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백지영의 비디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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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경 [agnes21] 쪽지 캡슐

2001-01-04 ㅣ No.16488

 지난해 12월, 우리학교 학생들과의 회식이 있었다. 소담한 음식과 유쾌한 대화로 웃음소리가 고기냄새와 한껏 어우러지고 있을 무렵 나는 그만 말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때 돼지갈비와 함께 식탁 위에 올려진 메뉴(?)는 백지영의 비디오였다. 요즘 인터넷에 백양의 이력서라고 떠있는 걸 클릭하면 백양메리야스 공장 연혁이 주욱 뜬다면서 우린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그녀의 행동에 대한 가치문제로 얘기가 전환되었던 것 같다. 내가 문득 그런 얘길 했다. "백지영이 무슨 잘못을 했나? 그녀는 단지 피해자일 뿐이다, 그걸 본 놈들이 미친놈들이지."...  갑자기 ’와아’ 하는 웃음이 한꺼번에 폭죽처럼 터져나왔다. 순간 어리둥절했으나 나는 곧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 나의 두 마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동의를 표했던 학생들에게 그 다음 말은 모두를 난감하고 어색한 입장에 몰아넣고 만 것이었다. 난 그곳에 있던 학생들 모두를 싸잡아서 ’미친놈’ 대열에 쓸어넣어 버렸던 거다!

 

 난, 그 때 두 가지 점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공유의 속도와 그 나이또래의 폭발적인 性的 호기심에 대해 어리석을 만큼 둔감한 채, 비디오를 본 미친놈들...운운한 사실이고 또 하나는 백지영이 무죄라는 어설픈 결론으로 이야기를 시원찮게 마감한 사실이다.

 물론 백양은 피해자이고 가여운 20대 여성이다. 사생활로 인해 그녀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죄인 취급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권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의 가치평가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느 면에선 분명 그녀는 유죄다. 그녀는 우리 사회에 면면히 흐르는 가치의 한 부분을 여지없이 조각내 버리고 인간의 보편적인 수치심을 둔감화시킨 책임이 있다.

 어느 사회에건 도덕적인 불문율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는 미국도 북구유럽도 아닌 대한민국 사회이다. 우리사회의 남자들은 아직도 혼전순결에 민감하고, 여성들은 혼전의 성관계에 대해 떳떳하고 자랑스럽지 않다. 나는 직업 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혼전 성경험에 대해 자랑스럽거나 당당한 여자들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그 대상이 설사 지금 자신의 배우자라해도 그리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의 정서다. 그것은 단지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우리사회의 가치관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다른 생물들에는 찾아볼 수 없는 수치감이란 것이 있다. 부끄러움이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중요한 전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뇌가 심하게 손상되었거나 인격적으로 망가진 사람인 경우이다. 그런데 성적인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수치감과 직결된다. 지구상의 생물 중 오직 인간만이 성행위를 남에게 노출시키기를 꺼려하고 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것이 창조주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의 조건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性은 생명을 잉태하는 가장 聖스러운 것으로 구별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인간의 성생활이 그것도 새파란 처녀의 성행위가 천하에 공개되고 만인의 오락거리가 되어버렸다. 남에게 알릴 일도 아니고 알아서도 안될 사실이었다.  그런데 집단사고, 집단행동은 많은 경우 인간의 도덕성과 수치심을 마비시킨다. 너도 나도 당연하게 보는 것이므로 보는 일의 수치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늘어난다. 알려진 행위도 수치스럽지만 그것을 보는 일도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백양의 비디오는 그녀 자신에게는 일생동안 치유되기 힘든 상흔을 남겨주었고 그것을 시청한 사람들은 그녀의 수치심을 발가벗기는 가학자가 되게 하였다. 그녀가 정말 한사람의 내 이웃이며 존엄성을 지닌 인격체라고 인정한다면 우린 그녀의 사생활을 염탐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나를 기성세대의 꼰대라고 치부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세대들이라도 그녀가 내 누이나 여동생이라면, 혹은 내 동창생이라면 맘 편하게 그 비디오를 시청했겠는가.

 나는 여기서 그녀를 시청한 우리 대학생들을 비난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일차적인 책임은 性에 대해 민망스러울 정도로 자유스런 그녀 자신과 파트너의 무너진 수치심에 있다. 나는 진심으로 그러한 영상물을 촬영한 자나 그것을 배포한 인간들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성을 자신의 야망을 위해 상납하고 이용하는 천박한 그 집단의 생리가 씁쓸하다.

  아무리 신세대의 사고와 행동방식이 자유분방하다고 해도 신세대는 기성 세대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존재할 수는 없다. 성 개방과 자유로운 혼전섹스를 즐기는 세대라 해도 그들의 내일은 기성세대의 며느리이며 사위요, 한 어린 생명의 엄마, 아빠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녀 뿐 아니라 앞으로도 수없이 제2, 제3의 백지영은 등장할 지 모른다. 그러한 비디오를 계속 호기심으로 즐길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나는  단 한사람이라도 분명한 내 기준을 갖고 자신과 이웃에게 해가 될 문화들을 분별하여 취사 선택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것이 이 사회를 지키고 보호하는 건강한 사회인의 책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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