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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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성령의 세례에 대해 정보를 나누어 주시길 요청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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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ㅣ No.10114

성령세례...이 질문에 대해 어떠한 답변이 나올지
저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예의주시했습니다
믿음이 앞선 이, 돈독한 이들의 명쾌한 답변을 기다리며
인터넷을 뒤적뒤적했습니다
개신교의 성령세례와 성격이 많이 다르지만 굳이 연결한다면
견진성사를 성령세례와 견줄수 있겠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왔습니다
성경에 쓰여있는 성령세례...개신교보다 조용(?)한듯한 가톨릭에서
신학원강의 중 성령세례질문은 다른 형제자매님께 방해가 될 듯하여 언급은 안 했지만
견진을 성령세례로 생각한다는 어필을 했을 때 테클없이 그냥 넘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방언의 은사에 관해 질문했을 때 '인정합니다!' 라는 답변도 받았습니다
마침 교파마다의 성령세례에 대한 입장정리가 된 글을 퍼옵니다
만약 가톨릭입장에서 볼 때 유익이 없다 싶으면 삭제되길 희망합니다.


성령 세례에 대한 개혁주의적 관점 _ 월터 카이저


일반적 소개
:

워필드, 존 스토트, 리처드 개핀, F. 브룬너, 제임스 던, 고든피와 더글라스 슈터어트 등의 한국에 매우 익숙한 학자들이 지지하는 관점이다. 다만 애초에 개혁주의 내에 원래 성령 세례에 대한 정교한 관점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 신학이 오순절파를 반박하기 위해 발전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주장:
일반의 오해와 다르게 이 입장은 은사폐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입장은 시기적으로 초대 교회 이후로 은사와 신유, 치유 행위, 기적과 기사 등이 계속된다고 하는 주장에 미심쩍은 태도를 보인다.
월터 카이저는 후기 사도 시대 시대에 보고된 기적들은 가짜거나 아니면 분명히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거나 인간중심적인 신학에 감염된 것들(감리교 성결 운동)이라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이들은 오순절파와 다르게 두 번째 은혜의 역사가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즉, 월터 카이저는 오순절파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의 차이가 성령의 역사가 <회심의 때>에 오느냐, <회심 이후>에 오느냐의 문제에서 그가 전자의 입장을 취한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 입장은 성경의 교훈적 측면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의 한 구절만을 가지고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역전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방언의 은사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성령 세례에 포함되어 나타나는 현상인지 여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본다.

비판:
초대 사도 시대 이후로도 교부들은 여전히 다양한 영적 은사와, 예언과 방언과 치유은사 등의 현상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개혁주의적 입장은 필연적으로 누그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도행전-누가의 신학을 경시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개혁주의의 성령 세례에 대한 입장은 웨슬리안의 또다른 변형이라고 보여질 수 있다.



성령 세례에 대한 오순절파적 관점 _ 스탠리 호튼

일반적 소개:
간단히 한국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복음교회의 신학이다. 최고의 젊은 오순절 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로저 스트론스타드를 꼽는다. 그의 저서로는 "누가의 은사적 신학" 등이 있다. 비교적 최근에 "발전한" 신학이지만, <바울 신학> 일변도였던 개신교에서 <누가 신학>의 발전이란는 측면에서 그 귀추가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주장: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호튼은 누가 신학과 바울 신학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호튼은 성령 세례와 관련 있는 다섯 가지 본문의 사도 행전(누가 신학)에만 집중하고 있다.
호튼은 본고에서 오순절 운동이 웨슬리주의 성결 운동, 케즈윅 운동, 부흥 운동가들 사이에서 사용되던 그 용어를 가져온 것이라는 점을 잘 간파한다.

스탠리 호튼은 두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성령세례의 육체적 증거(은사주의자는 이를 증거로 보지 않는다)는 방언이다. 둘째, 성령세례는 <회심의 때>가 아니라, <회심 이후>에 온다.
성령의 역사가 개인의 삶에 2단계 가진다. 그는 회심과 성령세례를 시간적으로 양분한다. 결정적인 성령 체험은 회심 이후에 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순절파는 방언을 성령세례의 증거로 본다.
사도행전을 매우 중시하여 사도행전이 처음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본다.
오순절파는 성령의 <능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비판:
이 입장은 지나치게 급진-좌파적 입장을 취한다. 예를 들어, 호튼의 가장 빈번하게 인용하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신학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오순절파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경험으로 교리를 서술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성령 세례에 있어서 방언이 첫 육체적 증거가 된다는 주장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방언의 은사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해되는 인지적 언어라고 주장은 신약의 방언과 상응하지 않는다.
성령은 늘 이들이 말하는 방식으로만 역사하는가? 예를 들어, 회심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회심의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는 반면, 어떤 이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히 둘 모두 건전한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방언을 하면서도 능력이 없는 신자들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성령 세례에 대한 웨슬리적 관점 _ 레이 더닝

주장:
미국 전통에서 방언을 말하는 부분만 제외하면 오순절 전통과 거의 흡사하게 되버렸지만, 이러한 오해에 반대한다. 이들은
성령의 역사와 성화를 뗄 수 없는 관계로 파악한다.
19세기 감리교 운동이 웨슬리의 입장을 변형시켰다고 주장하며, 완전 성화와 성령 세례를 동일시하는 성결 운동 지도자들에 반대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중시했지, 성령 세례의 결과인 능력을 중시하지 않았다.
성화가 기독교인이 되는 시간부터 시작된다고 할지라도, 개인의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는 반드시 신학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칭의와 성화가 <연대기적>으로는 동시에 일어나지만, <신학적>으로는 성화가 뒤따라 오는 것이다.

웨슬리는 오순절 성화가 점진적인 것이며 동시에 즉각적인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여기서 레이 더닝은 기독교인들이 단 한 번만의 경험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잘 간파한다.
완전한 성화가 회심 즉시에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런 일은 거의 드물다고 말한다. (이점에서 오순절주의의 관점과 매우 비슷하다. 오순절주의는 회심 이후의 성령 체험을 중시한다.)
현대에 급성장한 오순절파 운동이 웨슬리주의의 성결 운동에서 유래한 것이라 주장한다.
웨슬리주의 해석자들은 육체적 현상들을 시작을 알리는 징후로 간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바울처럼 성령의 은사보다는 성령의 열매에 더 집중하고 있다.

비판:
성령 세례가 회심, 계속되는 채워짐, 완전 성화 모두에 해당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 아무 의미 없는 것 아닌가?
결국에 가서는 성경보다 교회론적 조화에 더 비중을 둔 것이 아닌가?
가장 비판을 적게 받는 더닝의 웨슬리 재해석은 어떤 면에서 진정한 웨슬리안의 관점을 왜곡하는 것은 아닌가?


성령 세례에 대한 은사주의적 관점 _ 레리 하트

입장:
래리 하트 박사는 남침례교 교인으로 기본적으로 오순절파의 경험을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오순절파와 개혁주의의 사이에서 자신이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고 말한다.
요한 신학(유월절적 국면 강조)과 바울 신학(정결의 국면 강조), 그리고 누가 신학을 서로 나누어 설명 한다.
래리 하트의 통합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제임스 던은 은사주의/오순절파에 대한 진정한 지지자이다. 
은사주의적 관점은 오순절파와 마찬가지로 "성령 세례"를 신자들이 어떻게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그 기준이 없다.
독특하게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을 "교리가 아닌 은유"로 보아 오순절파의 입장을 다소 누그러 뜨린다.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오순절파와 다르게 누구는 방언을 할 수도 있고, 누구는 방언을 안 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두 번째 복이 있고, 일반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현상이 포함된다고 결론 내린다.
오순절파는 성령을 받는 것을 강조하고, 복음주의자는 성령세례를 회심의 때로 놓고 있지만 결국 성령이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사역을 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같음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본다.

비판:
웨슬리주의자 레이 더닝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하트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능력"은 성령 세례에 대한 은사주의적 이해의 중심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7일간의 기적으로 이끄는 신비한 능력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여 그들의 의지를 꺽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능력이라면 무슨 근거로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부패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말한 세례와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말한 세례가 과연 같은 세례인가?
두 번째 복이라는 성령세례 개념은 성경적인 것인가?
다락방 강화에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수여된 것이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지 않나?


성령 세례에 대한 가톨릭적 관점 _ 랄프 델 콜


일반적 소개: 랄프 델 콜 교수는 가톨릭 은사주의적 관점에서 자신의 글을 이 책에 기고했으며, 가톨릭의 신학 안에서 어떻게 오순절파의 성령 세례라는 개념이 끼워맞춰질 수 있는지를 잘 지적한다. 그는 가톨릭 은사주의의 개신교에 대한 빚을 스스럼 없이 인정한다.

주장:
델 콜 교수는 성령을 견진 성사 때 받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도 드러나듯이 가톨릭은 항상 성례전 중심적이다.
가톨릭 전통은 성화와 기독교인의 완전함으로 부르심에 관심을 둔다. 기독교인은 의롭다함을 <옷 입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어 가는 것>이다.
랄프 델 콜의 입장을 제외하고서라도
필연적으로 가톨릭의 신학은 개혁주의적 관점보다는 웨슬리와 오순절파의 관점에 더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비판:
근본적으로 성례전 신학적 색채가 강하기 때문에 개신교에서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가는 글


필자는 글을 나가면서 이 논의에 대해 보충적인 성격으로 오순절파 신학에 관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전통적인 개신교 분파들이 인정하는 바울 신학과 특별히 오순절파 신학에서 강조되는 누가 신학이 과연 신학적으로 동등한 위상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성서주의 내에 오순절파 신학이 종속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오순절파 신학이 옳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갈래의 신학 전통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많은 서구 학자들이 오순절파 신학에 감정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바로 그 급진적인 성장세 때문에 있습니다. 이들에 의해 주로 인용되는 것은 항상 아시아와 아프리카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아시아의 거대한 교세를 직접 접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볼 때(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던 바로 그 신학), 과연 오순절파적 눈에 드러나는 "현상"을 신기하다는 듯이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외국 신학자들의 시선이 올바른 것인지 마땅히 비판적으로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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