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re:이대수님 이하-본명과 글이 무슨 관계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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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카엘 [zu4rang] 쪽지 캡슐

2002-11-09 ㅣ No.43258

이대수 님.

님이 평소에도 신앙적 위선에 직언을 하셨던 분이라면 저는 님의 의견을 고맙게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교회의 잘못과 신앙인들의 잘못에는 무관심하다 자신의 심기에

거슬리는 글이 나오니 나타나서는 애꿎은 남의 본명(세례명)에 딴죽거는 위선은

도저히 참을 수 없소이다.

 

님.

미카엘 대천사 님이 불의를 눈앞에 두고 님 같은 분들께 듣기 좋은 소리만을

읊조리는 분이시란 말입니까? 성교회를 증오와 대립 속으로 내던지는 악으로

부터, 악을 옹호하는 또 다른 악으로부터, 그러한 위선 속으로 사탄에게 고스

란히 성교회를 헌납하려는 또 다른 위선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내는 것이 그분의

임무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는 그분의 ’미’자도 따라 가지 못하고 있습

니다.

 

보세요, 님.

님의 말처럼 가톨릭 재단 수뇌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니 성서를 인용해서는 안되면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들께선 바리사이파와 대

사제들의 위선을 어떻게 지적하실 수 있었단 말이요?

 

보세요, 님.

미카엘 대천사 님이 언제나 님과 같은 분들의 비유를 맞추어 주는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시랍니까? 언젠가 조민석 님의 표현처럼 ’꽃 그림에 천사가 나올 것

같은 글’로 도배를 하는 것이 미카엘 대천사의 이미지를 지키는 일이랍니까? 교회

의 위선을 묵과하고 그저 하느님께서 해주실 거야 그저 주님 뜻에 맡기고 ’Let it

be.’ 하자 하는 것이 신앙인의 덕목이었습니까? 심는 것은 우리가 하되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 심지도 않고 그저 ’Let it

be.’ 하면 자라 나오는 것이 있다합디까? 평화를 위한 대화를 심지도 않고 주님이

사태를 평화롭게 이끌어 주신다고 합디까?

 

님과 같이 신심 깊은 분들은 예수님에게조차 그리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시려거든 비난의 글이 아닌 그에 맞는 좋은

글을 올리시던 지요.’

 

보세요, 님.

성서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바리사이파의 위선을 질타하는 말씀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의 이미지를 흐리지 않으려고 꽃 그림에

천사가 나올 것 같은 말씀만 하셨던가를.

 

보세요, 님.

나는 뜬금없이 남의 본명을 들먹이며 하시는 님의 감정에 어이가 없었오이다.

그래 제가 나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언하려고 그 변론을 한 것이었오? 가톨릭

재단이 얼마나 잘못을 하고 있는가를, 그리고 노동자만 봉으로 알고 불공평하게

대하는 재단에 대해 속 터지는 노조들의 억울함을 말해 주었던 것이었오. 그래,

나는 님이 나에게 하여준 말을 도로 돌려 드려야겠오. 남의 글의 내용은 덮어

두고 애꿎은 본명으로 생트집을 잡는 님에게 ’정말 어이없는 느낌이 들어서 불쾌

합니다.’ 하셨던 그 말을.

 

보세오, 님.

정말 치사한 인간들이 어떤 줄 아시오? 글의 내용에 대한 견해는 말하지 않고

엉뚱한 것으로 생트집을 잡는 사람이외다. 이전에 제가 카톨릭, 가톨릭, 천주교

를 혼용해 쓴 것으로 생트집을 잡던 이들처럼.

 

보세요, 님.

님 같은 분들의 눈에는 제가 인용한 성서의 구절이 다른 사람 흠잡는 것으로

보이겠지요. 그러나, 서슬 퍼런 교회 재단의 권위에 대항하는 저 같은 평신도의

유일한 무기는 하느님의 말씀 밖에 없더이다. 더욱이 저 같은 개신교 출신 천주

교인에게는 성서의 말씀 이외는 의지할 것이 없더이다. 더 이상 이 일시적인 교회

재단의 위선과 이를 두둔하는 교회 당국 앞에서는 도저히 교도권에 의지할 수

없더이다.

 

보시오, 님.

다시 한번 보시오. 제가 개개의 개인들을 비난하는 데 성서를 인용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비난의 목적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가르침에 회귀하여 노사가 ’화해의 길’로

나가길 바란 것인지를. 또한, 교회 재단이 노동자들에게 보인 그 불의와 불공평,

그리고 우리 신자들을 기만하고 절반의 불의를 슬쩍 덮어둔 천주교 서울 대교구의

명의로 낸 그 성명서를.  

 

보세요, 님.

과연 어느 사제께서 불법을 저지른 의혹을 받고 있는 재단의 혐의에 대한 진상조사

를 촉구하셨단 말이오? 교구가 달라서 더 이상 힘을 더해 주시지 못하시는 한 분의

의로운 사제께서 양심과 진실과 화해를 바라며 올려 주셨던 글 이외는 어느 사제

께서 저들을 아울러 주셨고 힘을 써 주셨단 말이오.

과연 어느 사제께서 서슬 퍼런 재단의 대 선배 사제들의 잘못들에 직언을 하기 위해

저들 앞에 나서 주었단 말이요? 그러한 일을 보잘 것 없는 평신도 몇 사람이, 그것도

지금은 냉담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한 사람이 님 같은 이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항거

하는 이유와 진작에 복귀했어야 할 저 노동자들이 저토록 매달려야 하는 심정을 이해

라도 하실 수 있단 말이요?   

 

보세요, 님.

님처럼 신앙에 충실한 신자분들이라면 교회가 잘못된 길로 접어서는 순간에도 ’사제

들의 뜻이시니 어련하시겠는가? 하느님이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이끄시는데 Let it be

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해.’라고 할 것이오. 그러나, 보세요. 우리 가톨릭이 지난

세월 중, 죽일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종교 재판으로 불구덩이에 묶어 죽여 갈 즈음

그렇게 미쳐 돌아가는 현실 앞에서도 님 같이 신앙이 충실한 분들은 ’사제들의 뜻이

시니 어련하시겠는가? 하느님이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이끄시는데 Let it be 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해.’ 하였을 것이외다. 하느님과 교회와 사제들을 모독했으니 당연

하다는 기준 속에서 말이오.

 

그렇게 님 같이 신앙이 돈독하신 분들이 남의 식구의 문제라며 이렇게 수수방관 할

동안 노동자들의 가족들은 의사들은 올라가 본 적이 없는 마이너스 통장의 빚더미

위에 올라가 있고 그분들의 착실했던 가족은 생전 가보지 못한 유치장에 다녀와야

했으며 끝내는 전과자의 딱지를 받아야 하오.

 

보세요, 님.

이러한 일을 신앙인의 양심으로 묵과할 수 있는 일이었소? 불의는 묵과할 수 없다는

저들이 재단의 불의는 슬쩍 덮어 은폐하는 것이 공의로운 양심이었소? 나는 나의 양심

이 썩어 물러지기 전까지는 그리 할 수 없소이다.

그렇소. 노조도 잘못한 점은 있소이다. 그렇기에 어느 신부님의 말씀처럼 저도 그분

들의 방법은 찬성은 하지는 않지만 그분들의 목적은 찬성하고 그분들의 심정을 깊이

동감합니다. 그러나, 저는 재단의 방법목적도, 그 어느 것 하나 찬성할 수 없소

이다.

 

과연 님처럼 신앙에 충실하신 분들은 종교 재판이 성행하던 즈음에 님의 가족 중 한

분이 불구덩이 앞으로 끌려가게 될 때에도 지금처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소?

이 사람 저 사람 닥치는 대로 붙들고는 하소연  하며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나, 보시오. 님의 식구의 일이 아니라고 수수방관하고 앉아 있다가 애꿎은 남의

세례명을 트집잡고 자기의 기분을 터뜨리고는 일장 훈수를 벌이고 가는 님 같은 분들

의 그 의로운(?) 위선에 기가 막힐 따름이요.

 

보세요, 님.

노조가 먼저 도피성을 운운하며 성전에 몸을 의탁할 때, 신앙인이라는 이들은 성전

에서 상인들을 내치신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성서 말씀을 인용하며 여기서 나가면

감옥 행 일 수밖에 없는 저들을 성전에서 내어쫓으려 하였오.

 

도피성. 그렇소. 신심 깊다는 신자 분들 말씀대로 본의 아니게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이들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자비 이셨지 의도적인 살인을 저지른 악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오. 그런데, 노조가 환자들을 볼모로 한 파업을 하기까지의 전 과정

이 과연 노조만의 책임이었소? 물론 저들의 책임이 있소. 그런데, 그 절반의 책임은

지금 어디론가 실종되었단 말이오. 서울 대교구가 버젓이 내놓은 성명서의 그 거대한

장막 속에 이 절반의 책임과 불의가 은폐되어 버렸단 말이오.

그리고, 보시오. 재단의 수뇌부는 성전의 보호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탈법과 불의로

부터 도피하여 따스한 보일러가 몸을 덥혀 주는 그런 방안에서 지금껏 하느님께 기도

를 하고 있단 말이외다. 노조와 대화의 문을 닫은 이들에게 과연 하느님께서 대화를

해 주시고 계시는 지는 모르겠으나 책임이 있다면 노사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되 지금

은 그 절반의 책임이 흔적도 없이 은폐되어 있소이다.

 

나는 보게 되었오.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치시는 성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교회가

아울러 주지 못했던 착실했던 그 노동자들을 의사들과는 다른 잣대로 끝끝내 전과자

의 과정으로 내몰기 위해 악을 쓰는 군중들과 공의가 실종되어 가는 성교회의 치욕을.

나는 맞서야겠오. 그러기 위해서 인용해야겠오.

 

나는 재단의 위선에 맞서야겠오. 그러기 위해 서슬 퍼런 재단이라는 권위에 맞서기

위해 성서의 말씀을 인용해야겠오.

 

착실했던 노동자를 전과자의 과정 속으로 내모는 이 교회 재단과 이 세상과 맞서야

겠오.

 

나는 인용해야겠오. 저 노동자를 정죄하고 단죄하여 전과자의 과정 속으로 내모는 데에

성서의 말씀이 사용되고 있는 이상 그 말씀으로 저들을 보호해야겠오.

 

도피성의 율법이 사용될 즈음이라면 저들을 보호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간음하다 현행범으로 붙잡혀 온 여인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고 구해주신 우리

예수님이 계시는 은혜의 시대에서 저들을 거두어들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

이오?  

 

보시오. 저들이 한때는 저들의 분통을 이기지 못하고 사제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그분

들의 멱살을 잡고 거룩한 미사에 훼방을 놓고 성전에 그들의 선전물을 내걸어서 보는

이들에게 분심을 끼쳤을 것이외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이었소? 한때, 한때 분을

못 이겨 한 잘못들을 언제나 그런 족속으로 내몰아 세우는 것이 신앙인들의 눈에 비친

모습이었소? 지금도 잘못을 깨닫지 않고 미사를 훼방한다면 비난은 당연할 것이오만.

 

그런데, 나는 보게 되었오.

예수님의 손에 쥐어진 두 개의 무서운 채찍을. 그대들의 뜻대로 성전의 장사치들을

내쫓으시던 것과 같은 노조를 내리치시는 채찍을. 그리고, 공의와 공평을 무너뜨리고

불의를 저지르고도 은폐하는 교회 재단의 금고를 향해 내리치시려는 또 하나의 주님의

채찍을.

빛과 소금의 직분이 약해지고 세상의 경영자들이 저지르는 불법을 답습하고만 그들에게,

어머니의 이름으로 소중히 세운 그 병원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세운 그곳에서 세상의

기업들이 하던 방식을 쫓아 어미의 태 속에서 고이 자라던 생명들이 무리한 노동을 견디

지 못하고 그 어미의 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분통을 터뜨리시는 예수님의 채찍을.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 스테파노 성인 같은 거룩한 사제께서 자신을 모욕하고 끝

내는 못박고 돌팔매질하여 죽이는 이들을 하느님께 용서하시길 청하시고 숨을 거두셨던

것을.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모든 죄와 모든 불의와 모든 증오로부터 장사 지냄

받아 이젠 더 이상 이것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의미한다는 가르침과 그리고 이것은

이렇게 용서로 완성되었다는 가르침을.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십자가의

도(道)라는 가르침을.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의 가톨릭 재단의 수뇌부에서는 사제를 모욕하였다는 괘씸죄에

묶여 주님께서 보여주셨고 스테파노 성인께서 보여주셨던 거룩한 용서와 사랑의 본을

지금껏 보여주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나, 더욱 불행한 것은 이때까지 저는 이 십자가

의 도의 그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고백합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나갈 수밖에 없음을. 그러나, 위선자로는 나갈 수 없음을.

주님 앞에 나온 모든 죄인들은 모두 죄 용서함을 받았지만 위선자들은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 죄 용서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함부로 인용해 버린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주님의 종 미카엘 대천사 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이라도 저 냉대 받는 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데 보탬이 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나의 주보 성인께서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님께 묻습니다.

나의 본명이 미카엘이 아닐지라도 나의 글이 달라질 이유가 무엇인가를...

 

 

(저는 재단도 노조도 그 누구도 처벌로 치닫지 않길 바랄 뿐이며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본을 보고싶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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