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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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2-05-21 ㅣ No.33750

제가 한 때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때였습니다.

워낙 작은 본당인지라 한 해에 신입교사가 2명만 들어와도 ’성공이다!’라는 환호를 내지르던 상황에서..

해괴하게도(?) 한 해는..

신입교사들이 5명이나 한꺼번에 입단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환희도 잠시..

곧 저희는 갑작스런 분위기 전환에 한동안 홍역을 치러야 했습니다.

중간 학번이 모두 군대를 가버리는 바람에..

남은 경력 교사라곤 온통..

예비역들 일색인 남교사, 혹은 ’교사단에 뼈를 묻은 귀신’인 여교사들이었던 까닭입니다.

 

경력 교사들은 이른바 ’노땅’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교사단에 대해 알 만큼 안다.. 하고 자부했던 사람들이었기에..

여름신앙학교, 혹은 성탄제와 같은 큰 행사들도..

’행사, 열흘만 준비하면 우리만큼은 한다..’ 식으로 어느 정도 구색은 맞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경력에 비례하여 완고하고 경직된 사고를 지니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저희들에게..

신입교사들은 참으로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귀엽고 상큼한 것이야 말할 나위 없었지만.. 반면에 당돌하고 제멋대로인 부분도 있었으니까요.

 

예를 들면..

노땅들의 술에 대한 가치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술은 두 종류 밖에 없다.

첫째, 두꺼비.(참이슬 나오기 전의 진로 소주 말입니다.)

둘째, 두꺼비를 제외한 나머지 술.

 

죽으나 사나 두꺼비..

’아~~ 진로는 나의 빛’을 외치던 노땅들에게, 신입들은 듣도 보도 못한 신종의 술을 고집, 아니 강요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지 어디서 감히 쫑알거리는 게야.. 선배들의 매서운 눈초리에 오금을 펴지 못하고 술을 배웠던 기억이 생생했던 저희 노땅들은..

대차게도 ’저희는 소주 싫어욧! 너무 쓰잖아욧!’ 하는 신입들의 거센 항변에 부딪혀야 했던 것입니다... (누구는 그게 달아서 배웠냐..)

 

그들로 인해 체험했던 신 주종은..

이른바 ’소주 칵테일’..

레몬 소주, 포도 소주, 딸기 소주, 체리 소주..

심지어 두꺼비를 기울일 때 참으로 황송한 안주였던 그 아삭아삭한 오이를 넣은 오이 소주까지...

세상에 넣을 수 있는 건 모두 넣은 듯한 이런 소주들이었습니다..

버릇없는 손주 녀석, 오냐오냐 하니까 할아버지 수염까지 뽑으려 한다더니...

참으로 버르장머리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발칙한 것들이었죠.

 

어디 그 뿐입니까.

황혼에서 새벽까지 1차, 2차, 3차..

그저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내던 저희 노땅들과 달리..

그들은 고양이 오줌만큼 적은 양을 홀짝거리다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지들 컨디션이 안 좋다 싶으면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죠.

- 아줌마~~ 여기 사이다 한 병 주세요..

그리고는.. 감히 사이다를 소주잔에 넣고 마시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주성모독이여..

사이다를 건배하고.. 사이다를 완샷하고.. 심지어 사이다잔을 돌리고...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노래방이며, 오락실이며, 게임방이며..

이런 곳들로 저희 노땅을 끌고 다녔습니다.

그래도 교사해준다는 게 어디냐 싶었던 저희는 혹여 아는 사람이 볼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노래방, 오락실(그것도 펌프를 하는..), 게임방.. 이런 곳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근데 정작 노땅들을 아연케 하는 것은 이런 당돌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열정은 있되 기본이 없다’가 문제였죠.

실로 이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리를 마치고 교사방에서 쉬고 있는 제게 한 신입교사가 묻더군요.

- 선생님. 바벨탑이라는 것도 있어요? (힉! 아니.. 그럼 얘가 바벨탑을 몰랐단 말인가..)

왠지 말도 못할 공포감과 두려움이 엄습하더군요.

- 기억 안나? 창세기에 나오잖아.. 근데.. 왜...?

- 웬일이야.. 그럼 내가 실수했네..

- 왜? 무슨 일인데..?

- 글쎄 교리 시간에 어떤 애가 질문을 하잖아요. 바벨탑이 뭐예요? 하구요.

- 그래서?

- 그래서 제가 쪽을 줬죠.(상스러운 표현이지만 현장감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 아니, 글쎄 뭐라고 했는데?

- 야 임마! 바벨탑이 어딨냐.. 아벨탑이지.. 이런 무식하긴...  이랬거든요.. 어떡하지.. 아이씨..

- ............

 

그 뿐이 아닙니다.

또 한번은 다른 녀석이 제게 와서 묻더군요.

- 선생님 엘리사벳이 누구예요? 애들이 묻던데..

이미 한 차례 이들을 경험했던 터라.. 전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이번엔 또 뭐냐...

절망감에 사로잡혀 이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봤죠..

그랬더니 이 녀석이 하는 말..

- 그.. 나이 들어서 임신한 할머니(!) 아니예요? (에그.. 말하는 폼새하고는..)

그래도 순간 눈이 번뜩 뜨이더군요. 그래, 너는 뭘 좀 아는구나..

대번에 대답했습니다.

- 맞아 맞아.. 잘 알고 있네..

그러자 희색이 만면하여 이 녀석이 하는 말..

- 아~~ 맞구나.. 그 남편 아브라함..

순간 울음 섞인 웃음이 나왔습니다.

흐흐흑... 이게 웬 퓨전 바이블이람.. 신약과 구약이 언제 합본됐지...?

 

이런 지경이니..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학번이었던 저희 노땅들은..

허구헌 날 모여서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숙덕댔습니다.

- 야.. 군기 잡아서 교육 좀 안 시킬래?

- 어지간해야 교육을 시키죠. 주일학교 학생들만큼도 모르는데..

- 이러다가 정말 주일학교 간판 내리게 되는 거 아니냐?

그러자 선배 하나가 저희에게 호령을 하더군요.

- 대체 어떻게 후배 교육을 시켰길래 그 모양이야! 이게 말이 돼?

- 근데.. 형.. 생각해보면요.. 걔네 5학년 때.. 형이 담임이었어요...

- ...(잠잠)....(침묵)....(고요)...... 내가.. 죄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있습니까..

세월 앞에는 장사없다고..

저희 노땅은 하나 둘씩 교사단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취직 때문에, 진학 때문에, 혹은 결혼 때문에..

그러면서 모두들 똑같이 생각했죠..

내가 나가면.. 주일학교 꼴이 뭐가 될꼬..

이렇게 뒤돌아 보며, 뒤돌아 보며.. 자꾸 뒤돌아 보며..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미사 시간이 달라 한동안 교사단을 찾지 못했던 저는..

실로 간만에 초등부 미사에 갔더랬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죠.

에그.. 보나마나 뻔할 거다.. 좌충우돌 우왕좌왕.. 아마 날 보자마자 환호하겠지.. 그리고 바짓가랭이 움켜쥐고 잡을 거야..

 

그리고 교사방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모든 상상을 무너뜨리며..

그들은 너무나 의연하게 저를 맞더군요.

- 어머.. 선생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잠깐만요, 선생님. 조금 있다가 교리 들어가야 하거든요..

그리고 곧 눈길을 거둬 교리 준비에 여념이 없는 겁니다.

- 아무개 선생님.. 3학년 준비 다 됐어요?

- 그럼요. 오늘 교리는 슬라이드와 OHP가 필요한데.. 이거 미리 준비해야겠네..

 

그야말로 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습니다..

비맞은 장닭처럼 무안하게 입맛만 다시던 저는..

- 그래.. 그럼 수고해라.. 그냥 너희들이 궁금해서 와 봤어..

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제법 인사도 차리더군요.

- 왜요.. 미사 끝날 때까지만 기다리세요. 오랜만인데 얘기도 좀 하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주저앉았죠.

 

그리고 교사 회합이 끝나고 간단하게 뒷풀이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 뒷풀이에서 전..

예전의 그 막되먹고 어설펐던 신입들이 아닌.. 진정한 교사들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어느새 이것들이 이렇게 컸을꼬..

한편으로는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무안하더군요.

나 없이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이렇게 생각했던 제 자신이...

그리고 함부로 그들을 미숙하다 속단했던 제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곳이든지.. 아무리 나 자신을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라 자신했다 해도..

나란 사람은 참으로 미약한 존재여서..

마치 물 속에 발을 집어넣어다가 뺀 것처럼..

자취도 남지 않는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어느 자리던지... 하느님께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

 

사실.. 오늘 전 또 한번 그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다름 아닌, 이 게시판 속에서요.

며칠 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작은 소동이 일단락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또 한번 예의 그 잘난 척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주제넘게 나섰던 제 모습과...

그리고 그 대가로 또 한번 상당히 초라해지고 우습게 된 제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예전 동료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느꼈던 그 부끄러움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되는군요.

 

비단 사회나 정치의 현상에서뿐만 아니라..

한 때 제가 머물렀던 주일학교가 그랬듯이..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면 응당.. 보수와 진보, 안정과 개혁이란 단어가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어느 분께서 지적하셨던 것 같이..

전 아마 그저 제가 젊다는 이유만으로 위험한 변화를 진보라고, 개혁이라고 착각했었나 봅니다.

좀더 지혜와 분별이 있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진정 올곧고 바람직한 진보와 개혁은..

그 의도와, 과정과, 그리고 그를 행하는 사람들 모두가 선량한 의지를 가질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음을..

제 아둔함이 미처 살피지 못했었습니다..

 

멋모르고 부화뇌동하여 ’불순한 주장에 심정적으로 동조한 자’로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른 척 그냥 넘어갈까 했지만..

아무래도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어쩌지 못해..

다시 한번 장황한 잡문으로 게시판을 어지럽힙니다.

 

하지만.. 저도 인간이니만큼.. 조금은 서운한 것이..

마치 승리자인 듯.. 올리신 많은 님들의 글들이 제 마음을 무참하게 하는군요.

뭐라고 떳떳하게 한 마디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 동안 꿋꿋하게 한결같은 모습을 보인 님들이시니만큼..

아량과 관용으로 다른 사람들의 허물도 덮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간의 화제였던 책,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1권부터 9권까지..

전권을 통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가 그 오랜 역사 동안 강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한가지 이유는..

로마만이 가졌던, 그리고 로마만이 가질 수 있었던 ’패자에 대한 아량’이다..

그들은 일단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패자들은 모두 포용하여 로마 자신으로 그들을 모두 흡수했다.

 

전쟁과 대결로 점철된 타민족 간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것을 찾아볼 수 있음인데..

더군다나 굿뉴스 안에서 함께하는 신앙인에게 ’관용’을 바라는 것은..

헛된 기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님들께서 그런 관용을 베푸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럼.. 평안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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