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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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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8 ㅣ No.1591

오늘 3월 13일은

 

’씨알의 소리’ 함석헌 선생님께서

 

탄생하신 지 1백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의 고귀한 정신과 삶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선생님을 그리며 기사 한 편과

 

선생님의 생애 그 이야기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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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21’ 제250호

 

  ‘씨알’을 위하여 한평생, 민중계몽운동 편 한국의 마하트마 간디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삽니다.… 생각 못하면 쭉정이입니다.”

 

  “짐승보다 더러운 것은 거지입니다.… 거지보다 더러운 것은 갈보입니다.… 갈보보다도 더 더러운 것은 정치인입니다. 제 생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생각을 위해 사람을 죽이면서 나라 일을 하노라고 스스로 속고 남을 속이기 때문입니다.”(<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1989년 88살을 일기로 타계한 함석헌 선생이 남긴 씨알사상의 핵심은 ‘못 배우고, 못 입고, 잘난 체하지 못하는 민중의 구성원인 씨알들이 모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것이다. 그가 생명의 근본원리를 ‘고난’으로 본 것은 식민지 조선시대 때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0)의 계승·발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에게 씨알, 곧 민중은 ‘고난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로 바꾸는 주체이다.

 

  씨알사상을 실천하는 그의 모습은 ‘무저항적 비폭력주의자, 투쟁하는 평화주의자’였다. ‘한국의 마하트마 간디’로 불린 함 선생이 독재정권에 대항해 싸웠던 무기는 70년 창간된 <씨알의 소리>. 이를 통해 그는 씨알들이 스스로를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하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닦도록 하기 위한 민중계몽운동을 폈다. 씨알들의 일상사에 드리운 나태와 게으름을 걷어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었던 셈이다.

 

  동서고금에서 두루 영향을 받은 함 선생의 사상적 뿌리를 굳이 찾으라면 기독교를 토착화한 다원주의적 종교사상가로 평가되는 그의 스승 류영모(1890∼1981)를 꼽을 수 있다. 상충하는 듯한 각 종교의 교리가 결국 같은 진리로 통한다며 절대의 세계로 나갈 것으로 역설했던 스승의 가르침은 그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1960년부터 퀘이커교 한국대표를 맡았던 그의 무교회주의와 사회 참여에 대한 강조는 외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퀘이커교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저서로 <역사와 민족>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등 20여권이 있다.     

 

  조준상 기자 sang21@ma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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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생애(1901-1989)

 

 

 

1. 생애구분

 

 

 

작은 지면에 한 사람의 생애를 다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함석헌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요 실천가의 생애를 수박 겉할기식으로 더듬어 가는 것은 오히려 그의 삶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을 짚어가기 앞서 짧게나마 그의 생을 되짚어 보려는 것은 그의 모든 사상과 삶의 실천을 조망하는데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사상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생의 여러 사건과 계기를 통해 익어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생애를 고찰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생애가 그 인물이 처하고 있었던 역사적 상황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역사적 상황이 구체적 형태로 어떻게 그 생애와 관련하고 있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 역사적 사건이 한 사람의 생애와 사상에서 갖는 의미성을 파악하려면 그 사건의 직·간접성이나 영향력의 강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함석헌의 생애 연구에 있어서는 그러한 연구 방법은 더욱 더 절실하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간 시대는 한국 근·현대사의 장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함석헌의 생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다른 분에게 미룰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함석헌의 발자취를 더듬는다고 하는 것이 함석헌의 약력을 더듬는 것이 아니고 함선생님의 발자국 발자국에 묻어 있는 피묻은 정신을 더듬는" 것이 때문에 본격적인 연구가 절실하게 요청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는 함석헌의 생애에 대해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들을 위해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필자는 함석헌의 생애를 함석헌의 자작시 시(詩)인 "인생은 갈대"와 연관시켜 구분해 보았다.

 

 

 

인생은 갈대 인생은 연한 갈대 어린 맘 날카론 맘

 

쓴 바다 노한 물결 단숨에 무찌르고자

 

끝끝이 뜻 머금고서 다퉈가며 서는 듯

 

 

 

인생은 푸른갈대 비바람 치는 날에

 

자라고 자라난 뜻 하늘에 달 듯컨만

 

떠는 잎 한데 얽히어 부르짖어우는듯

 

 

 

인생은 누런 갈대 바람에 휘적휘적

 

거친들 저문 날에 외로운 길소 보고

 

풀어진 머리 흔들어 가지 마소 하는듯

 

 

 

인생은 굽은 갈대 망망한 바닷가에

 

물소리 들어보다 쓴 거품 마셔보다

 

다시금 하늘 우러러 생각하고 서는듯

 

 

 

인생은 마른 갈대 꽃 지고 잎 내리고

 

파린 몸 빈 마음에 찬 물결 밝고 서서

 

한 세상 쓰고 단 맛이 다 좋고나 하는 듯

 

 

 

인생은 꺽인 갈대 한토막 막뚫린 피리

 

높은 봉 구름 위에 거룩한 숨을 마셔

 

처량한 곡조 한 소리 하늘가에 부는 듯

 

 

 

이 시에서 그는 인생을 크게 여섯시기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 시 자체가 함석헌 자신의 생애 이해와 바램을 토대로 된 것이기에 그의 인생구분과 이해에 좋은 틀거리 역할을 하고 있다.  

 

 

 

제1기 : "어린 순 날카론 맘" 〈1901∼1923〉

 

제2기 : "뜻 하늘에 달 듯 컨만" 〈1923∼1927〉

 

제3기 : "외로운 길손" 〈1928∼1947〉

 

제4기 : "다시금 하늘 우러러" 〈1947∼1962〉

 

제5기 : "찬 물결 밟고 서서" 〈1963∼1970〉

 

제6기 : "높은 봉 구름 위에 거룩한 숨을 마셔" 〈1970∼1989〉

 

 

 

2 생애의 발자취

 

 

 

1) "어린 맘 날카론 맘"(1901∼1923)

 

 

 

이 기간은 그가 태어나서 오산학교를 졸업할때까지의 시기이다. 함석헌은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부라면 원성동 사점, 일명 사자(獅子)섬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아버지 함형택(咸亨澤),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의사로서 당시의 명의였다고 전해지며, 어머니는 50세가 되도록 글을 모르시는 분이셨으나 두 분 모두 이성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을 소유하고 계신분이셨다도 한다. 함석헌은 자신의 고향인 ’사점’을 늘 가슴에 두고 사셨다. 그것은 단순히 지역적인 의미에서 고향이 아니라, 그 고향에 얽힌 정신을 그리워했다.

 

더욱이 청나라에 맞써 싸운 임경업 장군이 쌓은 산성들과 그의 이루지 못한 뜻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디를 헤매거나 사점은 내 고향이다. 내 속엔 사점이 있다. 사자앙천혈(獅子仰天穴)이 있다. 나를 물아래서 감탕물을 먹고 자라나 하늘로 올라가고야 말려는 사자 새끼의 영혼을 받았다."

 

 

 

함석헌이 태어난 시기는 국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식민지 경쟁이 극심하게 대두된 시기였고, 국내적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처 그 폐해성이 극명하게 들어 나는 조선조 말기현상이 전개되고 있는 때였다. 이에 일본은 자신의 패권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첫 희생양으로 조선을 선택하였고 세계 열강과의 담합을 통해 조선의 식민지화 정책을 꾸준히 실현해가는 시기였다. 이와같이 함석헌의 생애의 출발은 한국의 근현대사의 고난의 시작과 일치하고 있다.

 

어린시절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은 한일합방이었다. 그의 나이 열살때 일인데 그 자신은 이 나라 망하는 사건을 자라나던 희망의 어린 순에 하루 아침에 서리가 내린 사건이었다.

 

그의 학교교육은 덕일(德一) 소학교로부터 시작된다. 이 소학교 시절, 그의 삶을 관통하는 저항정신의 맹아가 삭튀어지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일심단(一心團)에 가입한 사건이다. 일심단은 큰 조직적인 저항단체가 아니었지만 몇몇 동네 뜻있는 학생들이 모여 일본에 나라의 주권 회복을 위해 뜻을 하나로 모아모자는 의지에 찬 모임이었다. 그의 나의 열두살 때 손도장을 찍으며 결의한 이 작은 행동 속에서 그의 삶을 예견하게 된다.

 

소학교를 거처 16세에 양시(楊市)공립 보통학교로 진학, 졸업한 후 1916년, 의사가 되라는 권유를 받아들여 당시 공립학교인 평양고등 보통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이 공립학교 시절에 그에게 민족주의적이고 민주적인 기독교정신을 다시금 깨우쳐 준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3학년때 일어난 3·1운동이었다. 그의 3·1운동에 직접 참여는 그의 생애에 결정적 전환점을 가져다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자신은 이 3·1운동이 아니었더라면 사람질 못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고백할 정도이다.

 

3·1운동에 참가한 이후 일제가 운영하는 학교에 복학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복교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는 의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이제 삶의 다른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 2년간 집안일을 도우며 소일하다 1921년 서울에서 함석규(咸錫圭)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오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함석규 목사는 사점 마을에 처음 기독교 소개한 사람이며 함석헌의 초기 기독교 수용에 큰 영향을 사람이었다.

 

오산학교의 입학은 두 가지 의미에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오산의 정신을 통해 민족. 민중 그리고 기독교 정신을 수용한 것이다. 당시 오산 학교의 정신은 "청산맹호식의 민중정신, 자립자존의 민족정신, 그리고 참과 사상의 기독정신"으로 뭉쳐 있었고 이를 함석헌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또 한가지 오산학교 시절의 중요한 사건은 그의 평생 스승이되신 유영모 선생님과의 만남이다.

 

유영모는 당시 서른 둘의 나이로 함석헌이 오산학교를 입학한 그해 가을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함석헌은 평생 유영모 선생님의 사상의 ’알짬’들을 가장 가까이서 전수받고 발전시켰다. 그를 통해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을 한몸에 체화시키는 삶을 맛보기 시작했다. 함석헌이 죽을때까지 ’정신’ ’생각’ ’말씀’ ’뜻’강조점을 두는 그 출발은 전적으로 유영모 선생님의 영향때문이었다. 유영모를 통해 함석헌은 ’생각’ ’참’ ’생명’등에 깊게 생각하는 습관이 서서히 자라났고 기독교를 보다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함석헌의 삶을 전체적으로 살펴 볼 때 유영모 선생님과의 만남은 함석헌의 사상의 틀을 형성하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특히 유영모 선생의 ’씨’을 받아 독창적인 ’씨알 사상’으로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이 두 사람의 만남의 고귀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유영모는 함석헌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선생님이셨다.

 

이 시절 또 하나 사상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의 역사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웰즈(H.G. Wells)의 ’세계문화사 대개’를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책을 통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세계 국가주의와 과학사상에 눈을 뜨게 된다.

 

이처럼 그는 오산 이년 동안의 생활을 통해 비로서 ’생각하는 인생’을 뒤늦게 나마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이때부터 그는 종교를 남의 사상에 쫏아 믿기 보다는 더 길고 참된 믿음이 있어야겠다는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암울한 역사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상, 새로운 교육을 받아드릴수 있었던 것은 평안도라는 지역이 양반과 상놈의 계급의식이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는 곳이어서 본래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지역적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그곳에는 기독교의 수용으로 인한 구습타파의 개혁적인 사상이 전해져 있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함석헌 자신의 집안이 가지고 있었던 정의감과 개화된 의식은 함석헌으로 하여금 신교육을 수용할 수 있게한 결정적인 요인되었다.

 

이 시기에 그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그의 마음에 기독교를 처음 소개해 주었고, 후에는 오산학교로 인도해 준 함석규 목사와 함석헌의 사상의 깊이를 파가도록 이끌어 준 유영모 선생 등이며, 사건적으로는 치욕적인 한일합방과 민족의 문제에 처음으로 뛰어들었던 3·1운동 사건이다. 이 사건들은 지역적으로 타고났던 민족·민중·민주 영향을 부채질했으며, 민족, 민중,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된 오산 학교 생활은 앞으로 자신의 삶의 실천과 사상적 성숙에 기초가 되게 한 것이다. 이 시기는 말 그대로 ’어린순 날카론 맘이 뜻을 품고 다퉈가며 서는’시기였던 것이다.

 

 

 

2) "뜻 하늘에 달듯컨만"(1923∼1927년)

 

 

 

이 시기는 함석헌의 일본 유학 시절이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그래 4월 일본유학을 떠난다. 그가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된것은 민족의 새로운 길을 교육을 통해 펼치고자 교육에 뜻을 둔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3·1운동 이후 많은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느끼고 있을 때였고 이러한 시대정신에서 그는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했다.

 

 

 

"그때 만세 이후에 민중은 부쩍 깨기 시작했으므로 교육열이 높았다. 그것은 오늘의 소위 교육열보다는 훨씬 참된 것이었다. 또 한편 다가오는 일본 자본주의의 압박 앞에 이러다가는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을 뿐아니라 민족적으로 온통 망해 버린다는 불안이 사회에 넘치는 때였다. 그러므로 교육이 가장 급하다는 생각에 사범의 길을 택했다."

 

 

 

일본에서 입학 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를 경험하게 된다. 이 지진은 일본 동경의 3분를 잿더미로 만든 천재였지만 일본 군국주의가 이를 이용하여 ’공산주의 혁명’을 빌미로 조선인을 폭동의 주범자로 모아 수천명을 살해하였다. 함석헌은 이 사건을 체험하면서 이 학살은 일본의 ’조센징의 학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조선이 학살된 사건으로 보고 일본의 예견된 파멸을 예견 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감옥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유학시절 그가 처음에 직면하게 된 사상적 갈등은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었다. 그는 기독교가 민족을 건질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와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가 타당한가 하는 번민속에서 사로잡혔다. 그 갈등의 구체적 내용은 당시 민족의 상황이 혁명없이는 해방의 길이 없다는 판단과 그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또 그 사회주의는 기독교가 갖고있는 "도덕적 인도주의"를 무시하고있다는 인식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었다. 그는 당시의 비기독교적인 사회주의 윤리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山)과의 만남은 하나의 빛이었다. 그와 우찌무라와의 만남은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기독교의 진리’를 새롭게 깨닫고 신앙과 민족, 신앙과 애국 등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평생을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갈 것을 아주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시절 그는 역사, 윤리, 교육에 관한 폭넓은 독서를 통해서 종교를 점점 과학적인 자리에서 보게 되었다. 이미 이때 그는 기독교가 유일의 종교가 아니요 종교 중의 하나라는 사상을 갖게 되었고, 그 밖에 타고르, 칼라일, 스토이, 쉬바이쩌의 사상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 유학을 떠날때의 각오, 그리고 생활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현해탄을 건널 때 품고 간 것이 있습니다. 비바람보다 더한 눈총 속에서도, 땅을 태우소 하늘을 지키는 불길 속에서도, 번쩍이는 창검 속에서도, 내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하던 일 다 마치고 얼굴빛 더 그을어지고 현해탄 도로 넘어 다시 돌아올 때도 품고 돌아온 것 있습니다. 속이 여물려면 물론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이미 씨알로서의 알갱이는 넣어주심을 받은 것이 있었노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오산 시절에 이미 깨기 시작한 ’혼’의 소리를 쫓아 다양한 사상들을 수용하면서 ’뜻’을 향해 나간 시기이며, 이후에 전개될 함석헌 사상의 열매의 씨앗들이 심겨진 시기였다.

 

 

 

3) "외로운 길손" : 1928∼1947년

 

 

 

이 시기는 동경 유학후 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을 시작으로 해방후 월남하기 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다시 두시기로 나눌수 있는데 첫번째는 1928∼1938까지의 오산학교 선생시절이며, 두번째는 1938∼1947년 오산 교사이후부터 월남하기 전까지 기간이다.

 

오산 교사시절은 함석헌 자신이 갖고 있었던 역사의식과 기독교정신(무교회신앙)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가면서 자신의 역사의식을 정립해 가는 때이다. 귀국 후 그는 무교회 신앙 동지들과 ’성서조선’을 발간하고 거기에 ’신앙의 참 본질’을 다루는 글들을 기고했다. 동시에 그는 역사 교사로서 올바른 역사를 교육해야 한다는 고민 속에서 당시 무교회 신앙인들의 동인지였던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기고하기 시작했다.(1932∼1934) 이 글은 30대초 눈으로 당시 만연되어 있던 "보수적 사관을 뒤엎고 연대기에 머문 사학계풍토에 사관을 갖고 꿰뚫어 보았다는 점에서 한국의 역사이해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왕권중심의 사관을 깨고 ’반역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았고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라 한국사를 세계사의 지평, 그리고 그것도 넘어서 역사 밖에서 역사를 꿰뚫어" 보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민족의 문제를 신앙의 눈으로 직시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갖는 "뜻"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일제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인해 교편생활을 빼앗기고, 이때부터 그는 이 역사의 고난의 현장을 점점 깊이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인생대학’이라 불렀던 감옥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1923년 관동대진재때 처음 시작한 감옥살이는 이 시기에 1930년 ML당 사건에 연루되어 정주 경찰서에서 일주일, 1940년 김혁(金赫)이 경영하던 송산농사학원(松山農事學院)을 경영하다 김혁이 관계된 이른바 계우회(鷄友會) 사건에 걸려들어가 대동경찰서에서 1년의 옥고를 치웠고, 출감후 1년이 지난 1924년에는 ’성서조선’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옥고를 치뤘다. 해방전에 이미 5번의 감옥생활을 경험하는 고난에 찬 삶이 시작된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옥이력에도 불구하고 함석헌 자신은 그때 자신의 삶의 행동양태는 ’소극적 반항’의 형태였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나는 사람의 삶을 전체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때는 아직 개인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이 바로 되면 사뢰는 저절로 바로된다. 다라서 개인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근본적이요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때 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의 가치관으로 인해 함석헌은 일제의 억압을 몰아내기 위하여 적극적인 정치적 투쟁, 조직적 투쟁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으며 다만 종교와 교육과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서대문 형무소 생활 이후에 다시 귀향해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농사일에 전념하는데 ’하나님의 발길’은 그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8·15해방이 다시금 그를 역사의 무대에 나서게 한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그는 용암포 자치위원장, 그리고 군 자치위원장자격으로서 신의주에 파견되어 평북 자치위원회 무교담당을 맡게 된다. 이것이 그의 사회·정치적 활동의 첫 시작이었다.

 

그가 월남하게된 경위는 신의주 교육담당으로 있을 당시 용암포 군위원장으로 있던 이용흡(李龍洽)의 횡포에 대항한 용암포사건이 도화선되어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학생사건(新義州學生事件)에서 비롯되었다. 함석헌은 이 사건의 배후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이제는 소련군의 총칼 앞에서 사생의 길을 걷게된다. 당시 소련군의 총부리 앞에서 서있었던 그때의 심정을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상한 것이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똑똑했다. 지금도 그때의 내 모양을 그리라 해도 그릴 수 있다. 숨결이 높아졌다는 기억도 겁이 났다는 기억도 없다. 열인지 스물인지 알 수 없는 총부리와 칼과 피스톨이 내 가슴에 방사선형으로 와 닿을 때 번 듯 내 속에 비친 말은 ’오늘은 이렇게 가게 되는구나!’ 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 순간 ’이왕 죽는 것이면 비겁하게 해선 못 쓰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군인들의 얼굴을 본 기억도 없다. 그때 남향을 하고 서 있었는데 그저 뵈는 대로 저 먼 곳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하다는 생각도 그들이 밉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하나님이란 생각, 믿는다는 생각, 옳은 도리라는 생각, 평생에 배우고 지켜온 것이 내 속에 살아 있었다.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 그를 살려냈다. 그는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후 그는 출옥되었지만 공산주의자들에게 ’위험분자’라 분류되어 보안대의 감시 속에서 재수감의 생활을 반복한다. 그것까지는 견딜만했는데 급기야는 스파이 활동의 강요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다는 결심으로 결국 1947년 2월 26일 월남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이 약 20년의 삶은 개인적 그리고 종교적 신앙적 차원에서 점점 정치적, 현실역사적 차원에로 접어들게 되는 시기이다. 민족고난의 현장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 민중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해와 무교회 신앙을 서서히 벗어나 신앙의 실천적 이해를 넓히는 시기며, 동시에 실패와 좌절의 연속 속에서 고난의 실제적인 차원을 경험하는 시기였다.

 

 

 

4) "다시금 하늘 우러러" : 1947∼1962

 

 

 

1947년 2월 26일 월남하여, 그해 3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한 그는 유영모 선생과 재회하게 된다. 이 재회는 그로 하여금 사상의 지평을 동양 사상으로 넓히는 동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동양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희망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세계질서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재편되는 것을 비판 하면서 국가주의의 종말을 예견하고 이에 대응하는 ’새질서’를 감당할 새정신, 새종교, 새문명을 추구하게 시작했으며, 이것을 동양사상과 서구 사상의 만남을 통해 지향해 갔던 시기다.

 

신앙적으로는 무교회의 내촌(內村)에게서 배운 신앙의 틀을 벗어나서 주체적인 신앙을 향해 도약한다. 그는 월남 후 ’말씀’이라는 잡지를 발간함으로서 그의 종교사상을 심화 시켜나갔으며 또한 자신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무교회 신앙을 탈퇴하게 되는데(1952년) 이것을 계기로 그는 보다 넓은 종교와 기독교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 즈음에 그는 퀘이커들을 만나 교류를 시작한다.  

 

1956년 "사상계"에 발표한 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시발로 당시 기독교계와 지성인들에 충격을 주는 글을 계속 발표한다. 그 와중에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20일간 옥고를 치루기도 하고, 5.16혁명 발발 이후 살벌한 때에 "5·16을 어떻게 볼것인가"를 발표해 세인을 놀라게 했다. 이렇게 글로 야성(野性)의 소리를 외쳐댔을 뿐 아니라  1957년 부터는 천안에서 씨알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2년에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 여행을 마치고 퀘이커 학교 Pendle Hill에서 10개월간 연구하는 시간을 보낸다.

 

’다시금 하늘 우러러’의 이 시기의 후반기 그의 주장은 그의 혁명론의 전개에서 잘드러나고 있다. 그의 혁명의 철학은 바로 4·19혁명에 대한 냉정한 비판과 5·16군사 쿠테타에 대한 저항의식에 형성되었다. 그의 혁명철학의 핵심은 궁극적인 ’인간혁명’으로 이끌어 내지 못하는 혁명은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이 될수 없다고 보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와 혁명의 통일’을 주장하고, 방법론적으로는 ’비폭력 투쟁’을 주장했다. 이러한 혁명 철학은 간디의 사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는 함석헌의 ’제소리’가 한껏 펼쳐 나가는 때이다. 사상적으로는 동양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동시에 성숙시켜 나가는 때이며, 그 결과 무교회 신앙에서 탈피하여 보다 주체적 기독교 사상들을 추구해 나갔다. 사회활동에 있어서는 당시의 정치, 사회현실, 한국기독교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발표하고 저항함으로서 자신의 저항의 철학, 혁명론을 전개 시키면서 비폭력 평화투쟁의 사상의 깊이를 정립해간 시기였다.

 

 

 

5) "찬 물결 밟고 서서" (1963∼1970)

 

 

 

함석헌은 1962년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 유럽을 여행하게 된다. 그 여행의 와중, 독일에서 1963년 5·16군사세력이 정치 권력으로 주저 앉았다는 말을 듣고는 당시 독일 유학중이었던 안병무의 조언을 받아들여 인도, 아프리카 여행 일정을 취소하고 즉시 귀국한다. 그리고 귀국 후 함석헌은 보다 적극적인 사회비판 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당시 칼날 시퍼런 군사 독재정치 횡포도 그의 의기를 꺽지 못했다.

 

이 당시 그가 행동으로 보여준 활동들을 보면 장준하 옥중출마를 위한 찬조연설, 야당을 위한 연사, 3선 개헌반대 투쟁위원회, 민주수호 국민협의회의 활동 등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고백처럼 성격적으로 이러한 활동이 자신에게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정의, 평화 그리고 고난의 역사를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행동했다. 이로인해 당시의 국가권력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탄압받던 시절 함석헌은 온갖 위협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직언(直言)으로 정권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당시 쓴 글 중 "왜 말을 못하게 하고 못 듣게 하나"라는 글을 보면 함석헌의 당당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아. 이제라도 민중에게로 돌아와. 자유를 완전히 허락해. 민중의 입에 씌우려는 재갈, 그 목에 채우려는 칼을 즉시로 내버려. 그럼 된다. 그러면 죽을까 봐 겁이 나나? 아니다. 특권의식은 본래 좁은 거지만 민중의 가슴은 언제나 넓은 것이다. 박정희씨가 2.27 성명을 했을 때 민중이 얼마나 다행으로 여긴지 아는가. 당장은 몰라도 그랬다가 만일 다음 선거기를 출마했다면 당신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못했으니 아깝지 않은가. 속(速)한 것만이 속한 것 아닌 줄도 모르나. 그것도 모르고 정치를 어떻게 하나. 속담에 ’당대발복(當代發福)에도 강도질이 제일’이라고, 당장 복을 누리잔 것이 화(禍)다. 그러나 이제라도 늦지 않다. 사는 길은 언제나 위험이다. 죽을 각오 아니하고 어찌 살 수 있나. 노한 민중의 손에 죽을 각오를 하고 민중의 손발에서 채웠던 고랑을 벗겨주면 죽을 것 같지만 절대로 죽지는 않는다. 당신들이 민중의 마음을 몰랐구나. 그것은 바다같이 구름이 끼이면 흐리지만 결코 물이 들진 않는다. 민중을 절대 믿는 것만이 참 정치가건만 그것을 당신들이 모르는구나"

 

 

 

비판 사상이 육화(肉化)된  실천가로서의 모습과 더불어 이 시기는 퀘이커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해가면서 자신의 기독교사상의 내적인 성숙을 시도해 가는 시기이다. 1967년 그는 미국 퀘이커 교도 태평양년회 초정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퀘이커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현실적으로 냉혹한 ’찬 물 밟고 서있는’ 이때에 사상적으로 함석헌은 퀘이커의 ’역사의식’, ’공동체외 내면의 절대 순수의식’, 그리고 평화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이 기간에 보다 중요한 그의 삶의 모습은 그 자신이 일제시대 경험한 민중, 민중의식을 보다 삶 속에서 구체화시켰나갔는 점이다. 다시말해 씨알이 어떤 가치를 지닌 존재이며,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함을 사회활동을 통해 경험하고 사상적으로 확립해 나간 때이며, 이것은 다음시기 ’씨알의 소리’ 창간과 그것을 통한 활동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역사 참여와 종교 성숙이 함께 이루어 나간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역사의 부름 앞에서 보여준 실천적 활동과 또 다른 한편의 종교적인 내면적 헌신이 결코 유리되지 않는 그의 삶의 모습에 주목해야 한다. 삶의 본질로서의 종교의 깊음과 참을 추구하는 일과 외연적 운동(movement)을 동시적으로 추구해가며 사상적으로 성숙시켜 나가는 모습을 통전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6) "높은 봉 구름 위에 거룩한 숨을 마셔" (1970∼1989)

 

 

 

1970년 ’씨알의 소리’를 창간 하면서 본격적으로 씨알 사상을 전개시켜가는 시기이다. 당시 "씨알의 소리"는 ’사상계’와 더불어 이 땅의 비판적 지식인과 씨알의 소리를 대변지 역할을 감당했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내는 목적을 "천하 씨알이 다 소리를 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그 구체적인 목적을 다음과 말하고 있다.

 

 

 

"이제 내가 이 잡지를 내는 목적을 말합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 사람이 죽는 일입니다. 씨알의 속에는 일어만나면 못 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 씨알의 속에는 일어만나면 못 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을 받아야지. 누가 명령하나? 하나님 혹은 하늘이 하지. 옳습니다.(하나님은) 사람의 입을 빌어서 하십니다. 하나님의 입은 사람의 입에 있습니다. (중략) 둘째는 거기 따라오는 것인데 더 중요한 것입니다. 유기적인 하나의 생활공동체가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씨알들의 살아있는 전달하는 매개체로, 그리고 새로운 정신으로 무장된 유기적인 공동체로 사회변화의 힘을 길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그의 모든 사상을 이 ’씨알’에 집중시켜 씨알의 ’씨알됨’을 주장해 나갔다.

 

"씨알의 소리"는 1970년 4월 창간되었으나 정부의 인가취소로 1년간 법정 투쟁을 해야했고 계속에서 언론 탄압의 구조로 상처받다 결국 1980년 폐간조치를 당한다. 그리고는 다시 1988년 12월 복간되었다.

 

함석헌은 1970년 정치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사회활동에 참여하여 연행, 구금, 구속등의 탄압을 받는다. 1972년 "군인정치 10년을 말한다"를 발표함으로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으며,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에 동참하여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의 판결을 받게된다.

 

그러나 이 당시 발표한 글들을 보면 고난의 현장에서도 씨알에 대한 믿음과 신뢰, 희망 그리고 고난의 역사의 미래를 내다보는 끊임 없는 희망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씨알의 혁명" "씨알의 꿈"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 등의 글을 통해 씨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씨알 사상의 이해 지평을 넓혀가는때이다.

 

그러나 80년도의 광주민중혁명 이후, 노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저술활동과, 사회 참여에 힘썼다. 그의 80년대의 삶은 거의 사회적으로 보도되지 못하는 통제를 받게 됨으로서 그의 생애를 오해할 수 있는 요지가 많은 시기이다. 함석헌의 80년대 삶은 사회활동 있어서나 사상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전개시키기 보다는 지금까지 발전시켜온 종교적 신념, 역사의식, 씨알 사상을 통전적으로 되씹어 내는 시기이다. 참여를 통한 구체화요, 진보이다. ’새 종교’를 통한 새 문명의 도래의 희망, 고난의 역사를 짊어지고 나가는 씨알들에 대한 희망, 평화사상과 비폭력 투쟁을 통한 역사적 혁명에 대한 전망 등 ’뚫린 피리의 한 소리가 하늘가’로 울려나오는 시기이다.

 

 

 

지금까지 함석헌의 멋진 삶을 짧게 서술해 보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을 걱정하며 민주주의 민중을 위해 전 삶을 바친 사람들 중의 함석헌의 사상과 그의 실천적 삶의 영양분을 먹지 않는 자 없다. 그 만큼 그는 우리 현대사 속에서 사상사에서, 혹은 민주주의 운동사에서 빼놀 수 없는 분이다. 그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몸소 체험하고 이 사건들을 자신의 삶과 사상 속에서 체화시키려는 자세로 생애를 살으셨다. "그는 사상적으로 웰즈에게서 문화적, 역사적 낙관주의, 톨스토이에게서 휴머니즘, 內村에게서 성서, 타골, 칼라일, 카스키, 노자, 장자, 바가바드기타에서 최근의 데이아르 샤르뎅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사상의 편력을 계속했는가 하면 삶과 행동의 면에서는 인도의 간디에 심취해 왔다."  함석헌의 전 생애는 좌절, 번민, 희망을 끌어안고, 밖으로 수많은 모함과 찬사를 동시에 받은 ’참을 추구하는 삶’이었다. 악과 싸우면서 진리를 역사속에서 평화적으로 실천하려는 비폭력 저항의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평생 국가주의를 배격하고 ’노자적인 아나키즘’를 정치적 신념으로 삼으며 정치적 활동을 전개해갔다.

 

또한 그는 새문명의 도래를 희망하였으며, 이를 위해 씨알을 향해 사랑과 교육을 펼처나가는 생을 살으셨다. 함석헌은 1989년 2월 4일 영원하신 님의 부름을 받고 영원한 길을 떠나셨다.

 

이 작은 지면에 다 기록할 수 없는 그 분의 투철했던 삶의 모습을, 그 분이 떠난 후 故 문익환 목사는 다음같은 애도의 시로 추모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멋쟁이, 겨레의 어버이, 만인의 벗, 함석헌 선생님!"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께 좋은 시를 지어바치고 싶었습니다. 있는 정성을 쏟아 오늘 새벽 2시 반까지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나와서 보니까 이건 휴지같이 느껴져 그대로 살라버리고 깊은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괜찮아, 읽어!" 이렇게 격려해 주시는 것 같아서 고함이나 질러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너무나 인간적이셨던

 

우리의 멋쟁이, 겨레의 어버이, 만인의 벗

 

함석헌 선생님

 

 

 

그 멋진 수염 흩날리며 팔십팔년이나 쳐다보시던

 

당신의 하늘이 오늘따라 서러운 눈물 뿌리는데

 

저 북쪽 당신의 고향 고구려의 정기 아직도

 

태백산 줄기 타고 숨쉬고 있는데

 

당신이 우리을 떠날 수 있나요?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안됩니다-

 

 

 

(중략)

 

 

 

당신은 씨알을 믿으셨지요

 

씨알을 믿지않음 누굴 믿어

 

그 믿음이 부끄럽기 그지없는 나의 생애

 

참담한 팔십 팔년 수난사를 절망하지 않고

 

네 활개를 치며 살아오도록 지탱해 준 힘 아니겠어

 

선생님, 그 믿음이 바로 부활신앙었군요

 

씨알은 땅에 묻혀 죽어야 움이 터지며

 

새싹으로 다시 살아나는 거 아니겠어

 

몇 만년 전인지 모르지만

 

북극 얼음 속에서 숨도 못 쉬던

 

씨알 하나

 

땅에 심었더니 거기서도 새싹이 나더란 말 못 들어 봤나

 

예, 들어봤습니다.

 

그렇게 씨알은 기다림이군요, 희망이군요

 

깜깜한 절망 속에서 빛을 놓치지 않는 믿음이군요

 

그 믿음 포기하지 않는 저항이란 것도 잊지를 말게나

 

 

 

(중략)

 

 

 

흰 수염 바람에 멋대로 나부끼듯

 

당신을 어디서고 매이지 않고 네 활개를 치는 자유인이었군요

 

당신에게 주의라는 말 어디 어울립니까

 

그래서 제도도 싫고 조직도 싫어 무교회주의자가 되시죠

 

그랬다가 성서의 글자풀이에나 열을 올리는 것이 싫어

 

무교회주의와 작별하시는군요

 

그리고 자유로운 마음만으로 모이는 퀘이커가 되시는군요

 

당신의 관심은 오직 겨레의 자유였죠

 

당신의 날개를 묶을 오라는 어디도 없었으니까요

 

어린 씨알들에게 불어넣으려고 우리의 역사에서

 

찾아 낸 자유의 넋, 그건 역적들에게밖에 없다는 걸

 

 

 

간파하고 말았군요 이리하여 당신은 일찌감치 불온분자가 되셨군요

 

만주 벌판을 누리던 옛 고구려의 씩씩한 기대가 그리우셨죠

 

김춘추의 삼국통일에 가슴을 치셨죠

 

묘청의 평양천도 실패에 분루를 삼키셨죠

 

 

 

박정희가 권좌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하이델베르그 안명무 박사 하숙방에서 통곡하셨다죠

 

 

 

계획된 여행을 중단하시고 허둥지둥 돌아오셔서

 

장준하와 같이 반독재 투쟁에 나서시는군요

 

민주주의가 그렇듯 소중한 줄 아시면서도

 

입을 열었다하면 "난 정치가 싫어"하셨죠

 

정치가 싫다는 건 "자유가 전부"라는 말이었죠

 

자주와 통일을 온 몸으로 외치신 당신이

 

민족주의는 못마땅하셨죠

 

국가주의는 더욱 질색이었구요

 

그것은 평화의 적이었으니까요

 

당신이 자유만큼 사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평화였죠

 

주의가 싫어 무교회주의마저 떠나신 당신이지만

 

비폭력 평화는 당신의 신조였죠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우리의 멋쟁이, 겨레의 어버이, 만인의 벗이여,

 

자유와 평화의 넋이여

 

당신이 우리를 떠나신다고

 

우리가 당신을 보낸다고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고이 주무시려거든

 

우리의 가슴에서 주무세요

 

눈을 뜨시려거든

 

우리의 역사에서 눈을 뜨세요

 

저 휴전선 철조망이 쳐져있는 거기에서 눈을 딱 뜨고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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