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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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해성사, 죄를 지우는 영원한 지우개 - 폴 마리아 시글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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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4.10.164.*]

2013-05-17 ㅣ No.10165


하느님의 사랑의 성사인 고해성사를 외면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오늘날 유럽인들은 고해성사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유럽의 상당수의 고해소는 비어 있고, 심지어 그곳이 진공청소기와 빗자루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기도 한다. 독일 쾰른 대교구의 요아힘 마이스너 추기경은 이런 현실을 “무죄의 광기”로 정의했는데, 이 무죄의 광기가 그리스도인들을 덮쳐 고해성사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로 참회하며 죄를 고백하고, 사제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죄의 용서를 깊이 감사하며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는 비법은 무엇일까? 특히 유럽의 경우, 그 어떤 제도나 권력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2000년 전 이층 다락방에서처럼 하느님의 사랑의 성령이 다시금 부어져야 가능하다. 암스테르담에 오신 모든 민족들의 어머니께서도 성령을 초대하는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지금 이 세상에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소서. 모든 민족들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살게 하시어 그들을 타락과 전쟁과 재앙으로부터 구해주소서….”

그러므로 사랑의 성령을 청하고 그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가득 채우게 될 때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의 법을 얼마나 어겼는지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사랑은 우리 마음이 참회와 용서와 화해를 갈망하도록 영향을 끼칠 것이다.

자신의 허물과 죄를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사제에게도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자비의 사명을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맡기신 하느님께서 사제들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셨다.

“사제들이 나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자비에 대해서 말하고 내가 마음속에 죄인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 사제들의 말을 듣게 되는 비정한 죄인들도 회개 할 것이다. 나의 자비를 선포하고 찬양하는 사제들에게 비상한 힘을 줄 것이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기름으로 축성하고,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다”(일기 152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특히 나약함과 죄 때문에 슬퍼하고 용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당신의 위로를 가득히 받기를 갈망하신다. 그 위로를 받기 위해서 멀리 찾아다닐 필요는 없으며 거창한 의식도 필요 없다고 하셨다.

“어디에서 위로를 찾아야 하는지 영혼들에게 말해주어라. 그것은 바로 자비의 법정, 곧 참회의 성사이니 그곳에서는 가장 거룩한 기적이 일어나고 그 기적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 다만 믿음을 가지고 나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가서 그에게 자기 자신의 비천함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1448).

하느님의 사랑의 성사인 고해성사가 지닌 힘에 관해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셨다.

“썩은 시체와도 같은 영혼, 그래서 인간의 관점으로는 회복의 희망도 없고 모든 것이 이미 끝나버린 것처럼 보이는 영혼도 하느님과 함께라면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자비의 기적은 그런 영혼도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다”(1448).

천상의 복락을 누리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고 치부하는 것은 사탄의 유혹이다. 우리의 죄가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기 위해선 피에타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고통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셨다.

“나는 죄인들이 내 마음에 퍼붓던 고통들은 다 잊어버리고, 그들이 내게 돌아왔다는 그 사실만으로 기뻐한다”(1728).

“나는 사랑과 자비 그 자체이다. 어떤 비천함도 나의 자비보다 클 수 없고 나의 자비를 고갈시킬 수 없다.… 나의 자비에 의탁하는 영혼은 가장 행복하다. 내가 직접 그를 돌보기 때문이다”(1273).

퍼내면 퍼낼수록 오히려 더 많아지고 더 증가한다는 것은 지상적인 논리에 어긋난다. 돈을 쓰면 쓸수록 은행 잔고는 줄어든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기에 우리가 그 자비에 의탁하면 할수록 더 많이 흘러나온다. 이처럼 놀라운 은총의 효과를 나는 피정이나 순례 등에서 여러 번 체험했기에, 특히 사제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생생하게 체험하며 살아야 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사제들이 먼저 그렇게 해야만 이 시대의 사람들이 죄와 그들의 내면에 자리한 슬픔과 불안을 심리치료사에게가 아닌 우리 사제들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가져가도록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단죄하지 않으시며 그들이 지닌 불안을 지워주신다.

“나는 앓고 있는 인류를 벌하고 싶지 않다. 나의 자비로운 성심으로 그들을 안아 치유해주고 싶을 뿐이다”(1588).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고해성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따뜻한 사랑의 용서를 체험하도록 하는 것은 사제들에게도 얼마나 큰 은총인가!

 

 

죄를 지우는 영원한 지우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이며 가톨릭 신자인 에르빈 링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로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낸 사람으로 확신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내적으로 자신의 죄를 의식하고 있지만 그것을 고해성사로 씻어낼 생각은 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죄를 밀어냅니다. 바로 그 점이 그들을 노이로제로, 정신병으로 몰고 갑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해결책을 갖고 있는데,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고해소의 성인으로 불리는 요한 비안네 성인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계속 밀어낼 수 없으며 숨길 수도 없습니다. 밀어내고 숨긴 죄는 다시 밀려오며,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죄를 정말 잘 숨기고 싶다면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사죄경의 순간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등 뒤로 던져버리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잊으시고 소멸시키십니다. 그럼으로써 다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하여 받는 용서가 얼마나 온전하고 완전한지를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세기 독일의 예수 성심의 신비가인 헬프타의 마틸다 성녀(+1298)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참회하는 죄인에게 나의 자비로써 한순간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며, 마치 그가 결코 잘못하지 않은 것처럼 나의 성심은 그에게 한없는 자애와 자비를 베푼다.”

마더 데레사 역시 이 진리를 사랑의 선교회 수도자들에게 상기시켰다.

“매우 죄 많은 삶을 살았던 한 남자가 어느 날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이 다섯 장에 그동안 자신이 저질렀던 악한 일들을 빽빽이 기록하면서 참회했습니다. 그리곤 사제에게 가서 종이에 쓴 것을 차례대로 읽어 내려갔습니다. 다 읽은 다음에도 불안이 가시지 않아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빠뜨린 게 하나 있는 것 같은데….’그는 첫 장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종이는 깨끗한 백지였습니다. 둘째 장을 들었지만 역시 백지였습니다. 셋째 장, 넷째 장, 다섯째 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용서의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죄들이 다시금 기억에 떠오를 때면 이 말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죄가 우리를 불안하게 해선 절대 안 된다. 오히려 용서받은 것에 감사하도록 하고, 우리를 겸손하게 하며,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살면서도 이웃에게는 인색하게 구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

 

 

고해성사로 인한 치유

 

우리는 몸이나 정신에 고통을 느낄 때 해당 부위의 치유를 기대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영혼의 치유가 더 우선이다. 카파르나움의 중풍 병자의 경우에서 그 점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남자 네 명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눕혀 지붕을 뚫고 주님 앞에 내려 보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첫 번째 선물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육신의 치유가 아니라 죄의 용서로 인한 영혼의 치유였다. 그런 다음 중품을 낫게 하셨다(마르 2,1-12 참조).

2000년이 넘는 교회 역사나 성경에서 볼 때 죄의 용서로 인해 육신의 치유가 일어나거나 효과가 나타나는 사례는 적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과 영혼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영혼이 치유되면 그 효력은 우리 자신에게 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전해진다. 아르스 성당의 본당 신부 요한 비안네 성인의 전기에 수록된 이 일화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1840년경 아버지 로쉐떼는 아들을 아르스의 ‘기적을 일으키는 신부’에게 데려왔다.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아들의 치유 생각뿐이었다. 아르스에 오기 전에 그는 몇 번 성당에 갔었지만 입구에 있는 성수반까지만 갔지 더 이상은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비안네 신부님이 제대 뒤에서 사제들의 고해를 들은 뒤 나왔을 때, 그때도 그는 멀찍이 서 있었다. 비안네 신부님이 그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눈짓을 했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와 함께 제대 옆에 서있던 그의 부인에게 신부님이 물었다. ‘남편이 원래 완고하고 믿음이 없습니까?’ 세 번째 눈짓에 드디어 그는 결심했다. 아들과 아내가 제단 뒤로 사라지자 아버지 로쉐떼는 아이처럼 사제에게 죄를 고했다. 14년 만의 고해성사였다! 다음날 그는 아내 곁에서 성체를 받아 모셨다. 그리고 그 부부의 아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지팡이 두개를 아르스의 성당에 버렸다. 완전히 치유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치유 사례가 있는데, 전신마비 환자가 남편의 회개로 인해 완전히 치유된 후 프랑스의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경우다. 그녀의 남편 모리스 켈레 박사는 산부인과 의사이며 프리메이슨 당원이었다. 그의 아내 클로드는 치료가 불가능한 전신마비 환자였다. 의료진도 손을 놓았고, 피레네의 온천욕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녀는 무신론자인 남편에게 자신을 루르드로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달갑지는 않았지만, 모욕요법이 절망감에 사로잡힌 아내에게 심리적인 위안이라도 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것은 1984년 2월 초였으며, 그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전해주었다.

“루르드에서 아내가 침수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얼음처럼 찬 보슬비가 내리는 바깥에서 있었다. 따뜻한 곳을 찾던 중 우연히 대성전의 지하 성당에 들어가게 됐는데, 거기서는 마침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태오 복음이 선포되고 있었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 7). 그 순간 예수님의 이 말씀이 번개처럼 나를 관통했다. 놀랍게도 내가 프리메이슨에서 더 높은 직급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말씀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이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너는 아내가 여기서 치유되기를 희망하는데, 그럼 클로드의 치유를 위해서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너무 하찮은 것이지만, 지난 40년간 교회를 반대하며 투쟁했던 무신론자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미사 후에 즉시 고해소의 사제에게로 가서 내 결심을 전했다. ‘지금 당장 세례 받고 싶습니다.’”

클로드의 증상은 루르드의 기적수 침수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반면 그녀의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아내의 몸을 치유하는 대신, 내 영혼과 정신을 치유하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

두 달 후 부활 대축일 저녁에 모리스 켈레는 가톨릭 교회의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로써 그때까지 그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음과 동시에 하느님과의 완전한 화해가 선물로 주어졌다. 이 부분에 관해 그가 전한 바는 이렇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모든 죄가 깨끗하게 씻겨 졌다는 사실이, 가난한 영적 공동체에 가족이며 형제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클로드의 건강 상태도 급속도로 좋아져서 내가 세례를 받을 때 아내는 내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활동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켈레 박사는 프리메이슨을 탈퇴했다. 그러면서 넓은 공공장소만을 찾아다녀야 할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프랑스 전역을 다니며 전했다. 프리메이슨의 투사로서 극단적으로 교회를 모함하고 반대하던 자신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과 신앙의 삶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고해하기

 

메주고리예는 “세계의 고해소”라고 불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메주고리예를 찾아와 죄를 고백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첫 발현 후 두 달이 지난 1981년 8월 성모님께서 목격자들에게 당부하셨다.

“내일 나는 굼노 들판에 나타날 것이다. 마을 사람들도 너희들과 함께 그곳으로 와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약속한 날 밤 10시에 성모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고 싶은 사람은 오늘 그래도 된다.”

그러자 목격자들이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만질 수 있나요? 사람들은 어머니를 볼 수 없잖아요! 우리만이 어머니를 볼 수 있는데….”

“가서 그들을 내게로 데려오너라. 그들은 나를 만질 수 있다.”

놀란 목격자들은 성모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성모님께서 주신 선물을 설명해주고, 한 사람씩 성모님 가까이로 데려갔다. 그리곤 마을 사람들의 손을 성모님의 어깨, 머리, 베일, 팔에 대어주었다. 비록 성모님을 보지 모하고 말씀을 듣진 못하지만, 그들은 성모님의 현존을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었으며, 결코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장면 동안 성모님의 옷 위에 점이 나타나더니 점차로 더 커져갔다. 동시에 깊은 슬픔이 성모님의 얼굴을 어둡게 했다. 목격자들은 당황했다.

“성모님, 옷이 완전히 더러워졌습니다!”

그러자 성모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얼룩들은 나를 만진 사람들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 순간 목격자들이 외쳤다.

“이제 그만 만져요. 그만!”

그러자 성모님께서 매우 진지한 어조로 고해성사와,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셨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지상에 아무도 없다!”

그 순간 한 남자가 소리 질렀다.

“우리 모두 고해성사로 깨끗해지도록 해주십시오!

그날 저녁,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원했기에 요조 신부는 이웃 마을에서 사목하는 동료들까지 불러야 했다.

 

 

“너희의 마음은 한 송이 꽃과 같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교구의 게오르크 에더대주교는 1998년 12월 메주고리예에 머물면서 슬라브코 바바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점차로 잃어버리고 있는 세 가지가 메주고리예에는 있습니다. 바로 고해성사, 회개, 성소입니다. 실제로 고해성사는 우리에게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성지와 수도원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성소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신학교를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메주고리예에서는 이 모든 것이 살아 있습니다. 고해성사, 회개 그리고 성소! 메주고리예는 우리가 잃고 있는 바로 이 세가지를 우리에게 채워줍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단언하셨다.

한 달에 한 번 받는 고해성사가 서구 세계를 구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1982년 8월 6일).

성모님의 이 말씀을 증명하듯, 매년 전 세계에서 메주고리예를 찾아오는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고해성사라는 특별한 은총의 방법으로 하느님과 화해를 체험하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수년 혹은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하지만….

은총은 신자들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메주고리예에서 고해성사를 주는 수많은 사제들도 몇시간 동안 고해를 들은 후에는 자기 자신이 새로워진 것 같은 체험ㅇㄹ 하게 됐으며, 사제가 된 사실에 그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느끼게 됐다고 했다.

메주고리예 발현이 목격자인 마리아 파블로비치 루네띠도 고해성사와 관련된 체험을 이렇게 밝혔다.

“언젠가 고해소 앞에서 기도하던 중 내적으로 한 송이 꽃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처음엔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싱싱하고 완전히 만개하여 색깔도 화려했습니다. 보는 것 자체로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더니 꽃잎이 닫혀버리고 시들어버리면서 좀 전의 아름다움과 화려한 색체가 모조리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과정을 모조리 지켜보았습니다. 너무 슬펐습니다. 그리곤 시들어 덮여 있는 꽃잎 위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꽃잎이 다시 열리더니 처음의 싱싱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되찾았습니다!

이것을 며칠 동안 마음에 품고서 내게 주는 의미를 찾고 또 찾았습니다. 하지만 도저해 찾을 수 없어 발현하신 성모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성모님, 기도 중에 제가 본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 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모님은 미소를 띠신 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마음은 한 송이 꽃과 같으며, 꽃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너희가 죄를 지으면, 꽃이 시들어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듯 그렇게 된다. 꽃잎 위로 떨어져 꽃을 싱싱하고 아름답게 하는 그 물방울은 고해성사의 효력을 상징한다. 너희가 죄의 상태에 있으면, 너희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고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 마리아 171호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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