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사부님 전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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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3-01-09 ㅣ No.46455

제가 사부님을 알게 된지도..

어느덧 3년이 다 됐네요.

 

오늘 사부님을 뵌 터라..

굳이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라는 인사는 안 드려도 되겠군요.

 

사부님을 만나뵈러 가는 길은 참 고단했어요.

멀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막연히 느껴졌던 감정상의 거리가 더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 사부님을 뵀을 때..

사부님은 학생이셨죠.

제게 주신 답장의 편지에..

신기하게 같은 학번의 동기를 만났다고 반가움을 표하셨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 동안 끊일 듯 끊이지 않고 메일을 통해 연락하는 동안..

전 사부님께서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부제품을 받으시면서..

조금씩 저와는 다른, 좋은 분이 되가시는 과정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어요.

제게는 참으로 귀중한 경험이었죠.

 

사부님께서 주시는 답메일을 받아보면서..

즐거움도 참 많았어요.

여러가지 작은 일들이 기억나네요.

 

주위 사람들이 저보고 웃기게 생겼다고 놀린다는 말씀을 드린 후로..

걸핏하면 사부님께선 제게 "웃기게 생긴 제자님"이라고 제 염장을 지르셨죠.

그 표현을 볼 때마다 머리 위로 스팀이 오르는 경험을 매번 했지만..

저 또한 사부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릴만한 말을 만만치 않게 했기에..

자업자득. 인과응보라는 말을 되새기며 참곤 했어요.

 

부제가 되시고나서 신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참가하셨다던 축구 대회..

우승컵에 술 받아 완샷해보는 것이 소원이라시며 제게 기도 부탁한다고 하셨을 때..

전 30대의 나이로 우승을 바라신다는 것이 말이 되나고 바짝바짝 약을 올려드렸죠.

그 때 사부님께서는 평소의 사부님답지 않으시게 흥분하시며 바로 답메일을 주셔서 엄중 경고를 보내셨어요. 이래뵈도 TTL 세대라고 하시며..

그 때를 다시 생각해보니..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네요.

저물어가는 청춘 운운 하며.. TTL이 알고보니 "TURTLE" 의 약자인가 보라고..

"그라운드의 거북이" 아니시냐고 사부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드렸으니 말이죠.

 

지난 여름에 사부님께서 섬으로 부제실습을 나가셨을 때..

사부님 한번 골탕 좀 먹어보시라고.. 제가 상당히 낯 뜨거운 카드 메일을 보내드렸었죠.

기억하시죠?

웬 양아치 두 명이 해변에서 수영복입은 여자들을 몰래 훔쳐보다가 들켜 코피 날 정도로 얻어터진다는 내용의 카드 메일..

부제실습을 다녀오시고 나서 사부님께선 제게 주신 메일에..

그 카드메일을 성당 사무실에서 열어봤다가 민망하고 난감해 죽을 뻔했다고 고충을 토로하셨더랬어요.

사람들이 대체 누가 보낸거냐고 묻길래.. 엉겁결에 어떻게 해서 알게 된 불교 신자가 보낸 거라고 둘러대셨다면서..

하나밖에 없는 수제자(?)를 졸지에 불자로 개종시키신 사부님 덕분에 전 한참을 웃었죠.

 

어떻게 좀 맞먹어볼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제게..

노련한 사부님은 좀처럼 틈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뭘 그러시냐고 너스레를 떠는 제게..

마지막엔 연년생인 친동생이 저와 동갑이라며 제 온갖 노력들에 쐐기를 박으셨죠.

사실 전 동기랍시고 사부님이 신부님이 되시기 전에 반말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부제품 받으실 때도 은근슬쩍 넘어가셨으니 이번 사제 서품식 날짜 안 가르쳐 주시면 그 서품 무효(!)라고 행패를 부리는 제게..

사부님은 무척 멋적어하시며 서품 날짜를 가르쳐 주셨죠.

"제가 조금만 멋졌다면 당당하게 제자님을 초대할 수 있을텐데요.. 하하.." 라고 쑥스러움을 감추시며 말이죠.

그렇게 힘들고 오랜 과정을 거쳐 서품을 받게 되셨으니..

와서 축하해 달라고 스스럼없이 말씀하셔도 될 것을..

굳이 그렇게 주저하시며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참 겸손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도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실 분이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솔직히 신부님이 잘 생기시면 뭐 합니까.. 핫핫하.. (힉.. 죄송..)

 

그 동안 사부님께서 주셨던 메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모든 사람을 감싸고 헤아리는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으며..

가톨릭 성가책에 보면.. "사제의 마음"이라는 성가가 있지만..

아마 "신자의 마음"도 있나 보라고..

그리고 그 "신자의 마음"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좋은 신부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신다는 말씀에..

생각없는 날나리 신자인 저조차 그토록 감사함과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

 

지난 3년간 그저 서신을 통해서만 연락을 주고 받다가..

오늘 전 처음으로 사부님을 뵈었어요.

길게 늘어서 있는 신자들에게 새사제로서 안수를 해주시는 사부님 모습..

날이 추워 사부님의 손끝은 손가락이 빨갛게 될 정도로 얼어 있었지만..

손 한번 비비지 않으시며 그 많은 신자들 하나하나에게 안수를 해주시느라 여념이 없으셨죠.

 

그 모습에 어쩐지 경건함이 느껴져..

전 사부님께 안수를 받고서도..

선뜻 "제가 그 아무개에요.." 라는 말씀이 안 떨어져..

그냥 발길을 돌려 돌아왔어요.

하지만 그다지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이제 사부님께서 신부님이 되셨으니..

앞으로 저도 신자로서의 예를 깍듯이 갖춰 사부님을 대해드려야겠죠.

마음 같아선 불쑥 찾아가 축하주라도 나누고 싶지만..

언젠가 어느 수녀님께서 지나가는 말씀으로 하셨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신부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멀리서 바라보고 기도해드려야 하는 거라고..

너무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거라고.

 

당시에는 그 말씀의 의미가 뭔지 몰랐어요.

사실 오늘 서품식에 가는 도중까지도요..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사부님을 거리낌없이 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을 막연히 하면서..

왠지 좀 서운하기까지 했거든요.

가장 친했던 고등학교 동창이 결혼을 했을 때 느꼈던 야릇한 섭섭함과 흡사하다고 할까..

아니면 이제까지 동급(?)이라고 생각했던 친구 녀석이 어느 날 저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올라있음을 발견하게 됐을 때의 묘한 허전함이라고나 할까.. ^^

 

하지만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이제 모든 신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실 신부님이 되셨으니..

저도 이제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동년배의 친한 사부님의 모습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마음으로 존경할 수 있는 신부님을 한 분 맞아들여야 할 것 같네요.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아쉽고 섭섭하지 않아요.

사부님과의 이별(?)이 서운하고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이별이 아니라 참 감사하구요.

이제 전 또 한 분의 좋은 새 신부님을 만나게 된 거니까요.

그러니.. 사부님이라는 호칭도 오늘로 졸업(?)해야겠네요.

물론 사부님도 아쉽지 않으시죠?

 

토마 신부님.

진심으로 서품 축하드립니다.

아무쪼록 늘 건강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축복 받으시길..

이제는 더 이상 사부님의 수제자(?)가 아닌.. 신자 베로니카가 기도드립니다.

아울러.. 제게 새로운 기쁨을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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