 하느님은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다시 남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셨고, 때론 환자들의 돌발 행동 등의 위험상황 속에서도 감염되지 않게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패배자라 생각했던 저를 코로나 현장 속에서 칼을 든 미카엘 대천사처럼 용감하게 일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랬습니다. 나의 불신과 의심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항상 저의 옆에 계셔 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용기를 되찾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받아들였습니다. 용감한 미카엘 대천사의 세례명을 가진 사람답게 용감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저 자신을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옷이 매우 낡아 있었습니다. 7년 만에 바지도 새로 샀고 양말도 새로 사서 신었습니다. 정말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머리도 짧게 자르고 짐을 꾸려 또다시 대전의 돌파 감염 사태에 지원하여 코로나 환자를 돌보러 갔습니다.

이번에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정신병원 병동이라는 폐쇄 병동에서 발생한 코로나 사태라 방호복을 입고 들어가서 근무시간 내내 옷을 벗지 못하고 정신병동 환자를 계속 주시하고 살피며 일을 해야 했습니다. 거기에 의사소통이 힘든 환자도 많았고 지적 능력이나 인지기능의 하락으로 하나하나 챙겨줘야 하는 환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밥까지 다 챙겨줘야 했습니다. 코로나 사태 속의 또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환자들과 지내는 시간도 나름 즐거웠습니다. 한 명, 한 명 식사시간마다 국과 밥, 반찬을 일일이 식판에 퍼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폐쇄병동에서 같이 있기에 원하는 거 하나하나 바로 처리해줄 수 있어 마음이 좋았습니다. 그동안은 코로나 환자와 계속 같이 있지 못하고 CCTV로 주시하다 업무시간이나 어떠한 일이 생겨야만 방호복을 입고 들어가서 일을 했기에 계속 함께해주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안타까웠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폐쇄 병동에서 함께 지내는 것은 뭔가 마음을 편하게 해줬습니다.

누군가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일도 한두 번이지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냐. 무슨 일 생기면 아무도 너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어떻게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은 왜 맨몸으로 병자들을 대하시고 또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을까요. 그들의 말에도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존재하는 데에는 그 누군가의 희생이 항상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이 있었고, 그 위로 올라가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은 나의 삶 속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으며 병자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느님의 존재는 점차 가시적으로 저에게 큰 형상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고자 노력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늦은 나이지만 간호조무사에서 벗어나 간호사가 되어 더 많은 환자를 돌보고자 이번 달에 인천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에 학사편입원서를 접수하였습니다. 항상 병원 일을 하며 생업과 학교를 병행하여 좋지 않은 학점과 낮은 평점 그리고 높은 경쟁률 등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지만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하며, 환자들을 더 가까이서 만나고자 간호학과 학사편입을 접수하였습니다. 이제는 간호사가 되어 병자들을 만나게 해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수상소감 / 유동훈 미카엘 (서울대교구 신도림동본당)

 

우선 미천한 제가 대상을 받게 되어 다른 분들에게 죄송할 뿐입니다. 저보다 더 깊은 신앙을 갖고 흔들림 없이 뿌리 깊은 나무처럼 신앙생활을 해온 신자분들이 더 많은데도 그중에서 제가 뽑혀 다른 신자분들께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저는 신앙 없는 가족들뿐인 집안에서 자라, 중학교 시절 친구 손에 이끌려 성당을 찾게 된 건 축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찾아왔던 IMF 환란은 저를 성당과 멀어지게 만들었지만 신앙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늦게나마 세례를 받게 되고, 세상속 절망의 끝에서 다시 일어나 스스로 성당을 찾아갈 수 있게 된 건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밖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어려움에 직면해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신앙 수기에서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 저의 이야기를 고백하고 싶은 마음에 글을 썼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신앙으로부터 많이 멀어진 세상입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당장 눈에 보이는 과학기술과 물질만능주의가 신앙인 듯합니다.  1720년 마르세유 역병, 1820년 콜레라, 1920년 스페인 독감,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 등 100년마다 전염병이 찾아오지만, 인간은 과학기술은 전혀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과학과 물질에 대한 맹신은 한계를 드러내고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코로나 등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 모든 것에는 기초와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의료의 상업화가 아닌 기초의학의 발달이 전염병 사태에 굳건히 버틸 수 있고, 기본이 튼튼한 건설현장이 이번 광주현장 사고 같은 재난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하듯 사람으로서 가장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정하고 신자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이번 기회로 많은 냉담자가 기본의 삶으로 돌아오길 소망하며 수상 소감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평화신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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