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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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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9-03-28 ㅣ No.217699

 

 

 

안중근 의사는 190910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을 명중시킨 후에 만세를 불러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안 의사는 뤼순감옥으로 옮겨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1910214일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326일 뤼순감옥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때 안중근의 나이는 32.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 또한 40대였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도 짧고 단호한 편지를 남겼습니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 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먹지 말고 죽어라!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이의 옷을 지여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았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돼 이세상에 나오거라!

 

1910214일 뤼순 지방법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혐의를 받는 안중근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이 소식은 국내에 머물던 어머니 조 마리아게도 전해졌다. 조 마리아는 안중근의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을 급파했다. 두 사람의 손에는 어머니가 장남에게 전하는 편지가 들려있었다. 편지를 꺼내 읽은 안중근은 이내 충격에 빠진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곧 죽게 될 아들에게 조마리아가 한 말은 "그립다", "보고 싶다"가 아니라 "죽으라."는 것이었다. '대의에 죽어서 나라를 살릴 것'을 당부하는 어머니의 결기에 항소를 고민했던 안중근은 곧장 마음을 바꿔먹었다. 죽음 앞에서 잠시나마 약해질 뻔했던 마음은 오히려 더욱 단단해졌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은 안중근은 동생들과의 짧은 면회를 마치고는 오히려 편안한 표정으로 감옥소로 돌아갔다. 그렇게 안중근은 '항소 포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말은 아마도 우리 독립운동 역사를 통틀어 가장 뜨겁고도 슬픈 한 마디일 것이다. 어떤 어미가 아들에게 죽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조 마리아는 안중근에게 그렇게 했다. 훗날 안중근의 순국은 물론 조 마리아의 이 같은 기개가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전해지면서 1919'3·1운동' 등 독립을 향한 염원으로 이어졌다고 본다면 이 또한 독립운동이라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19091026일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巨事) 이후 일제는 조 마리아는 물론 안중근의 동생 정근과 공근도 심문했고, 두 동생은 한 달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 마리아와 그 가족은 혐의점이 없었기에 풀려났지만, 일제는 '아들 교육을 잘못 시켰다'는 이유로 집요하게 조마리아를 괴롭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조 마리아는 일제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 아들이 나라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나라의 일로 죽는 것은 국민 된 의무이다. 내 아들이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나 역시 아들을 따라 죽을 따름이다."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제는 당시 안중근의 변호인 선임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당시 안중근 변호인을 자처한 외국인 변호사가 있었지만, 안중근은 한국인 변호사가 자신의 변호를 맡기를 원했다. 조마리아는 평양으로 가 독립운동가인 안병찬 변호사에게 아들의 변호를 요청했고, 안병찬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제는 일본 형법으로 일본 법정으로 진행되는 재판에 일본인 외에 외국인 변호사는 선임할 수 없다며 안중근의 변호인 선임을 방해했다. 이에 안중근의 변호는 일본 관선 변호인 미즈노 기치타로 등 2명이 맡게 된다.

 

안중근과 조마리아의 일화는 당시 언론에서도 회자됐다. 국내 대한매일신문과 일제 아사히신문 등은 두 사람 소식을 '시모시자'(是母是子)라 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이는 일본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뤼순 고등법원장은 수감된 안중근을 찾아가 항소할 것을 권했으나 거절했다. 변호사 기치타로 또한 감형 받아보자고 설득했으나 안중근은 거부했다. "나는 처음부터 무죄요, 무죄인 나에게 감형을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다"라는 게 안중근의 답변이었다. 안중근의 간수였던 치바 사토시라는 인물 또한 안중근과 조 마리아 일화에 탄복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10326일 오전 104, 안중근은 절명했다. 조 마리아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면회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죽음을 앞둔 아들의 얼굴을 도저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걸로 풀이된다. 조 마리아는 사형 집행 전날 정근과 공근을 다시 뤼순으로 보냈다. 그들의 손에는 조 마리아가 보낸 명주실로 짠 하얀 수의(囚衣)가 들려있었다.

 

 

1910326일 안중근이 순국하기 5분 전의 모습.

(사진 제공 = 안중근의사 기념 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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