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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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친 이홍건(가스파르)에 관한 신문기사와 뉴스 동영상 *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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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철 [hl5ye] 쪽지 캡슐

2016-11-03 ㅣ No.88781

 주: 인터넷에서 우연히 선친에 관한 보도자료를 발견하여 올려봅니다. 지난 1989년(향년 62세)에 지병으로 선종한 저의 선친 이홍건(가스파르)을 기도중에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신념 앞에 절망은 없다 (원호성금 1억 원 기부한 대구 전상용사 이홍건씨) -

                                                                                                                  (출처: 1977년 1월 19일 서울 신문) 

"6.25때 잃은 한쪽 다리와 한 팔을 원호 장학금 1억 원을 내놓음으로써 되려 보상받은 기분입니다. 정말 기쁩니다."

  戰傷 기업인 이홍건(49)씨가 지난 15일 류근창 원호처장에게 대동전기의 주식 3분의 1을 맡기고 담담하게 밝힌 소감은 거듭 반추해야 그 뜻을 알 것 같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훨씬 값지다는 진리를 이제 터득 한 것 같다"라며 혼잣말로 말끝을 흐리기도----. 연필 한 타스로 시작해 약 5억 원의 재산을 일군 이씨의 끈덕진 집념이 仁과 義를 향해 발현된 것이라나 할까----


  지난 20여 년 간 목발과 의수에 의지해 갖은 고난과 역경을 디디고 모은 돈이 그 만큼의 값진 감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8월 2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철 하오. 조형기 대구 지방 원호 청장 실에 의수에 목발을 짚은 중년 상의 용사가 찾아왔다. 조청장은 원호 자금이 적다고 항의 하러온 상의 용사로 보고 비서에게 원호과로 안내하라고 일렀다. 이 순간 목발의 상의 용사는 불쑥 조청장의 손을 잡으며 자기 재산을 불우한 원호 대상자에게 헌납하고 싶어 왔다고 했다. 그는 자기의 재산 명세서를 조청장에게 내보인 뒤 "5억 원의 전 재산을 바쳐 불우한 원호 대상자의 자활을 돕고 싶다"고 제의했다.  고난의 억척 인생을 맞대 앉은 조청장은 처음에는 그의 제안을 선뜻 받아 들일 수 없다고 만류했다. 그러나 이씨는 끝내 자기 재산의 일부라도 내놓겠다고 우겨 원호 장학금 1억 원의 헌납이 이루어 진 것이다.


  이날밤 그는 지난날의 감회가 굽이굽이 북바쳐 온통 뜬눈으로 지새웠다고 한다. 이씨의 인생 역정은 재산 헌납 제안만큼이나 극적이고 끈질긴 감동의 연속. 휴전 조인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1953년 7월 오른 팔과 왼쪽 다리르 잃은 채 2급 상이 용사로 대구의 제27 육군 병원을 나설 때 그가 몸에 지닌 것은 제대비 1천 3백환과 보철 손, 목발이 모두였다. 갈 곳 없이 대구 거리를 방황하던 그는 자살만이 남은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경부선 철길로 달려간 그는 열차에 몸을 던지기 직전 2년 동안 친동생처럼 병상을 지켜준 홍 모니카 수녀의 얼굴이 떠올라 자살을 단념했다.  그녀가 베푼 정성을 저버리고 끝내 자살을 한다면 이는 곧 그녀에 대한 배반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용기를 얻은 것. 그의 성공은 이 자살을 막아준 홍 모니카 수녀의 인간애 때문이었다고 홍수녀를 늘 못 잊어 했다.


  평남 용강이 고향인 이씨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진남포 상공학교를 졸업하고 공산 학정에 못 이겨 부모를 북에 둔 채 단신 월남해 국방 경비대에 자원 입대했다. 그 후 6.25발발. 1.4 후퇴 때인 51년 1월 1일에 평양 비행장 폭파 작업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대하다 동두천에서 적의포위망에 갇혔다.  16명의 대원을 이끌고 산허리를 돌아가던 도중 맞은 편 언덕에 매복해 있던 적이 일제히 공격을 가해 이씨는 수류탄에 오른 팔이 날아가고 왼쪽 다리에는 10여 발의 다발 총탄이 관통되어 중상을 입었다.  12차례의 대수술을 받는 등 사경을 헤매던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홍 모니카 수녀는 당시 부상 장병 간호를 위해 대구 수녀원에서 파견된 수녀 간호원이었다. 홍수녀는 썩어 가는 다리와 잘려나간 팔을 보고 발아하는 그에게 사비로 치료약을 구해 상처를 보살펴주고 또 한편으로는 절망을 이기도록 용기를 실어주곤 했다. 홍수녀는 그가 병원문을 나와 자활의 길을 힘겹게 걷고 있을 때도 자주 찾아가 삶의 의욕을 보탰다. 몸은 비록 불구지만 병들지 않은 정신으로 자활의 길을 걷겠다는 그의 의지가 새로운 생활에 자신을 갖게 한 것. 

 
  54년 봄에는 배를 곯으면서도 가슴 속 깊이 간직했던 제대비 1300환 중에서 100환으로 연필 1타를 사 상가와 관공서를 돌며 행상을 시작했다.  연필 1타의 수익금은 30환. 이에 힘입어 나머지 1200환으로 연필 6타와 담배 20갑을 사 본격적인 행상을 시작했다. 당시 상이 군인들의 행패로 시달림을 받아 온 대구 시민들은 그의 성실한 자세에 감명을 받아 힘껏 도와주었다.  꿀꿀이 죽 두끼만으로 허기를 때우면서 1년 동안 모은 자금이 3만환.


  이 돈으로 대구 교외에 처음으로 판잣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자기와 같이 의지 할 곳 없는 상이 군인들이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고 혼자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의탁 상이군인 25명을 모아 '이나시오 상이군인 갱생원'이라는 간판을 내 걸고 고물, 휴지 등을 주워 팔고 신체적인 조건이 허락하는 회원은 품팔이를 시키면서 공동 자활의 길을 찾았다. 이들의 착실한 새 생활이 알려지면서 각지의 도움이 잇달아 갱생원 설립 2년만에 25명의 회원은 모두 각급학교, 교회, 기업체 등의 수위, 경비원 등으로 취직해 하나 하나 독립해 갔다. 그 길로 그는 갱생원을 해체하고 다시 혼자 새 길을 찾아 나섰다.


  그 동안 모은 4만 원의 저금과 대구 천주교회에서 10만 원의 빚을 얻어 57년 대구 역 앞에 노점인 '라디오' 수리상을 차렸다. 그는 공고 통신과 출신인데다 군에서 통신병으로 일한 경험이 있어 왼손으로 라디오를 조립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의 노점은 1년 만에 버젓한 점포로 바뀌었으며 재산도 1백만 원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왔다.  옆 집 점포의 갑작스러운 화재로 하루아침에 전 재산이 잿더미로 변하고 만 것이다. 이때 그가 자립시켜 주었던 25명의 상이용사 동료들이 50만 원의 자금을 모아와 그의 자립을 도왔으며 그의 성장을 지켜보던 주변의 동료들이 무이자로 1백만 원을 빌려주어 재기를 부축했다. 부인은 이씨와 같은 월남인으로 대구 수녀원에서 6개월 째 수녀 연수를 받고 있던 중 홍모니카 수녀로부터 이씨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나서 58년 결혼했다. 부인은 남편이 잃은 한 팔과 다리가 되어 사업을 도운 결과 사업이 크게 번창, 라디오 부속상은 각종 전기 제품 재료상으로 성장했으며 60년에는 종업원 6명을 거느린 대동 모터 공업사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공업사가 그 동안 외국의 수입에만 의존해온 각종 모터를 국내 생산하게 돼 수입 대체 품목으로 바꾸는데 큰 몫을 한다. 

 
  지난 10월 대동전기공업주식회사로 회사 명칭을 바꾼 그의 기업은 종업원 200명에 각종 모터, 레코드, 플레이어, 선풍기, 전열기구 등 가전 제품을 생산하는 공칭 자산 5억 원. 지난 73년부터 일본,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에 연간 10만 달러 어치를 수출하고 있으며 올해 안으로 공장 안에 진학 못한 원호 대상 자녀를 위해 '군경 유자녀 기술 훈련소'를 설치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 선친 이홍건에 관한 동영상자료 :  http://film.ktv.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10127&mediadtl=20596&gbn=DH&quality=W&page=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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